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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문학동네 30주년 기념 특별판) ㅣ 문학동네 30주년 기념 특별판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평점 :
절판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믿는 연습”
출간된 지 10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데미안』은 여전히 많은 사람의 인생책으로 불린다.
유행도 바뀌고 삶의 방식도 달라졌는데,
유독 이 책은 이상하게 계속 다시 읽힌고 있다.
왜 이 오래된 소설이 지금까지도 읽히고 있는 걸까?
아마도 『데미안』이 오래 읽히는 이유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온 기준을 조용히 흔들어 놓기 때문 아닐까?
익숙한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와 굳어버린 고정관념에 “정말 그게 전부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숨에 읽히기 보다 순간순간 생각을 깨운다.
익숙한 세계를 한 번 뒤집어 놓고, 그 자리에 스스로의 시선으로 삶을 다시 보게 만든다.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
책의 첫 질문이었던 이 문장은,
나는 정말 내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남이 정해놓은 기준에 맞춰 나를 계속 고쳐 쓰며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한다.
데미안은 성장소설을 넘어, 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끝까지 추적하는 이야기로 바뀐다.
그리고 이 문장은 노자의 무위 자연을 생각하게 하기도 했다. 노자가 말하는 ‘자연(自然)’은 자연 풍경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상태’이고, 억지로 꾸미지 않은 존재 방식이다. ‘무위(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싱클레어의 고백은 나는 나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라는 말에 가깝다. 그런데 왜 그 단순한 소망이 이렇게 어려울까. 삶은 끊임없이 인위적인 기준을 들이민다.
성공의 형태, 인정받는 방식, 바람직한 태도가 정답처럼 제시되며 우리의 흐름을 자꾸 수정한다.
그래서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사는 일이 오히려 가장 어려워진다.
노자의 시선으로 보면 그 어려움은 실패가 아니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반드시 마주치는 저항이다. 『데미안』은 그 과정을 철학이 아니라 체험으로 보여준다.
이야기의 출발점은 ‘두 세계’다. 싱클레어가 살아온 밝고 선량한 세계, 그리고 크로머를 통해 발을 들이게 되는 어둡고 금지된 세계. 흔히 선과 악의 대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의 규범과 자기 안의 충동이 처음으로 충돌하는 지점에 가깝다. 싱클레어가 무너지는 이유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거짓말 하나, 돈 몇 푼, 허풍 같은 사소한 사건들이 본질은 아니다.
진짜 변화는 ‘경계를 넘었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한 번 비밀을 품고 나자,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집 안은 여전히 평화롭지만, 그의 내면은 점점 고립된다.
가족과 함께 있어도 혼자이고, 웃고 있어도 불안하다. 성장이 외부 사건이 아니라 내부의 균열에서 시작된다는 걸 이 소설은 집요할 만큼 섬세하게 보여준다.
크로머에게 종속되는 과정은 단순한 괴롭힘이 아니다. 두려움이 어떻게 삶의 구조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반복되는 위협 속에서 싱클레어는 점점 피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듯 그 상황에 익숙해진다. 돈이 없어도 케이크를 챙기고, 눈치를 보고, 먼저 맞춘다.
겉으로는 비굴해 보일지 몰라도, 그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위험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정이고 생존 전략이었다. 더 무서운 건 폭력이 바깥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해자가 없어도 공포가 계속 작동하고, 폭력은 마음속에 규칙처럼 남는다.
그래서 데미안이 던지는 말은 위로라기보다, 내 마음을 정확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질문처럼 다가온다.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나를 지배할 힘을 내주는 일”이라는 문장은,
싱클레어가 자기 상황을 처음으로 객관화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가 된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크게 흔들렸던 장면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에 대한 데미안의 해석이었다. 우리는 늘 마지막 순간 회개한 강도를 감동적인 구원의 상징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런데 데미안은 묻는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갑자기 눈물로 참회하는 장면이 과연 얼마나 진실한가. 그것은 오히려 성직자적 감동을 위해 만들어진, 달콤하고 교화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는 만약 두 강도 중 한 명을 친구로 택해야 한다면,
눈물의 회개자가 아니라 끝까지 자기 길을 가는 다른 쪽을 더 믿겠다고 말한다.
마지막 순간에도 태도를 바꾸지 않고, 지금까지 자기를 이끌어온 삶을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ㅡ 그는 처지를 미화하지도, 비겁하게 등을 돌리지도 않는다.
그게 바로 그 사람의 색깔이고 성격이라고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솔직히 놀랐다. 너무 당연하게 믿어왔던 이야기가 사실은 하나의 해석일 뿐일 수 있다는 걸, 그 장면에서 처음으로 실감했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늘 이런 역할을 한다.
독자를 하나의 관점에 가두지 않고,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만든다.
처음엔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그 혼란이야말로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 없이, 상상력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한다.
작품 곳곳에는 인간이 아직 미완성 존재라는 상징들이 반복된다. 개미, 도마뱀, 개구리, 알껍질과 점액질 같은 이미지들.
우리는 이미 인간이지만 동시에 아직 덜 깨어난 존재다. 성장은 단번에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평생 이어지는 탈피다. 그래서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는 문장이 가볍게 읽히지 않는다.
알은 세계다. 익숙함이고 안전함이고, 남이 만들어 준 틀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바깥의 제도만이 아니라 내 안의 습관과 편안함,
남이 준 기준에 기대어 살려는 마음까지 포함한다.
데미안이 말하는 허용과 금지의 문제도 결국 이 지점으로 수렴된다.
중요한 것은 규칙을 잘 지키느냐 어기느냐가 아니다.
핵심은 ‘나에게 금지된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아는 일이다.
많은 사람은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규칙을 따른다.
편하니까. 하지만 데미안이 말하는 성장은 남의 규칙에 기대지 않고,
자기 안에서 계율을 만들어내는 단계다.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후반부의 ‘야곱의 싸움’은 그 성장을 몸으로 통과하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야곱이 밤새 천사와 씨름하듯 싱클레어는 욕망과 죄책감, 꿈과 현실, 빛과 어둠 사이에서 끝없이 싸운다. 이 싸움은 이해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할수록 더 흔들리고, 흔들릴수록 더 진짜에 가까워진다. 통합은 평온이 아니라 통증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 싸움은 성장이라기보다 또 하나의 탄생에 가깝다.
에바 부인은 그 싸움의 끝에서 등장하는 통합의 상징이다.
그녀는 보호자이면서도 이상이고, 어머니이면서도 사랑의 대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녀가 빛과 어둠을 나누지 않고 함께 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싱클레어는 에바를 통해 자기 안의 데몬, 즉 삶을 이루는 힘과 운명의 방향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운명과 기질은 같은 개념의 다른 이름이다”라는 문장은,
미리 정해진 운명을 말하는 게 아니라 결국 내 성향이 내 길을 만든다는 뜻처럼 들린다.
삶은 우연이 아니라, 내 성향이 만든 선택이 쌓여 형성된 길이라는 자각이다.
‘종말의 시작’에서 전쟁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이전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상징이다.
더 이상 안전한 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이전 세계의 붕괴이고, 그 붕괴 속에서 새로운 세계가 태어난다.
『데미안』이 마지막까지 편안한 희망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이유는,
탄생이 언제나 파괴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부록 해설이 말해주듯, 이 작품은 시간을 정밀하게 따라가 보면 싱클레어가 열 살에서 스무 살까지 겪는 내면 체험을 다루고 있다. 이야기의 흐름은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고,
마지막에는 1915년이라는 시대적 배경까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사실적인 바탕을 깔고 있다. 그런데 동시에 이 작품은 표면의 이야기 아래에 심층심리학적 상징 구조를 촘촘히 숨겨 둔, 놀라운 이중구조를 가진다. 그래서 처음엔 성장소설로 읽히지만, 다시 읽을수록 전혀 다른 층이 열린다.
이 책이 ‘나이가 들수록 다르게 읽힌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이유가 거기에 있다.
결국 『데미안』이 남기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질문이다.
나는 누구의 기준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자주 나를 수정해왔는가?
나는 정말 내 삶의 주인인가?
『데미안』은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답을 만들어야 하는 자리로 데려간다.
나답게 사는 일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을 덜 가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언제나 아프고 불편하다. 그래서 이 책은 편하지 않다. 대신 오래 남는다.
흔들릴 때마다,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마다 펼쳐 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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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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