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과기능사반 수업을 신청하지 않았다. 듣고 싶긴 하지만 시간 맞추기가 어려울 듯했다. 요즘 여러 군데 이력서를 내고 시험을 본다. 쌓아 놓은 것도 얼마 없는 데다 여기 저기 옮겨 다닌 이력 때문에 쉽지 않다. 그래도 다시 일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대로 이루어질 거다. 아니, 이루어야 한다. 그러려면 요리수업을 듣고자 하는 소망은 잠시 접는 게 맞다.

쿠키든 케이크든 제과수업을 들어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책이나 블로그를 보고도 얼마든지 해 볼 수 있다. 친구 생일 때 계피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었었다. 아버지 생신을 맞아서는 녹차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기로 했다. 방산시장에서 사 온 둥근 케이크 틀과 스패츄라를 써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고구마 케이크를 먹고 싶다 하셨다. 이왕이면 원하시는 케이크를 만들려고 했으나 조리법을 찾아보니 꽤 까다로웠다. 케이크라곤 한 번밖에 해 보지 않은 내가 근사하게 만들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생각 끝에 녹차 가루와 밤조림을 넣어 시트를 만들고 생크림을 바른 뒤 딸기를 올리기로 했다.

   
  재료
시트:
박력분 115g, 버터 100g, 설탕 70g, 달걀노른자 2개, 녹차 가루 10g, 베이킹파우더 2g, 생크림 2큰술, 밤조림 적당량, 달걀흰자 3개, 설탕 30g
토핑: 생크림 500cc, 설탕 약간, 딸기 
 
   

제과가 제빵에 비해 쉬운 감은 있다. 반죽을 틀에 붓기만 하면 돼서 성형에 대한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자잘한 과정이 포함되므로 더 복잡할 수 있다. 이번처럼 케이크를 만들 때는 달걀흰자와 생크림까지 팔 떨어져라 저어 주어야 한다. 집에서 만들 땐 핸드믹서를 써도 되지만 제과수업이나 제과시험에선 오직 거품기만 사용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사람들이 웃으며 먹는 모습을 떠올리면 조금 힘든 것쯤 쉽게 넘길 수 있으니 걱정 말자. 

시트는 무난히 완성했다. 180도로 맞춘 오븐에서 30분 구우니 색도 향도 괜찮았다. 원래 녹차 케이크는 팥배기와 찰떡궁합인데 밤조림이 들어가도 그럭저럭 어울릴 것 같았다. 학원에서 밤식빵을 만들고 남은 통조림 밤이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집에서 만들어 써도 좋을 듯하다.

생크림을 지나치게 저었나 보다. 뒤집었을 때 쏟아지지 않으면 멈춰야 하는데, 내 힘을 믿지 못한 탓에 더 해야 한다고 휘젓다가 쪼글쪼글하게 만들어 버렸다. 바르는 솜씨도 시원찮은 마당에 크림마저 이렇게 되다니. 싱싱한 딸기가 울퉁불퉁한 시트를 살려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받침대가 따로 없어 나무도마를 이용했다. 그 위에 시트를 올려놓고 생크림을 발랐다. 예상대로 잘 발리지 않았다. 매끈하게 마무리하는 사람들은 대체 몇 번이나 발라 본 걸까? 만족스럽지 않았으나 짤주머니에 넣은 크림으로 자리를 만들어 딸기를 올리니 어설프나마 케이크 모양새가 갖춰졌다.

생신상은 집에다 차렸다. 평소 먹는 반찬에 어머니가 만드신 요리 몇 가지를 보탰다. 선물은 동생과 함께 준비한 용돈, 법정스님의 책 두 권, 그리고 내가 만든 녹차 생크림 케이크였다. 못 만들었다고 하며 내놓으니 동생은 보자마자 “왜 이렇게 잘 만들었어?”라고 탄성을 질렀다. 어머니는 수고한 과정을 생각해 족히 5만 원어치는 된다 하셨고, 맛을 보신 아버지는 “괜찮다, 자꾸 먹고 싶어지는 맛이네.” 하고 칭찬하셨다.

‘눈학교 딸기반’. 뒤늦게 지은 케이크 이름이다. 동생이 지어 줬다. 아이들에게 한글과 중국어를 가르치는 동생이라 이런 이름은 곧잘 만들어 낸다. 자기는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동생은 가르치는 일과 아주 잘 맞는다. 아이들을 아끼고, 교구 만드는 일도 즐겁게 하며, 목청도 좋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일을 얼마나 진지하게 하고 있는지 다 헤아릴 순 없다. 모쪼록 하얀 케이크에 빨간 딸기를 올리는 마음으로 정성껏, 즐겁게 해 나가길 바란다.

아버지께 내 취업 소식도 선물로 드리고 싶었다. 생크림을 매끈하게 바르는 일처럼 쉽지 않다 느끼고 있지만. 이력서를 내기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중요한 시기다.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요리를 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나를 가다듬으며 의연히 해야겠다.

집에서 만든 녹차 생크림 케이크는 제과점에서 파는 녀석처럼 달고 촉촉하진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 말씀처럼 자꾸 먹고 싶어지는 맛을 지녔다. 앞으로도 내 속에서 그 질리지 않는 맛, 그윽한 맛이 우러나오도록 힘쓰자. 손으로도, 마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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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긍정아침감사 2010-03-29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활기가 느껴져서 참 좋습니다^^ 글구 생신선물로 법정스님의 책을 선물받으신 아버님이 부러울따름입니다~~ 우리딸도 숟갈님처럼 마음이 대견스럽고 이쁘게 컸으면 하는 욕심이 생기네요^^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잘 되시길 빕니다!! 멋진 모습으로 책상에 앉아서 근무하시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주부인저로서는 참 좋고 설렙니다^^좋은 하루되십시요~~

숟가락 2010-03-29 12:4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리더긍정아침감사님.^^ 이 다정한 기운은 어쩐지 눈에 익은데 제 느낌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녹차 생크림 케이크 모양은 근사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아버지가 좋아해 주셨답니다. 앞으로도 중요한 날이면 케이크를 구워 보려고 해요. 리더긍정아침감사님, 즐거운 오후 보내셔요. 늘 건강하시구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