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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의 책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평점 :
일시품절

책을 읽는 순간, 독자가 더 이상 독자가 아니게 되는 책이 있다. <나는 그대의 책이다>는 바로 그런 책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 작품에서 소설도, 에세이도, 자기계발서도 아닌 독특한 형식을 선택한다. 책은 조용히 읽히는 대상이 아니라,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고 질문을 던지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은 언제나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그대 자신’에게로.
이 책의 인사말은 분명하다. 좋은 책이란 독자를 다른 인물로 도피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거울이다. 이 책은 스스로를 사물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도, 사물이 의식을 지닌 존재를 도울 수 있다고 덧붙인다. 종이에 적힌 기호들이 문장이 되고, 그 문장이 독자의 지각을 흔들 수 있다면, 결국 변하는 것은 책이 아니라 독자 자신이며, 그 변화에 따라 세상도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다만, 이 책은 책임을 대신 지지 않는다. 모험을 제안하는 것은 책이지만, 그 여행을 실현시키는 힘은 오로지 독자에게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대의 책이다』는 공기, 흙, 불, 물이라는 네 개의 원소 세계를 따라 진행된다.
각각의 세계는 내면의 상태를 상징하며, 색지와 글자체의 변화까지 포함해 독서 자체를 하나의 체험으로 만든다. 공기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펼쳐진다. 사람들이 함께 모이면 다투기 쉽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럼에도 언젠가 서로 사이좋게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인간의 바탕에는 결국 선량한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이 세계에서 특히 화산 장면은 유독 오래 남는다. 화산의 입구를 ‘입’이라 하고, 그곳에서 쏟아지는 용암을 ‘지구의 피’라 부르는 순간, 풍경이 아닌 살이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특히 ‘피’라는 단어가 붙자 용암은 장엄함이 아니라 경고 신호가 된다. 지금 심각하다,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말을 붉은 이미지로 눈앞에 들이미는 듯하다. 책은 길게 설명하지 않고, 지구가 피를 토하는 장면 하나로 우리가 만든 균열과 고통을 몸으로 먼저 알아차리게 만든다.
공기의 세계는 또한 정신의 비행을 둘러싼 오해를 짚는다. 마약, 종교적 고행, 기술적 환각처럼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는 수단들은 결국 도피에 가깝다고 말한다. 책이 제안하는 대안은 의외로 단순하다. 아무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상상력만으로 충분히 날 수 있다는 것. 책은 독자가 도움을 원할 때만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진짜 변화는 외부 자극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한다.
흙의 세계로 들어서면 시선은 보다 안정된 내부로 향한다. 이곳에서 책은 내밀한 안식처를 이야기한다. 정신 속에만 존재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장소, 언제든 돌아가 힘을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정신세계의 서재를 정돈하듯 생각과 감정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개인적인 상징’이다. 인간에게는 육체의 오감뿐 아니라 감정, 상상력, 직관, 의식, 영감이라는 정신의 오감이 있으며, 상징은 그것들을 조율해준다. 이를 통해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직관을 신뢰하며, 자기 생각의 주인이 되는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불의 세계는 고통과 투쟁의 영역이다. 체제와의 싸움, 질병과의 싸움, 불운과의 싸움,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이어진다. 이 책이 특별한 점은 언제나 이기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진정한 전사는 질 줄도 알아야 하며, 실패와 불운은 삶을 발전시키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때로는 공격보다 후퇴가, 섬멸보다 보존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는 현실적인 조언이 담겨 있다.
마지막 물의 세계는 회복과 휴식의 시간이다. 돌고래가 깨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꿈을 꾸듯, 인간 역시 현실에 있으면서 꿈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는 은유는 독서 경험 그 자체를 설명한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현실에 있으면서도 내면의 깊은 곳을 여행한다. 이 세계의 끝에서 책은 사랑에 대해 말한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며, 가장 훌륭한 증거는 자유를 주는 것이라고. 오는 사람을 막지 않고, 가는 사람을 붙잡지 않는 태도야말로 성숙한 관계라는 메시지다.
『나는 그대의 책이다』는 답을 주는 책이 아니다. 대신 질문을 남기고, 고요한 시간을 건네며, 독자가 자기 삶을 다시 써 내려가도록 이끈다. 독서를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자기 인식의 과정으로 되돌려 놓는 책이다. 이 책은 내 삶이라는 책에 지금 어떤 문장이 쓰이고 있는지, 그리고 그 문장을 고쳐 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끝내 생각하게 만든다. 그 책임은 언제나, 독자 자신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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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저것이 바로 화산이다. 저 뜨겁고 불그스레한 용암을 통해서 가이아 여신. 즉 지구의 피를 느껴 보라. 그대의 행성은 살아 있고, 마그마로 된 피가 끓고 있다. 원한다면 더 가까이 다가가도 된다. 이 화산이 거대한 입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 입을 통해서 지구가 그대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지구가 장중한 연속음을 발하고 있는데, 그대는 알아듣지 못하는가 보다. 너무 낮고 미묘한 소리라서 아무래도 그대가 이해하기는 어렵지 싶다. 그대 행성과의 이 첫번째 만남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첫 만남부터 모든 걸 다 이해하게 되리라고 기대했던 건 아니지 않은가?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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