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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존재 : 코멘터리 북 - 이석원과 문상훈이 주고받은 여덟 편의 편지
이석원 지음 / 달 / 2025년 10월
평점 :

이석원의 글은 억지로 감동을 끌어내지 않고, 멋진 문장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물 흐르듯 읽히다가도 어느 순간 가만히 마음이 건드려지는 느낌이 든다.
『보통의 존재 : 코멘터리 북』은 그런 그의 문장을 사랑해 온 독자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는 책이다. 기존 산문집 『보통의 존재』가 솔직한 관찰로 일상을 기록한 책이었다면, 이번 판은 그 문장들 위에 시간을 올려놓고 다시 바라보는 구성이다. 총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에는 이석원과 문상훈이 실제로 주고받은 편지가 담겼고,
2부는 예전 산문을 왼쪽에 실어두고 그 옆에 지금의 생각을 코멘터리로 덧붙이는 방식이다.
한 권의 책 안에서 과거의 문장과 현재의 시선이 서로를 비추며, 한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무뎌지고 단단해지고 넓어졌는지 자연스레 확인하게 된다.
1부의 편지는 거창하지 않지만 솔직하다. 두 사람은 “솔직함이란 무엇인가”, “표현은 어디까지 진심이고 어디부터 기술인가”, “자기혐오와 자기보호는 어떻게 섞이는가” 같은 질문을 오가며 대화한다. 여기서 말하는 솔직함은 감정을 쏟아내는 일이 아니라, 감정을 해석해 방향을 가리키는 일에 가깝다. 누군가는 자기혐오를 방어 언어로 쓰고, “아직도 사랑을 잘 모르겠다”는 말로 마음을 숨긴다. 젊은 시절의 극단적 감정조차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결국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했던 열망이었다는 깨달음에 이르면, 솔직함은 감정의 크기를 키우는 게 아니라 감정이 향하는 방향을 정확히 짚는 기술이라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이 흐름은 자연스럽게 “표현”의 문제로 이어진다. 저자는 본질보다 표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꾸미거나 과장하라는 뜻이 아니다. 표현은 마음이 실제로 상대에게 도착하게 만드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심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고, 침묵은 종종 미덕이 아니라 회피가 된다. 그래서 그는 섬세하고 적절한 표현을 하나의 윤리처럼 다룬다. “웅변은 은, 침묵은 금” 뒤에 “상대를 배려하는 섬세한 표현은 가장 값지다”는 태도를 놓고, 사소한 비유 하나, 문장 하나가 관계를 다치게도 살리기도 한다고 조용히 일러준다.
편지 속 대화는 개인의 마음에서 시작해 창작과 일의 문제로 넓어진다. 세상은 의견을 조회 수와 반응으로 재단한다. 사람들은 조금만 통념과 다른 말을 해도 거센 반응을 보이고, 결국 무난한 말만 하게 만드는 세상이다. 그래서 점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을 고르게 되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표현으로 스스로를 정리한다.
이 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표현의 ‘기술’을 비겁함과 구분해 설명한다. 진심을 끝까지 목적지까지 보내기 위한 전략이 존재하고, 코미디에서 낙차를 이용해 웃음을 키우듯, 말에도 타이밍과 강약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진정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오래 버티고 살아남기 위한 방법에 가깝다. 동시에 ‘짜치다’는 말에 대한 생각도 다시 보게 한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다고 해서 다 진부한 건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어떤 멋진 말보다 더 현실적이고 값지다. 예술성과 생계를 서로 싸움 붙이지 말고, 오래 버틸 수 있는 진정성을 찾자는 의미에 가깝다.
이후의 장면에서는 기억과 망각이 중심이 된다. “기억되지 못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라는 질문 앞에서, 망각은 결핍이 아니라 기능으로 자리 바꾼다. 수면내시경의 비유가 특히 설득력 있다. 마취는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기억’을 지울 뿐인데도, 다음 경험은 덜 괴롭다. 우리는 실제로 아팠을지라도 그 기억이 흐려지면 삶을 계속할 힘이 남는다. 오래된 상처도 비슷하다. 상처를 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고, 상처받은 쪽은 오래 기억한다. 그때 용서는 상대를 위한 도덕이 아니라 나를 덜 아프게 하기 위한 선택이 된다. 오래 붙들고 있으면, 결국 가장 아픈 사람은 나 자신이니까. 이 인식은 앞서 말한 ‘표현의 윤리’와 다시 만난다. 말은 상대를 몰아붙이는 무기가 아니라, 서로 다시 살아갈 길을 만드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사랑을 다루는 방식은 현실적이고 조용하다. “아무나와는 잘 수 있어도 아무나와 손을 잡을 수는 없다”는 문장은 사랑을 거대한 감정이 아니라 일상의 행동으로 풀어낸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삶의 패턴을 정리해 실수를 줄이는 매뉴얼을 만들지만, 그 매뉴얼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평생 같을 것 같던 마음도 어느 날 변화되고, 변하는 것 속에서도 끝내 남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사랑은 큰 감정보다, 시간 속에서 쌓여가는 행동에 더 가깝다.
꿈과 일에 관한 대목은 담백하다. 꿈이 없어 고민하는 사람이 더 많고, 꿈이 없는 삶도 무의미하지 않다는 말 자체가 위로를 전해준다. 간절한 것 하나 없다고 인생이 멈추지는 않는다. 하고 싶은 것 없이도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 있다. 여기에 ‘운’이 개입한다. 모든 것을 노력으로만 설명할 수 없고, 실패가 곧 능력 부족의 증거일 필요도 없다. 사람은 운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운명론을 변명이 아니라 자기학대에서 벗어나는 통로로 사용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자기 탓을 조금 덜 하자는, 그러나 시도 자체는 계속하자는 균형의 권유다.
이 책의 형식적 하이라이트는 2부의 코멘터리다. 과거의 산문과 현재의 코멘트가 왼쪽과 오른쪽에 나란히 놓여, 같은 문장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 한눈에 드러난다. 어떤 문장은 더 단단해지고, 어떤 문장은 조심스러워지며, 어떤 문장은 뜻밖의 방향으로 확장된다. 과거의 단정은 현재의 유연함과 맞닿고, 그때의 솔직함은 지금의 기술과 포개진다. 독자는 한 편의 글을 사이에 두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동시에 읽는 드문 경험을 하게 된다. 단순히 예전 책을 다시 낸 게 아니라, 같은 문장을 시간 차이로 나란히 놓고 생각의 변화를 경험해볼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몇 년 전 그만둔 음악을 다시 하기로 결심한다. 계기는 의외로 한강의 수상 소식이었다. 많은 이가 기뻐하던 그 순간, 작가가 털어놓은 한계와 초조함을 보며 오히려 “전성기 이후의 글을 보고 싶다”는 마음에 닿는다. 야구팀이 강속구 투수만으로 꾸려지지 않듯, 창작자도 나이 들수록 다른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다. 그 통찰을 ‘남의 상황을 빌려 자신에게’ 돌려주며, 목소리가 예전만 못해도 지금 나이로만 볼 수 있는 세계를 노래할 수 있다면 다시 해볼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설령 빈 객석이 보일지라도 결과보다 다시의 결심을 믿겠다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보통의 존재가 낼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용기다.
책을 읽고 나면 화려한 문장 대신 이런 한 줄이 오래 남는다. “좋은 답장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상대가 보낼 편지를 얼마나 많이 읽는가에 달려 있다.” 이 한 줄이 책의 태도를 말해준다. 누군가의 편지를 끝까지 읽어주는 마음, 내 마음을 끝까지 들어보는 연습, 숨기던 솔직함을 표현의 기술로 바꾸는 과정, 망각을 기능으로 받아들이는 지혜. 그래서 독자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위로받는다. 특별한 사람이 되라는 주문 대신, 보통의 자리에서 쓰는 정교한 마음의 기술을 건네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술은 생각보다 멋지고, 생각보다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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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석원님께서 "본질보다 표현이 훨씬 중요하다"라고 생각한다는 맥락이 궁금해졌어요. 저도 그러거든요. 가지고 있는 마음보다 더 크게 과장된 표현들을 경계하려고 하지만, 또 동시에 어떻게든 표현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거니까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라는 말이나 ‘그걸 꼭 말해야만 아나?’ 같은 말들은 별로예요. 시간이 지나고 알면 뭐하나? 그리고 말하지 않은 것을 짐직 때려맞혔다가 오해라도 하면 그때 가서는 또 어쩌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표현하기에 용기가 없거나 귀찮은 사람들이 정당화하는 것 같아요. 침묵은 금이라지만 침묵이 오히려 쉬울 때가 많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을 붙이고 싶습니다.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그리고 상대를 배려하는 섬세한 표현은 다이아몬드’라고요. 저는 그래서 표현하는 것을, 그중에서도 적절한 비유나 예시로 표현해내는 것들에 탐닉해온 것 같아요.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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