좋은 책은 독자가 알아 준다고?
얼마 전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다가 꽤 재미있는 대사를 들었다.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기억나는 대로 옮기자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도록 가르친다는 것이다. 드라마 내용에서 산타클로스에 비유된 것은 남녀간의 사랑이었지만, 내 상상의 나래는 엉뚱한 곳으로 번져 나갔다. 예컨대 ‘좋은 책은 독자들이 알아주게 마련’이라는 많은 출판인들의 믿음이 혹 산타클로스였던 것은 아닐까.
만성적인 불황, 축소일로에 있는 시장, 그나마 실용서 중심의 편중된 소비 형태 심화와 같은 누가 보아도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우려와 위기의식이 자못 진지하게 이야기될 때 어김없이 타개 방안을 모색한다며 내놓는 내용들은 대략 큰 줄기에서 ‘더 열심히 더 좋은 책을 만들려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정도로 정리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좋은 책은 결국 독자들이 알아주게 마련’이라고 힘주어 강조하면서, 은연중 ‘출판인들이 안일하고 게을러서 변화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따라잡지 못한 데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이 있다’는 전제를 암시하면서, 짐짓 겸손한 척 다짐을 두는 것이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할까? 그래서 ‘변화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무작정 더 부지런히 따라가 주기만 하면 위기가 타개될까?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체 환경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독자들의 욕구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출판인들의 조바심이 이미 잠재해 있는 위기를 부추겼다고 믿는 편이며, 원인 파악과 대안 모색이 그야말로 ‘안일하고 게으르게도’ 여전히 그 지점에서 맴돌고 있는 한 위기는 점점 더 심화될 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독자들의 욕구가 변화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자. 그것은 출판 매체에 대한 욕구가 예컨대 이런 종류의 출판물에서 저런 종류의 출판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독자들의 욕구는 근본적으로 출판 매체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더 이상 ‘독자’가 아니게 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니 언필칭 ‘독자들의 욕구를 따라간다’는 것은 겸손하게 출판업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 자명한 결론을 차마 직시하기 두려워서 ‘그래도 좋은 책은 결국 독자들이 알아준다’고 되뇌는 것은, 고작 주관적인 희망 사항에 불과한 내용을 마치 객관적인 진리라도 되는 양 자기 최면을 거는 딱한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미안한 말이지만, 출판 매체가 위기를 맞은 것은 독자들에게서 더 이상 ‘좋은 책’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책은 결국 독자들이 알아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야말로 한사코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안간힘과 무엇이 다르랴.
지금은 푸른기와집의 주인이 된 어느 정치인은 한때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대의 정치 제도 아래에서 주권자인 국민을 대표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정치인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이 이 말투를 그대로 흉내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막말로 소비자가 마약을 원한다면 기꺼이 마약이라도 만들어 팔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좋은 책’을 더 열심히 더 부지런히 만드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간 적극적인 대안으로 내놓는 이야기가 ‘좋은 책’을 널리 알리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위기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는 과녁을 한참 빗나간 화살이다. 출판 시장 특히나 인문 교양서 시장에서 ‘광고’의 효과가 의심받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심지어 ‘백광이 불여일홍’――백 번의 광고보다 한 번의 홍보(기사화)가 더 효과가 크다――이라고 익살스럽게 표현되던 ‘서평 기사’조차 책에 대한 인지도는 높일지 몰라도 좀체로 구매로 연결되지 않더라는 한숨 소리도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출판 산업의 ‘부익부 빈익빈’을 가속화할 뿐이라는 일각의 비판과 우려 속에서도 방송 매체를 통한 홍보의 가능성을 요란하게 선포했던 <느낌표>의 반짝 열기마저도 조금씩 약발이 떨어져 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정직해지자. ‘좋은 책’을 더 많은 독자들에게 널리 알릴 방법이 없는 것은, 홍보 방법이 구태의연해서가 아니라 ‘책’이라는 상품에 관심을 가진 소비자층의 규모 자체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홍보 이벤트는 잠깐 동안 시선을 끌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일단 돌아선 발길을 되돌리는 데는 역부족이다. 책은 다른 어느 상품보다도 ‘충동 구매’가 어려운 속성을 가진 상품이며, ‘말을 물가까지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오래된 속담처럼 설령 책을 사게 하는 데까지는 성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책을 읽고 내용을 소화하게 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두 번의 ‘충동 구매’는 책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매개하는 계기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책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얼마 전 만난 어느 대학 교수는, 요즘 대학생들이 텍스트를 이해하고 자기 머릿속에서 정리해서 표현하는 능력이 수준 이하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과제물을 내주며 아무리 친절하게 작성 요령을 설명해 주어도 그 충실도는 차라리 둘째치고라도 ‘제대로 된’ 과제물을 찾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심지어 ‘논술 시험’의 경쟁까지 뚫고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는 게 일과인 학생들이 이런 상황이라면, 그 경쟁에서조차 낙오되어 당장 밥벌이에 바쁜 젊은이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텍스트를 이해하는 능력이 의심스러운 그들이 (문자 텍스트가 아닌) 영상 택스트라고 해서 제대로 수용하고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일이고 보면, ‘매체 환경의 변화’에서만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선정주의에 찌들대로 찌든 기자들에게나 어울리는 그야말로 ‘안일하고 게으른’ 태도이다.
영상 매체가 아무리 위력을 떨치고 디지털 매체가 일상을 파고들어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책의 필요성은 감소하지 않는다. 출판 매체는 다른 매체들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책을 읽어야 할 필요, 더 넓게는 매체를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과 소통할 필요 자체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책을 읽지 않는 대신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고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유행 상품을 소비하고 인터넷 게임을 즐기며 일상을 영위한다. 그것이 ‘독자들의 변화하는 욕구’의 정체이다. 그러니 ‘좋은 책은 독자들이 알아주게 마련’이라는 스스로도 믿지 않을 입에 발린 거짓말일랑 집어치우고, 더 좋은 책을 찾아 읽게 해 주는 두터운 기반이 될 인문적 자산으로 축적되기보다는 한때의 유행 상품으로 소비되고 말 물건을 더 열심히 부지런히 만들어 보겠노라고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더 떳떳할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출판 시장의 위기는 출판 산업의 범위를 넘어선 지평에 있다.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소통(communication)의 위기에까지 시선이 닿지 않는다면, 예컨대 날로 가중되는 무한 경쟁의 압력 속에서 타인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너나 할 것 없이 ‘경쟁의 노예’가 되어 가는 상황 자체를 타개할 방안을 찾는 데 머리를 맞대지 않는다면, ‘좋은 책’을 알아줄 독자는 고사하고 ‘좋은 책’을 만들어 보겠다는 사람조차 점점 더 찾기 어려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