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1 - 박경리 대하소설, 3부 3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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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특별판 11권은 한마디로,

“죽음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시대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버티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이들의 비극만이 아니라, 그 죽음을 기억하고, 잊으려 하고,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 깊게 다가오는 권이다.


이 권의 초반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상현과 명희의 재회다.

예전에 비 오는 밤, 명희가 상현의 하숙을 찾아갔다가 쫓겨나던 일을 두 사람이 다시 꺼내면서 장면이 시작된다.

명희는 예전에 빗길에 상현의 하숙을 찾아갔다가, 그가 자신을 빗속으로 내쫓았던 일을 떠올리며 그때의 상현을 아무 설명도 없이 문밖으로 밀어낸 비겁한 사내였다고 말한다. 상현은 그 말을 듣자, 그날 밤 자신이 한 행동과 지금 둘 다 이미 다른 가정을 꾸린 처지를 함께 떠올리며,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면 옛 감정까지 다시 건드리게 되는 건 아닐까, 또 자신의 비겁함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건 아닐까 두려워져 “우리가 이런 얘기 해도 되겠습니까?”라며 불안해한다. 그는 명희가 그 일을 누구보다 부끄럽게 여겼을 거라고 짐작해 왔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정면으로 그날을 꺼내드는 명희의 태도가 더욱 당혹스럽다.

그런데 명희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자신도, 상현도 이제 장래가 이미 굳어 버렸고, 앞으로 큰 변동도 없을 거라며,

그래서 오히려 두려워할 게 없다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내 인생은 이미 틀이 잡혀 버렸으니, 그 안에서만 솔직해질 수 있다”는 씁쓸한 체념과,

그 체념 위에 세운 이상한 당당함이 함께 있다.

상현은 그런 명희를 보며, 자신은 세월 속에서 찌들어 버린 사람이고,

명희는 그 사이 눈에 띄게 자란 나무처럼 단단해졌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한때는 자신이 더 앞서 있다고 믿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뒤처진 사람, 초라한 사람으로 자기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감정은 환국과 마주 앉는 장면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상현은 길상을 꼭 빼닮은 환국을 바라보며, 예전 양반·하인의 위계가 완전히 뒤집힌 세월을 실감한다.

한때 하인이었던 사내의 아들이 이제는 어느 양반 자제보다도 당당하고 총명한 눈빛을 하고

아비를 절대적으로 믿고 숭배하는 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 시선을 느끼며 상현은, 길상과 명희 얼굴이 번갈아 떠오르는 동시에,

환국이 아버지를 보지 못하는 형편과, 하동에 남겨진 자기 아들들 형편이 미묘하게 겹치는 것을 느낀다.

그건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세월과 인생 전체에 대한 깊은 패배감에 가까웠다.

명희와 상현의 관계는 이별주를 나누는 장면에서 한 번 더 선을 넘는다.

임명빈은 둘을 앉혀놓고,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를 처지라면 이별주 한 잔쯤은 부어 줄 수 있지 않겠느냐며 술을 권한다. 그는 누이와 상현 사이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더라도 서로 사랑했었다는 기억만은 아름다울 것이라 믿는 문학청년 같은 감상에 빠져 있다.

그래서 상현이 명희에게 술을 건네며 “울지 마십시오. 견디지도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은 아주 잠시나마 애틋하게 보인다. 하지만 곧바로 상현과 명희, 그리고 임명빈까지 모두 간음자이거나 간음을 방조한 죄인이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이 관계는 이미 각자의 자리와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현실의 경계 밖에서만 살짝 허락된 감정에 취해 보는 것일 뿐이다.


『토지』는 인물의 감정을 충분히 보여 주면서도, 그 감정이 어떻게 현실과 부딪히는지를 끝까지 함께 보여준다.

이 권에서 “죽음”이라는 키워드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복동네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혼자 사는 과부 복동네는 소문과 말 한마디에 휘말려, 마을에서 미묘한 시선과 수군거림의 대상이 된다.

봉기 노인이 자기 딸을 감싸고 오래 묵은 앙금을 풀겠다고 입을 잘못 놀린 것이,

복동네를 향한 모욕과 의심의 말로 바뀌어 퍼져 나간다.

늙은 과부가 요망하다는 식의 구체적인 증거도, 뚜렷한 죄도 없는 말들이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며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다.

야무네가 과부 설움보다 더한 게 없다고 눈물을 훔치며 말하는 대목은,

복동네의 죽음이 단지 한 사람의 자살이 아니라 이 시대에 혼자 남은 여자가 홀로 견뎌야 하는 구조적 폭력이라는 걸 절실하게 보여준다. 머리 한 번 손질해도, 옷 한 벌 갈아입어도, 남자와 마주쳐도 모두 눈치를 봐야 하고, 조금만 티가 나면 “남자를 밝힌다”, “신들렸다” 같은 말이 쉽게 붙는 삶이다.

그 지독한 감시와 수군거림 속에서 결국 복동네는 양잿물을 마시고 죽음을 선택한다.

뒤늦게서야 사람들은 말이 사람을 죽였다고 깨닫는다.

석이는 봉기를 찾아가, 복동네의 죽음이 그의 혀끝에서 비롯되었음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복동네 어머니의 죽음과 두리누님에 대한 소문을 함께 꺼내며,

두리의 명예를 지키고 싶다면 마을 사람들 앞에서 사실을 고백하라고 요구한다.

봉기가 끝까지 버티자 석이는 강가까지 데리고 가 등을 내리치며 짐승만도 못한 늙은 것이라며 쏟아낸다.

이 장면은 통쾌하면서도 섬뜩하다.

이미 한 사람은 죽었고, 그 죽음은 돌이킬 수 없다.

복동네의 죽음은 그래서 더 잔인하다.

죽음으로도 자기 편을 얻지 못하고, 죽은 뒤에야 겨우 몇 마디 반성 섞인 말이 오갈 뿐이었다.


죽음의 그림자는 다른 인물들에게도 계속 겹쳐진다.

용이는 문득,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배신자, 나쁜 놈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윤보를 비롯해, 부모와 누이, 강청댁, 월선, 임이네, 최치수, 윤씨부인, 별당아씨, 수많은 노비와 마을 사람들,

이름을 다 세기도 힘든 이들 얼굴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그의 눈앞에서 죽음은 마치 가을 들판에 베어 누인 볏단처럼 여기저기 무더기로 널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떠올릴 때, 용이가 느끼는 건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왜 나만 살아남았을까” 하는 고독과 죄책감이다.

이 장면은 11권 전체의 정서를 압축한다.

죽음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고, 살아남은 사람은 그 죽음들 사이에서 홀로 버티고 서 있는 존재라는 감각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관수, 석이, 용이가 술자리를 함께하며 시대와 계급, 형평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관수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난한 집 자식이라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그 말 속에는 아직 남아 있는 오래된 농민식 도덕과 양심이 있다.

석이는 옛날 종이었다가 지금 잘 산다고, 과거를 잊고 주인 행세를 하며 거들먹거리는 사람을 비꼬며,

가난을 벗어나도 품격을 잃으면 결국 천해지는 것뿐이라고 냉소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묻는다.

예전처럼 서로 도우며 살던 인심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 사람들은 장사꾼처럼 계산만 남은 것은 아닌지.

예전 촌락의 상부상조는 사라지고, 각자도생의 시대가 되었음을 실감하는 대목이다.

관수는 또 형평사운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단지 백정과 농민의 싸움, 백정 신분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내부의 계급과 차별, 그리고 일제 강점기 속에서 조직된 힘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운동이다. 형평사 조직이 전국으로 퍼질 수 있었던 것도 일본과의 정면 충돌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엔 조선인끼리의 문제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겉으론 차분하게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는 백정 집안과 얽힌 자기 처지, 차별을 향한 분노와 자부심이 섞여 있다.

이 술자리에서 석이는 형평운동, 계급 문제와 함께 기화를 떠올린다.

옥색 치마와 분홍 저고리의 기화는 석이에게 단순한 동생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사랑, 말로 꺼내는 순간 모든 걸 잃게 될지도 모를 청춘 그 자체였다. 그는 기화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감정을 떨쳐내지 못한다.

11권의 인물들은 이렇게 사적인 사랑과 시대적 고민이 한 사람 안에서 충돌하고 겹쳐진다.


이야기의 다른 흐름에서는 계명회 사건이 벌어진다. 서의돈, 성삼, 선우일·수신, 유인성·유인실 남매, 일본인 오가타, 그리고 길상까지 줄줄이 검거된다. 계명회는 사회과학연구를 내세운 비밀결사에 가까운 모임으로, 노동공제회나 청년회, 공산청년회 같은 여러 좌경 조직이 생겨나던 흐름 속에서 나온 집단이다. 황태수는 그들의 사상에 완전히 동의해서가 아니라, 반일운동에 조금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마음으로 운영비를 대주었다.

길상에게 계명회는 국내로 돌아오기 위한 디딤돌 같은 존재였고, 그 조직의 선은 형평운동, 부산의 관수, 그리고 다시 평사리로까지 이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김환의 자살 이후 느슨해진 운동의 흐름이 다른 경로로 이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일들을 지켜보는 임명빈의 마음은 점점 짓눌린다. 서참봉댁에서 나오는 길에 그는 보이지 않는 힘이 머리를 땅 속으로 밀어 넣는 것 같은 절망을 느낀다. 자기 땅, 자기 나라에서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눈치만 봐야 하는 처지, 은행에 다니는 영돈이 상사의 눈치를 보며 형무소로 뛰어가는 초라한 모습이 그 절망을 더 키운다. 헐벗고 굶주리는 것보다, 언제 어디서 찍힐지 몰라 마음을 늘 조이고 살아야 하는 이 정신적 압박이 더 무서운 병 같다는 그의 생각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일상을 고스란히 전한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감옥에 갇혀 있거나, 목적을 향해 뛰는 사람들의 편이 더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고 느낀다. 가만히 썩어가는 고인 물 같은 삶에서 미쳐 가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하다가 부딪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쓸쓸한 자각이다.


한편 홍이는 일본에서 보낸 시간들을 떠올리며 일본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드러낸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겪은 수모, 왜헌병에게 당한 고문과 모욕, 일본 여자들의 정욕과 기모노 아래 맨살의 풍습까지 모든 것이 역겨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숙집 여자들이 밤마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경험을 하면서도, 그는 겉으로 화를 내지 못하고 그저 웃는 시늉만 해야 했다. “잘난 말 몇 마디 하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살아남으려면 바보 시늉, 미친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을 하며, 감정에 휩쓸려 힘을 허비하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정리한다. 여기서 보이는 건, 정면으로 맞붙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몸을 낮추고 비켜 서면서도, 속으로는 끝까지 잊지 않고 있는 저항의 감각이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겹쳐지며, 11권은 분명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단순히 누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나열하는 책은 아니다. 환이, 복동네, 기화, 이미 떠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결국 그들이 어떤 말을 듣고,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사랑과 모멸 속에서 버티다 무너졌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다. 그리고 그 죽음들 사이에 남겨진 사람들—상현, 명희, 석이, 관수, 용이, 임명빈, 홍이, 서희—의 마음이 11권을 진짜로 무겁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구 하나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먹먹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서로를 붙잡으려 했던 손길, 말로라도 누명을 벗겨주려 했던 마음, 가난한 아이를 차별하지 말라는 당부, 그래도 어떻게든 조직해 보려는 몸부림 같은 작은 움직임들이 희미하게 남는다.

이 책은 죽음의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그 와중에도 완전히 꺼지지 않는 인간다움의 불씨를 보여 주는 이야기라고 느꼈다.


#채손독 을 통해 #도서협찬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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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능 우울증 -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고장 나 버린 사람들
주디스 조셉 지음, 문선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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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고기능 우울증』은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유능하게 살아가지만,

속으로는 점점 기쁨과 활력을 잃어 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난 우울증까진 아닌데, 이상하게 늘 공허하고 피곤하다”라고 느끼는 이들에게,

지금의 상태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 주고,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그 보이지 않는 위험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저널리스트이자 2019년 미스 USA에서 30년 만에 탄생한 흑인 우승자,

<체슬리 크리스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MBA와 법학 학위를 가진 지성인, 오프라 윈프리와 인터뷰할 정도로 인정받던 방송 기자,

사회적 성공의 상징처럼 보였던 그녀는, 미인대회 우승 이후 소셜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악성 댓글과 “죽어 버리라”는 말들에 끊임없이 상처받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가면 증후군에 시달리며 자신의 성취를 믿지 못했고,

카메라 앞에서는 모든 흑인 여성을 대표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늘 따라붙었다.

사적인 관계에서도 불안정한 연애에 흔들리며,

마음속에서는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라는 자책이 끊이지 않았다.

크리스트는 고기능 우울증 진단을 공개적으로 받은 첫 공인이었지만,

인생의 굴곡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2022년 1월 30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 비극적인 사례는 고기능 우울증이 단순한 기분 저하가 아니라,

충분히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갈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위험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일깨운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저자는 스스로 쌓아 올린 압박감이

어느 순간 자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한다.

팬데믹 초창기, 뉴욕이 멈춰 섰던 그 시기에 저자는 오히려 커리어의 정점에 있었다.

닫지 않은 진료실, 쏟아지는 방송 출연, 늘어나는 환자들, 명문대의 초청까지.

하지만 매일 환자와 가족, 직원들을 책임져야 하는 상사이자 의사, 엄마, 아내로 살다 보니,

정작 나라는 사람은 서서히 텅 비어 가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의료진에게 새로운 일상에 대처하는 법을 강연하기 위해 자료를 준비하던 밤이었다.

남들에게는 대처법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저자는 조용히 중얼거린다. “나, 우울한 것 같은데….”

아침에 잘 일어나고, 일을 성실히 해 내고,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과 공허함이 끊이지 않는 상태를 경험했다.

이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연구하기 시작한 증상이 “고기능 우울증”이다.

고기능 우울증은 일상 기능은 잘 유지되지만, 내면에서 기쁨과 활력이 사라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늘 바쁘게 움직이지만,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멈추면 공허함이 덮쳐 올 것 같아 일부러 더 자신을 몰아붙인다. 다들 이 정도는 견디고 사는 거지라고 넘기며, 자신의 고통에는 연민을 허락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런 상태의 뿌리에 트라우마, 무쾌감증, 마조히즘이 얽혀 있다고 설명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마조히즘, 특히 피학적 관계에 대한 대목이다.

마조히즘은 단지 성적 의미가 아니라,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해치는 행동 패턴을 뜻한다. 고기능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대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그 대가로 사랑과 인정,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얻으려 한다.

그리고 책에 나오는 예시는 놀라울 만큼 현실적이다.

밤새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네 시간밖에 못 자고도 친구의 끝없는 하소연을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 충분히 이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도 부당한 상사 밑에서 “그래도 여기까지 와 준 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달래는 사람, 가족 앞에서는 자신을 깎아내리면서도 뒤에서는 돈을 빌려 달라는 친척에게 아무 말 없이 또다시 지갑을 여는 사람, 준비되지 않은 동거 요구를 받아들이고 결국 자신의 월급 대부분을 상대를 부양하는 데 쓰는 사람까지.

이 장면들에는 언제나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한쪽은 계속 주고, 다른 쪽은 계속 받기만 한다. 마조히즘적 자기희생은 상대를 자연스럽게 ‘받는 사람’의 자리에 고착시키고, 관계의 균형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저자는 이렇게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피학적 관계에서 쌓이는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이 흡연만큼이나 해롭다고 경고하며, 지금 이 불균형을 자각하는 순간이야말로 자신을 회복시킬 첫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이 문제를 깨닫게 하기 위해 저자가 제안하는 간단한 방법이 인상적이다.

종이를 한 장 꺼내 가장 중요한 사람 한 명의 이름을 적고, 왼쪽에는 내가 그 관계를 위해 지난 한 주 동안 한 일, 오른쪽에는 그 사람이 나를 위해 한 일을 적어 보는 것. 그리고 그 종이를 시소처럼 바라보며 어느 쪽이 더 무겁게 내려가 있는지 확인해 보는 작업이다. 이 과정을 가장 가까운 세 사람에게 반복하면, 내가 어떤 패턴의 관계를 맺어 왔는지가 서서히 드러난다.

책 속에서 또 하나 눈에 남는 개념은 ‘공정한 세상 가설’이다.

우리는 착하게 살면 좋은 일이 생긴다, 나쁜 사람에겐 언젠가 벌이 돌아간다는 믿음에 기대 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선한 사람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나고, 정직한 사람이 부당하게 해고되기도 한다.

하지만 고기능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유독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이건 내 잘못이야”라는 해석만을 고집한다. 죄책감과 수치심을 내면화한 채 스스로를 벌주듯 살아가며, 자신이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 트라우마와 무쾌감증, 마조히즘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자신을 돌보는 작은 실천들을 쌓아 가는 ‘5V 원칙’ 같은 회복의 도구들을 제시한다. 팬데믹과 이혼이라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한 끝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고백은, 개인의 고통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언어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그 두 사건이 없었다면 이 책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독자로서는 그 시간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다.

현대 사회에서 고기능 우울증을 전혀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시대 같다.

늘 바쁘고, 책임감 강하고, 이 정도면 괜찮지라며 자신을 설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특히 필요한 것 같다. 『고기능 우울증』은 지금까지 “그냥 내 성격이 문제인 것 같아”라며 넘겨버린 감정과 패턴들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 주고, 이제는 그 무게에서 조금씩 벗어나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밝혀 주는 책이다.

'이키다 @ekida_library'님을 통해

'포레스트북스 출판사' 도서와 소정의 제작비를 지원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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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학적masochistic 관계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겨우 네 시간도 채 잠을 못 잤음에도 피로를 버텨내며 친구가 끝도 없이 늘어놓는 시어머니 험담이나 최근에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있다거나, 충분히 이직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비합리적이고 모욕적인 상사 밑에서 일하고 참아내며 맺어가는 관계도 있다. 가족들 앞에서는 무자비하게 자신을 깎아내리면서 뒤에서는 돈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는 친척에게 돈을 빌려주면 그들에게 조용히 미소를 지어주기까지 한다. 아직 진지한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대뜸 동거하자고 하는 연인 관계에 있는 사람과 헤어지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힘들게 일하며 번 월급으로 상대를 부양하게 되는 관계도 그에 해당한다. 이렇게 타인을 기쁘게 하고 도와주는 것에 자존감이 매여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자신은 어떠한가? 결국 피학적 관계는 건강에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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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한 역사 - 과거의 세계가 미래를 구할 수 있을까?
로먼 크르즈나릭 지음, 조민호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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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산불·폭염 같은 이상 기후 뉴스가 매년 반복되고, 전쟁과 난민, 부의 양극화, 혐오와 가짜뉴스, 인공지능 규제 논쟁까지 이어지는 세상이다. 요즘 뉴스를 보고 있으면 자꾸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세계, 앞으로 50년·100년 뒤에는 어떻게 돼 있을까?”

그런데 이렇게 큰 문제들을 이야기하면서도, 우리가 실제로 쓰는 시간의 범위는 너무 짧다.

선거는 4~5년, 기업은 분기 실적, 우리 일상은 오늘·이번 달·올해 계획 정도에 머문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 즉 미래 세대는 말로만 언급될 뿐, 실제 정책이나 결정의 기준 안에 거의 들어오지 못한다. 그래서 로먼 크르즈나릭의 『내일을 위한 역사』는 지금 이 시점에 꼭 한 번 읽어 볼 만한 책이다. 이 책은 “과거를 잘 아는 사람이 미래를 더 잘 준비할 수 있다”는 생각 아래, 역사를 통해 지금의 위기를 다른 눈으로 보고, 내일을 위한 선택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책이 다루는 내용은 매우 넓다. 노예제 폐지 운동, 중세 이슬람 왕국의 공존 실험, 에도 시대 일본의 자원 순환, 시민들이 만들어 낸 정치 제도, 소셜미디어와 여론의 흐름까지, 지난 1,000년 동안의 다양한 사례를 오늘의 문제들과 나란히 놓는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과거에서 무엇을 배워, 폭주하는 현재의 속도를 바꿀 수 있을까?”

저자는 먼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당장 눈앞의 일만 중요하게 여기고, 미래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 사회라고 말한다. 정치인은 오늘 헤드라인과 여론조사에 매달리고, 소셜미디어는 우리의 시선을 지금 이 순간에만 가둔다. 기술 낙관론자들은 탄소 포집·합성생물학·AI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 와중에 역사는 시험 과목이나 교양 정도로 밀려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수많은 사람이 역사 다큐·팟캐스트·전기를 즐겨 보고, 여행 가면 유적지를 찾고, 조상 찾기 서비스까지 이용한다.

저자는 묻는다. “그 관심과 에너지를, 앞으로 수십 년·수백 년을 준비하는 데 쓸 수 있다면 어떨까?”

여기서 끌어오는 개념이 ‘응용역사’다. 투키디데스, 이븐 할둔, 홉스가 강조해 온 것처럼, 과거를 연구하는 일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는 방법을 넓히는 공부라는 주장이다. 역사는 과거의 위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심각해졌는지 알려주고, 한때 존재했지만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 여러 사회의 방식들(공유지, 협동조합, 직접 민주주의 등)을 다시 살펴보게 해준다. 오늘의 불평등과 권력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드러내며,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 힌트를 준다. 괴테가 “3,000년의 세월을 활용할 줄 모르면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며 살 뿐”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뜻에 가깝다.

이 응용역사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케네디와 쿠바 미사일 위기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핵전쟁 직전이던 1962년, 케네디는 바버라 터크먼의 『8월의 포성』을 읽으며 1차 세계대전이 조금씩 잘못된 판단이 쌓여 폭발한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그래서 강경파의 압박 속에서도 즉각적인 군사 공격 대신 외교적 해법을 선택한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역사가 옛날 얘기가 아니라 지금 내리는 결정의 결과를 더 멀리 보게 만드는 참고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영국 노예제 유지 로비 조직 ‘웨스트 인디아 인터레스트’와 오늘날 화석연료 기업 셸의 논리를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 노예제 옹호론자들은 도덕적으로 완벽하진 않지만, 갑자기 없애면 경제가 무너지고 모두가 피해를 본다. 교육이 부족한 노예들에게는 아직 이르다며 수십 년에 걸친 점진적 변화만을 주장한다. 200년 뒤 셸 CEO는 화석연료에서 언젠가는 벗어나겠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생산을 빠르게 줄이면 회사가 흔들리고 에너지 수요도 너무 많다며 2050년까지의 느린 전환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두 사례를 겹쳐 보며, 기득권이 변화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쓰는 논리가 시대를 넘어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보여 준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변화를 실제로 밀어붙인 힘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점이다. 저자는 자메이카 노예 봉기와 영국 농촌의 ‘캡틴 스윙’ 반란을 통해, 온건한 개혁 세력과 급진적 저항 세력이 동시에 존재할 때 정치의 흐름이 크게 바뀐다는 점을 짚는다. 점진주의만으로는 기후위기처럼 시간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폭력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 이 긴장 속에서 이른바 급진적 측면 효과가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중세 이슬람 왕국 알안달루스를 다루며, 무슬림·유대인·기독교인이 한 도시에서 함께 살며 지식과 예술을 주고받던 모습을 보여 준다. 알안달루스가 완벽한 이상향은 아니었지만, 법과 관습, 도시 설계, 언어와 교육 정책 속에 함께 살기 위한 장치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혐오와 차별이 일상처럼 된 오늘의 현실을 떠올리면, 서로 다른 집단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또 다른 부분에서는 소비주의를 다룬다. 산업화 이전 일본, 특히 에도 시대의 생활 방식을 ‘에도노믹스’라는 이름으로 분석하면서, 제한된 자원을 반복해서 써야 했던 사회의 수리·재사용·대물림 문화를 보여 준다. 끝없이 새것을 사들이고 버리는 지금의 소비 문화와 대비시키며, 단순히 검소하게 살자가 아니라 경제 구조 자체를 재생과 순환 중심으로 설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책의 중/후반부에서는 물·공유지·민주주의·정보 독점·AI·문명 붕괴 같은 주제를 이어 간다. 발렌시아의 전통적인 물 관리 제도와 여러 지역의 공유지 운영 방식을 통해 공동의 자원을 경쟁과 약탈이 아니라 협력과 규칙으로 관리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고, 인도 지방자치와 시민의회, 스위스 사례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다시 살아 있는 참여의 장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한다.

거대 플랫폼이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독점하는 오늘의 상황은, 과거 토지·자본 독점의 역사와 겹쳐 보며 AI 시대의 권력 집중이 어떤 위험을 낳을지를 경고한다. 문명의 붕괴를 다룬 부분에서는 과거 여러 번의 붕괴와 재건의 역사를 되짚으며, 종말을 상상하는 능력 자체가 붕괴를 막는 데 필요한 힘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내용을 관통하는 핵심은 단순하다. 지금의 길이 원래 정해진 운명은 아니며, 인류는 언제나 위기 속에서 다른 선택을 해 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 사례들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오늘 다른 방향으로 꺾을 용기를 가질 수 있다는 메시지다. 그래서 『내일을 위한 역사』는 중·고등학생에게도 좋은 책이다. 역사가 더 이상 외워야 할 연도와 인물이 아니라, 기후위기·SNS·AI·민주주의 같은 막막한 문제들을 이해하고 내일의 세계를 어떻게 바꿔 갈지 생각하게 해 주는 도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인용되는 마오리족의 말은 이 책 전체를 요약하는 문장처럼 남는다.

“과거에 눈을 둔 채 미래를 향해 거꾸로 걸어라.”

과거에만 머무르라는 뜻이 아니라, 뒤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내일을 위한 역사』는 바로 그 눈을 길러 주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오늘 당장의 편리함과 이익만 바라보던 좁은 시야가 조금 더 멀리 뻗어나가고, 나만이 아니라 앞으로 세상에 태어날 사람들까지 함께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미래를 바꾸는 힘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는 첨단 기술이 아니라, 과거를 깊이 이해하고 지금 여기에서 다른 선택을 하려는 우리의 의지와 연대에 있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느끼게 된다.

'더퀘스트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그런데 그 모든 것에는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역사는 손쉽게 남용되고 악용될 수 있기에 과거에서 본보기를 구하는 일은 잠재적으로 위험한 과제다. 이오시프 스탈린Iosif Stalin과 마오쩌둥을 비롯한 수많은 독재자는 역사책에서 자신들의 잔혹 행사를 지우는 데 능숙했다. 1990년대 발칸전쟁 때 세르비아 지도자들은 과거를 조작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가 고대 세르비아 제국의 일부였으므로 당연히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했고, 이에 크로아티아도 비슷한 신화를 만들어냈다. 지금도 포퓰리즘에 추한 정치인들은 이민자들을 문 앞에 묶어두려고 국가적 순수성을 운운하며 가공의 역사를 퍼뜨린다. 이처럼 정치권력을 대중의 없던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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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한옥에서 브랜딩을 찾다
박현구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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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한옥에서 브랜딩을 찾다』 책 내용을 짧게 표현하자면,

북촌의 한옥 호텔을 어떻게 브랜딩했는가를 넘어,

브랜드를 고르고 키우고 확장하는 사고 시스템 전체를 보여 주는 책이다.

이 책은 먼저 우리는 하루에 평균 150번의 선택을 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 16시간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6분 24초마다 뭔가를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침에 어떤 옷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퇴근 후 운동을 할지 쇼츠를 볼지 등…

이렇게 선택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끝나 있고,

인생은 정말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저자는 브랜딩도 결국 수많은 선택의 누적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자신의 쓸모를 찾지 못하면 불안이 병이 되기 쉽지만,

성실하게 움직이고 사람들이 무엇에 열광하는지 촉을 세우고 있다면,

그 쓸모를 발견할 가능성은 훨씬 커진다고 덧붙인다.

이때 브랜딩은 나만이 가진 것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세상엔 좋은 아이디어와 멋진 콘셉트를 가진 브랜드가 넘쳐 나지만, 오래 기억되는 브랜드는 상대적 희소성이 아니라 오직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적 희소성을 가진 곳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희소한데 내용까지 건전하면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동시에 붙잡고, 여기에 진정성이 더해지면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브랜드가 된다. 북촌이라는 장소 자체가 이미 그런 희소한 원천이라는 지점에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공간으로 이어진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북촌은 조선 건국 이후 600여 년 동안 지식인들의 중심지였다.

과거에 급제한 신진 사대부가 살던 곳이었고, 북학파·개화파 같은 진보적 지식인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저자는 이 시간을 “지역이 가진 사라지지 않는 인장”이라고 부르며, 어원적으로 브랜드가 자기만의 안장을 만드는 일이라면, 북촌은 이미 뛰어난 브랜드였다고 말한다. 다만 그 브랜드로서의 가치가 아직 제대로 발굴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 잠재력을 실제 브랜드로 옮기는 과정이 1장 ‘싱킹’에 나오는 여섯 개의 키워드, 형식–지관–원천–감수–역전–전진이다. 형식은 브랜드를 하나의 인격으로 보는 단계다. 이름, 로고, 서비스, 조직 문화까지 모두 합쳐 이 브랜드는 어떤 사람처럼 느껴져야 하는가를 정하는 것, 사랑받는지 외면받는지는 결국 이 사고 시스템에서 갈린다고 말한다. 지관(止觀)은 멈추어 보는 태도다. 저자는 넓게 보기·높게 보기·깊게 보기라는 세 축으로 지관을 풀어낸다. 시장과 경쟁사, 라이프스타일과 데이터를 가로지르는 넓은 시야, 지금 내가 서 있는 관점이 적절한지 되묻는 높은 시야, “왜, 무엇을 위해, 어떤 의미인가”를 끝까지 묻는 깊은 시야. 북촌 한옥마을이 주거·관광·상업이 뒤섞인 공간으로 바뀌는 가운데, 무계획적 개발이 아니라 젠트리피케이션과 오버투어리즘을 피할 수 있는 체계적 기획이 필요하다는 판단도 이 지관에서 나왔다. 원천은 한 번의 히트 아이템이 아니라 오래 퍼 올릴 수 있는 금맥을 찾는 단계이고, 감수는 장기적인 브랜드 가치를 위해 단기적 편리와 수익을 감내하는 결단이다. 역전은 한옥의 불편함 같은 약점을 프라이버시와 고유성이라는 강점으로 바꾸는 관점이고, 전진은 이 모든 것을 고객이 먼저 찾아오는 구조로 연결하는 마지막 단계다.

이 사고 구조 위에서 저자는 노스텔지어의 브랜드 에센스를 “600년 북촌의 역사성과 현대적 호스피탈리티가 만나는 유일무이한 공간”으로 정의하고, Curated–Conscious–Crafted라는 세 단어로 압축한다. 공간 하나하나에 의미와 이야기를 담아 큐레이션된 호스피탈리티(Curated), 북촌의 진보적 전통과 창조적 에너지를 이어받는 의식 있는 공간(Conscious), 한국 아티스트와 협업해 한국 미학의 깊이와 섬세함을 보여 주는 공예적 완성도(Crafted). 이 3C가 이후 모든 확장과 의사결정의 기준이 된다.

2장 ‘빌딩’은 이 에센스가 실제 한옥에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 준다. 청기와를 두른 블루재는 그중 특히 상징적인 공간이다. 청와대 기와 장인이 만든 푸른 기와 아래, 저자는 “무엇을 고치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끝없이 질문한다. 한옥의 오래됨과 불편함을 완전히 지워버리기보다, 그 질감과 결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현대적 편의와 동선을 섬세하게 더해 “시간이 머무는 방”이라는 경험을 설계한다. 이 집을 비롯한 여러 한옥이 호텔이 아니라 문화 플랫폼이자 세계관의 무대로 설계되었다는 점이, 많은 온라인 리뷰에서 특히 인상적인 대목으로 언급된다.


3장 ‘디깅’은 이 세계관을 북촌 바깥으로 어떻게 파고들어 확장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출발점은 의외로 단순하다. 실제 노스텔지어 고객들이 “이 공간의 감각을 집으로 가져가고 싶다”고 요청하면서, 북촌막걸리와 북촌소주가 탄생한다. 북촌막걸리는 외국인 VVIP와 호텔 게스트를 위한 만찬주이자 웰컴 드링크로 기획되었고, 500년 발효 비법 전통주를 현대적 미학과 지속 가능한 패키지 디자인으로 재탄생시켜, 기존 막걸리와는 다른 품격의 아이콘으로 포지셔닝한다. 북촌소주는 북촌막걸리의 인기에 힘입어, 같은 세계관 안에서 파생된 로컬 소주 브랜드로 이어진다.

이 술들은 많이 팔기 위한 상품이기 이전에, 북촌이라는 장소와 노스텔지어의 에센스를 한 병에 응축한 “마실 수 있는 브랜드 경험”에 가깝다.


기념품숍 카트카트(K-Art Cart)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북촌 한옥마을에 외국인 관광객이 마음 놓고 살 만한 품격 있는 기념품이 거의 없다는 현실이 안타까워, “한국 아티스트의 작품을 일상 제품으로 만드는 라이프 크래프트 브랜드”를 만들자는 결심에서 탄생한 곳이다. 작가의 원화를 그대로 인쇄한 굿즈가 아니라, 작가의 세계를 생활 속 물건으로 번역해내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스스로 그림을 좋아하고 수집하는 마니아라고 말하며, 객실에서 전시를 열 때 작가를 고르는 기준 네 가지를 이야기해 준다. 해당 기준을 바탕으로 열린 전시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국 고가구전이고, 이런 시도가 쌓이면서 노스텔지어에 묵으러 갔다가 전시를 보고, 작가의 굿즈를 사서 나오는 경험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디깅의 시선은 도시 전체로 확장된다. 저자는 가회동을 두고 “포르투처럼 될 수 있을까?”를 자문하며, 도시 브랜딩과 로컬 브랜딩의 차이를 짚는다. 로컬 브랜딩이 특정 장소나 가게, 제품에 초점을 맞춰 깊이를 만드는 일이라면, 도시 브랜딩은 개별 로컬들이 서로 이어지고, 도시의 역사·문화·일상이 하나의 서사로 흐를 수 있도록 전체 구조와 방향을 설계하는 작업에 가깝다. 북촌1777 같은 도시 캠페인이 바로 그런 시도의 대표적 예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브랜드가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려면 어디까지 생각하고, 어디까지 파고들어야 하는가에 대해 한 편의 긴 이야기를 들은 듯한 느낌이 든다. 저자가 말하는 지관–형식–원천–감수–역전–전진으로 이어지는 여섯 단계는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멈춰 보고(止觀), 넓고 높고 깊게 바라본 뒤, 나만의 원천을 찾고, 감수할 것을 감수하며, 약점을 뒤집어 레버리지로 만들고, 끝내는 ‘그냥 잘 팔리는 브랜드’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 사랑하게 되는 브랜드’로 전진시키는 일이다. 『도심 한옥에서 브랜딩을 찾다』는 북촌이라는 오래된 무대를 빌려 그 여정을 아주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흑상어쌤 서평단'을 통해,

'디자인하우스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브랜딩 과정 3단계
1단계 : 정체성 확립
‘우리는 누구인가?’를 명확히 하는 과정입니다.
이 단계에서 기업의 핵심 가치, 존재 이유, 추구하는 바가 구체화됩니다.
2단계 : 외적 표현 개발
내적 정체성을 시각적, 언어적으로 구현하며
디자인, 네임, 메시지, 톤 앤드 매너 등을 일관성 있게 연결합니다.
3단계 : 관계 구축과 유지의 단계
고객과의 모든 만남에서 브랜드 약속을 실천하며
신뢰와 애정과 존경의 감정을 쌓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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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
신현철 지음 / 소명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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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한 번 실패했다고 “인생이 끝났다”는 말이 나오는 나라,

한 재벌 기업 임원이 수백억 원대 퇴직금을 받았다는 뉴스가 뜨면 월급 통장을 보며 허탈해지는 나라,

특목고–스카이–대기업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에 모두가 몰려 서로를 팔꿈치로 밀어내야만 할 것 같은 이 나라가 답답하게 느껴진다면,

ㅡ 이 책이 꽤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 같다.

『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은 이런 현실을 “그냥 요즘 세상이 원래 그렇지!”라며 넘기지 않는다.

개화기 때 만들어진 일본식 번역어부터, 사회진화론이 들어오며 <경쟁, 생존경쟁, 적자생존> 같은 말이 어떻게 왜곡되어 퍼졌는지, 또 그 말들이 어떻게 한국 사회의 무한경쟁·승자독식 분위기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는지 차근차근 짚어 나간다. 우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믿어 온 ‘경쟁’과 ‘진화’의 언어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게 만들고, “정말 다윈이 이런 세상을 원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적자생존”, “무한 경쟁”, “진화론적으로 그렇다” 같은 말을 너무 흔하게 쓴다. 이런 말들 뒤에는 늘 다윈의 이름이 따라붙고, 우리는 그 표현들을 깊이 따져보지도 않은 채 “과학이 증명한 진실이겠지”라고 믿어 왔다. 그런데 『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을 읽고 나면, 그 믿음의 바닥에 번역의 역사, 애매한 이해, 그리고 일본을 거치며 생긴 왜곡이 겹겹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은 그 불편함을 피하지 말고,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쓰는 단어와 개념을 처음부터 다시 따라가 보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먼저 개화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우리가 쓰는 서양 사상 관련 한자어들, 이를테면 “자유, 경쟁, 진화” 같은 말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를 일제강점기를 거쳐 그대로 들여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때 우리에겐 서양 사상을 자기 말로 소화할 여유도, 학문적 기반도 없었고,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들은 모양만 보면 익숙한 글자라 거부감도 덜했기 때문에 그냥 가져와 쓸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단어들이 이미 “일본식으로 해석된 서양 사상”을 담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유’만 해도, 조선의 전통적 감각에서는 “윗사람 간섭 없이 내 마음대로 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일본 개화기에는 생명·신체·재산·사상·종교·결사에 대한 권리, 즉 근대 시민권의 언어로 바뀌어 있었다. 표기는 같지만, 단어 하나에 담긴 세계가 완전히 달라진 셈이다.

이런 번역어들은 서양 사상의 깊이까지 충분히 품지 못한 채, 다소 피상적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다. 일본 내부에서도 서양 개념을 자기 언어로 깊게 녹여낼 토대가 부족했고, 그 결과 껍데기만 남은 번역어들이 양산되었다. 한국은 그런 단어들을 다시 가져와 사용하면서, “원래부터 우리 말이었던 것처럼” 쓰게 된다. 저자는 다윈의 “natural selection”이 “자연선택” 혹은 “자연도태”로 옮겨지는 과정도 이 흐름 안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선택’이라는 말은 흔히 “자연이 직접 골라 준다”는 뜻처럼 들리지만, 다윈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건 환경이 변하는 동안 그 환경에 잘 맞는 특징들이 조금씩 쌓여 가는 과정에 가깝다. 사람들은 이 말을 자꾸 “자연이 사람처럼 생각하고, 누가 더 나은지 따져서 뽑는 것”처럼 이해한다. 마치 자연이 심사위원이 되어 머리를 쓰며 합격·불합격을 정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다윈이 그린 모습은 전혀 다르다. 책에서 인용된 설명을 빌리면, 자연선택은 “도움이 되는 변이는 보존되고, 해로운 변이는 사라지는 것”이다. 눈 덮인 곳의 흰 새, 히더가 널린 들판의 자주빛 새, 나무껍질과 비슷한 색의 곤충은 환경 덕분에 더 잘 숨을 수 있고, 그만큼 살아남을 확률도 높다. “자연이 흰 새를 골랐다”고 말하고 싶어지지만, 실제로는 환경에 어울리는 특징이 살아남아 다음 세대로 이어진 결과일 뿐이다. 저자는 이런 예를 길게 풀어 설명하며, 자연선택의 ‘자연’은 의지를 가진 주체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어 가는 상태”, ‘선택’은 의식적인 눈과 손이 아니라 “결과로 드러난 차이”를 가리키는 말에 가깝다고 정리한다.

여기서 책은 ‘경쟁’이라는 단어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파고든다. 우리 고전 문헌에서 ‘경쟁(競爭)’이라는 한자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가끔 나오는 용례도 시 구절 속 “다투다” 정도의 의미일 뿐, 오늘날처럼 “너 죽고 나 살자”는 느낌은 아니다. 중국 고전에서도 비슷하다. 공자가 활쏘기를 예로 든 “군자의 다툼”은, 서로 예를 갖추고 양보한 뒤 겨루고, 끝나면 함께 술을 나누는 장면이다. 결과보다 과정의 예를 중시하는 다툼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세 사람, 유길준, 후쿠자와 유키치, 가토 히로유키를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

이 부분이 책의 백미 중 하나다.

후쿠자와 유키치 : 영국식 자유주의와 정치경제학을 받아들이며 ‘competition’을 번역했다. 그에게 경쟁은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 각자가 능력을 발휘해 발전을 도모하는 힘”에 가깝다. 더 잘하려고 애쓰는 과정이지만, 상대를 짓밟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익이 커지는 방향의 경쟁이다.

유길준 : 일본 유학 시절 후쿠자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경쟁론’과 『서유견문』에서 경쟁을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경쟁도 “문명과 부강함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각자가 분발하는 힘”에 가깝다. 공자의 활쏘기 비유를 인용하며, 예를 잃지 않는 경쟁, 서로를 자극하지만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경쟁을 강조한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이 “유길준이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정작 그가 말한 경쟁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약육강식과는 거리가 멀다”고 평가한다.

반면, 가토 히로유키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한다. 그는 영어 struggle을 “경쟁”으로 번역하면서, 동식물 세계의 생존투쟁을 그대로 인간 사회에 가져온다. 그의 글에서 경쟁은 “우월한 존재가 열등한 존재를 압도하고, 결국 열등한 존재는 자손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는 과정”이다. 여기서 “우승열패”,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힘을 얻는다. 경쟁은 더 나아지기 위한 자극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제거하는 자연법칙처럼 묘사된다.

저자는 이 세 사람을 나란히 보여주면서, “경쟁”이라는 같은 단어가 어떻게 자유주의적 자기계발, 그리고 사회진화론적 약육강식, 두 갈래로 찢어져 간 역사를 설명한다. 후쿠자와–유길준의 경쟁은 함께 나아가기 위한 경주에 가깝지만, 가토의 경쟁은 이기지 못하면 사라지는 싸움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 더 강하게 남은 것은 후자의 그림이다.

책의 1부와 2부는 이렇게 언어와 개념의 계보를 추적하면서, 우리가 너무 쉽게 쓰는 “경쟁, 생존경쟁, 적자생존, 진화” 같은 단어의 숨은 역사와 오해를 하나씩 드러낸다. 3부에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과 『인간의 유래(인간의 친연관계)』에서 실제로 말하고자 했던 바를 정리한다. 다윈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환경이 변함에 따라 조금씩 변하고, 이런 변이를 동반한 계승이 오랜 시간 누적되면서 한 종이 다른 종으로, 혹은 한 종이 여러 종으로 갈라져 나간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의 핵심에는 “종, 적응, 환경, 변이, 진화, 변형”이라는 개념들이 놓여 있는데, 저자는 우리가 이 단어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진화론을 다 안다고 착각해 온 것은 아닌지, 조용히 되묻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의 시선은 더 직접적으로 오늘의 한국 사회를 겨냥한다. 우리 사회는 “팔꿈치 사회”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서로를 밀어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구조가 되어 버렸다. 교육은 시민을 기르는 장이라기보다, “경쟁 국가의 병정”을 만드는 체계가 되었고, 특목고–명문대–대기업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는 공감과 연대보다는 “우리는 다르다”는 경계를 굳히는 역할을 한다. 경쟁은 사람들의 내면을 소모시키고, 끝없는 비교 속에서 열등감과 스트레스를 키우며, 결국 자신이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잊게 만든다.

여기서 저자는 다시 다윈에게 질문을 돌린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경쟁을 여러 번 언급했지만, 동시에 “생명체들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더 중요한 것으로 꼽았다. 한 종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주변 생명들과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망이다. 오늘날 생태학에서 말하는 공생, 상호작용, 생태적 지위의 개념과 이어지는 지점이다. 붉은토끼풀–진홍토끼풀–꿀벌–뒤영벌의 관계처럼, 각 생물은 자신만의 자리를 찾고 서로의 틈을 메우며 공존한다. 다윈이 그려낸 세계는 “누가 누구를 이겼는가”로만 설명되는 세계가 아니라, 서로 기대고 얽힌 관계의 그물망이다.

그래서 이 책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핵심 메시지는 결국 이것 같다. “인생과 사회를 오직 경쟁으로만 설명하는 언어를 잠시 내려놓고, 관계와 상호연결의 언어로 다시 생각해 보라.” 다윈이 관찰한 것은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법칙이 아니라, 저마다의 자리에서 환경에 맞춰 살아남으려 애쓰는 다양한 생명의 모습이었다. 그 시선을 우리 삶에 옮겨 보이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보다 ‘살아가기 위해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나에게 『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은,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당연하게 믿어 온 “경쟁의 상식”을 한 번쯤 의심해도 좋다는 허락을 주는 책이었다. 그리고 그 의심에서 출발할 때, 비로소 나와 타자를 모두 조금 덜 상처 주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희망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했다.


'소명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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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는 개인의 자립과 자유를 존중하는 것을 기초로 하는 영국 사상을 일본에 최초로 도입한 반면, 가토는 국가의 개인에 대한 우월성을 지향하는 독일 사상을 일본에 최초로 도입했다. 그래서 후쿠자와는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지향점으로 삼은 반면, 가토는 훗날 일본 제국주의 헌법 체제에서 볼 수 있는 독일식 입헌정치를 지향점으로 삼았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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