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식실기시험을 보고 왔다. 문제는 ‘경장육사’와 ‘오징어냉채’였다.
제빵기능사반에서 만난 친구 ㅁ은 ‘홍쇼두부’와 ‘해파리냉채’를 했단다. 역시 제빵수업을 통해 알게 된 언니 ㅇ은 ‘짜춘권’과 ‘탕수조기’를 하셨다고. 산업인력공단 앞 서점 예상에 따르면 경장육사 나올 확률이 높다고 언니가 일러 주셨다. 수십 년 전통을 이어 오는 족집게라더니, 과연.
경장육사는 북경 지방의 춘장인 ‘경장’을 넣어 볶은 돼지고기요리이고, 오징어냉채는 삶은 오징어에 오이와 겨자소스를 곁들이는 냉채요리이다. 어찌어찌 해서 주어진 한 시간 안에 두 가지 요리를 만들어 진행요원이 자바라를 치기 직전에 제출했다. 하마터면 못 낼 뻔했다. 진행요원이 비켜 주지 않았으면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내고 올 수 있었던 건 다행이다. 그러나 합격할 자신은 없다. 돼지고기 채는 두꺼웠고 춘장소스 간을 잘 맞추지도 못했다. 오징어는 어떻고. 몸통이 워낙 두툼해서 칼집을 깊게 넣었음에도 삶을 때 제대로 휘어지지 않았다. 숫돌을 사 칼을 갈고, 스물한 가지 조리법을 거듭 읽고, 깐풍기와 탕수육을 만들어 봤다고 해서 시험을 잘 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동생은 탕수육이 나오길 빌어 줬었다. 이번에 집에서 만든 탕수육을 아주 맛나게 먹었기 때문이다.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로 노릇하게 튀긴 고기와 너무 짜지도 달지도 않은 소스가 어우러진 요리는 내가 맛봐도 괜찮았다. 동생은 중국집의 자극적인 탕수육과 구별되는 ‘건강한 맛’이라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마치 ‘바르게 자란 청소년’ 같다나.
드라마 ‘파스타’에서 버럭쉐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매출이 떨어진 레스토랑을 살리고자 마련한 신메뉴 개발 콘테스트 때였다. 쉐프는 붕어요리사가 만든 피시볼 파스타를 맛보곤 이렇게 평했다. “맛은 있지만, 꼬시는 맛이 부족하다.” 그가 내 탕수육을 맛봤다면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나는 아마도 이렇게 받아쳤을 것이다. “꼬시는 맛이 뭔데요? 꼭 꼬셔야 하나요?”
지금도 궁금하다, ‘꼬시는 맛’이 뭔지. 설탕범벅 피클은 죄 갖다 버리라 했던 쉐프의 말이니 조미료로 감칠맛을 내란 이야기는 아니었겠지. “이래도 안 먹을래?” 혹은 “이보다 더 맛있는 거 먹어 봤어?” 하는 자신감을 가지고 요리했을 때 나오는 맛(?)이 아닐까 헤아려 본다. 막 프라이팬을 잡은 초보한테 무리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쉐프는 그 부분을 짚어 내며 개선하길 요구했다.
같은 조리법으로 요리해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완성품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꼬시는 맛이 꼭 필요하다면, 간을 싱겁게 보는 편인 내 요리에도 그 맛이 깃들게 될까. 숟갈, 정신줄 잡자. 이건 ‘간’과 상관없는 이야기야. 짬이나 싱거움과는 다른 문제라고. 또, 2인분 넘게 만들어 놓은 탕수육을 동생 혼자 먹어 버리지 않았어. 거기 꼬시는 맛의 불씨가 있는 것 아니겠니?
못 본 시험은 일단 잊으련다. 앞으로 더 즐겁게, 정성껏 요리할 생각을 해야겠다. 지금 꼬시는 맛 운운할 처지가 아닌 것이다. 미숙한 칼질을 향상시키는 일이 먼저니까. 요리로 업을 갖지 않게 되더라도, 그것이 제2의 취미에 머물게 되더라도 허투루 하진 않을 테다. 이 갈래에서 부족한 나와 나아지는 나를 함께 느끼고 싶다. 완성접시를 맛있게 비워 주는 사람들 앞에 고개 숙이며 꾸준히 요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