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라는 세계 (트윙클 에디션)
리니 지음 / 더퀘스트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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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기록을 이렇게 어렵게 느낄까?

좋았던 순간이나 마음이 울적했던 날도, 되돌아보면 ‘그때 그 감정’을 떠올리고 싶은 마음이 분명히 있는데, 막상 노트를 펼치고 쓰려고 하면 괜히 귀찮고,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막막해진다.

“이왕 기록할 거면 잘 써야 한다”,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 “꾸준해야 의미가 있다” 같은 생각들이 시작도 전에 지치게 한다. 마음속에 기록하고 싶은 의지는 분명 하지만, 완벽함을 향한 부담감 때문에 한 줄조차 쉽지 않은 날이 반복된다.

리니 작가의 『기록이라는 세계』는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린다.

“기록이 어렵죠? 귀찮고, 막막하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왜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지, 저는 그걸 직접 경험했어요.”

이 책은 그 경험에서 출발한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인생 노잼 시기’를 지나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무너졌던 경험을 들려준다. 아무것도 즐겁지 않고, 마음의 용량이 꽉 차 더는 어떤 감정도 저장되지 않는 시기를 지나며 하루를 버티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노트 한 권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언제 행복했고 무엇을 불행하다고 여겼는지, 문제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풀어왔는지를 조금씩 적어 나가자, 그럼에도 내 인생을 잘 살아보고 싶은 의지와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서서히 돌아왔다고 이야기한다.

본문에서 리니 작가는 기록을 길이·넓이·깊이로 나누어 25가지 방식으로 소개한다.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짧은 메모’다. 기록은 원래 ‘굳이’ 하는 수고로운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처음부터 매일 빠짐없이 쓰겠다는 각오부터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노트나 자주 쓰는 앱에 단어 하나, 간판 이름 하나라도 ‘뭐라도 그냥’ 써보는 것, 거기서 모든 기록이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친구가 손바닥만 한 노트에 그런 메모를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브런치에 몇 편의 글을 완성하고, 생각지도 못한 작가의 꿈을 꾸게 됐다는 에피소드는 사소한 메모가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을 보여준다.

이 책이 반복해서 던지는 메시지는 기록을 대하는 태도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닮아 있다는 것이다.

비싼 노트를 갈아 치우며 첫 페이지를 망쳤다는 이유로 다시 시작하던 완벽주의 경험담은 우리 모두의 다이어리에서 본 장면 같아 웃음이 나면서도 뜨끔하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걱정하며 시작을 미루고, 실수 없는 결과만 원하고, 비교하느라 정작 나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마음이 기록 앞에서도 드러난다. 그래서 완벽주의 때문에 발을 떼지 못할 때 필요한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글씨를 틀리더라도, 페이지를 망치더라도 일단 써보는 것, 기록의 어원이 ‘다시 마음에 새기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왔음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에 새기고 싶은 순간을 위해 쓰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또한, 포스터형 달력인 ‘연력’에 하루 한 줄씩 적어 나가는 기록법도 소개한다.

저자는 벽에 붙여둔 연력의 작은 칸마다 그날 기억에 남는 일을 한 줄씩 적는다. 새해 첫날 분위기 좋은 카페를 발견한 일, 엄마 손을 잡고 기도하던 밤, 온라인에서 알게 된 친구와 나눈 대화 같은 사소한 조각들로 칸을 채운다. 하루만 보면 별것 아닌 날들이지만, 365개의 칸이 모두 채워진 연력을 한눈에 보면 힘들었던 날도, 무의미해 보였던 날도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루 1분, 1년에 365분을 투자해 얻는 이 통찰이야말로 기록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날것의 일기’와 ‘셀프 탐구 일지’, ‘미래 일기’는 기록이 현재와 미래를 잇는 다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적다 보면 언제 기쁘고 언제 슬픈지, 어떤 상황에서 마음이 무너지고 어떤 순간에 에너지가 차오르는지 나만의 감정 패턴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늘 작심삼일로 끝내는 사람’처럼 단정하기보다 실제 상황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쓰다 보면 생각보다 나는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오래전부터 꿈꾸던 국토대장정 완주를 미래 일기 속에 먼저 써두고, 시간이 흐른 뒤 실제로 그 꿈을 이뤘다는 경험담은 기록이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고정해주는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책의 마지막에는 저자가 실제로 사용하는 펜과 노트, 다이어리가 사진과 함께 소개된다. 매일 들고 다니기 좋은 노트, 잉크 번짐이 적어 필사하기에 좋은 펜, 월간과 주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다이어리까지, 기록 습관을 돕는 도구들이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다. 평소 내가 자주 사용하는 펜도 있어서 페이지를 넘기며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실제로 기록하는 사람이 어떤 도구를 어떻게 쓰는지 엿보는 재미까지 더해져 기록 덕후라면 특히 좋아할 만한 구성이다.

『기록이라는 세계』는 기록을 잘하는 요령을 가르치기보다, 기록을 통해 다시 나를 살아보게 하는 책이다. 완벽한 노트와 예쁜 글씨를 준비한 뒤에야 시작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오늘의 마음을 조금 덜 잃어버리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한 줄이라도 적어보자고 등을 떠미는 책이다. 기록이 막막한 사람에게는 가장 친절한 첫 안내서가 되어주고, 이미 오래 기록해온 사람에게는 왜 쓰기 시작했는지 그때의 마음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을 덮고 나면 나도 모르게 노트 한 권을 꺼내 제목을 붙이고, 오늘 하루의 퍼즐 조각을 한 칸 적어 넣고 싶어진다.


오퀘스트라 2기 활동으로

'더퀘스트 출판사'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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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생각해보면, 일기를 쓴다는 건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예요.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다면 굳이 오늘을 기록할 이유도 없을 테니까요. 매일 쓰지 못할 때도 있고 한 줄 겨우 쓰는 날도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 일기장을 펼쳐요. 이 작은 기록들이 저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 된다는 걸, 일기장 속에 쌓여가는 하루하루가 모여 새로운 희망이 되어 준다는 걸 아니까요.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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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 - 저항의 문장가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의 정수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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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는 아티초크가 펴낸 해즐릿 3부작 중 마지막 권이다.

앞선 두 권이 인간의 욕망, 혐오, 일상의 자잘한 감정과 사고를 파헤쳤다면,

이 책은 해즐릿이라는 인물을 이루는 가장 깊은 층(정치적 신념, 인간에 대한 불편한 진실, 청춘과 시간에 대한 통찰)을 한 권에 응축해 보여준다.

해즐릿의 글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그의 사유 방식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이미 앞선 두 권을 읽어 그의 문장에 익숙해진 독자에게는 해즐릿이 어떤 신념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책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해즐릿은 19세기 초 영국 사회가 보수주의로 돌아서던 시대에 급진적 공화주의자로 살았다.

프랑스 혁명이 유럽 전체를 흔들었고, 영국은 혁명 사상이 퍼질까 두려워 억압적으로 변하던 때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군주제와 귀족제를 부패한 봉건의 잔재라 비판했고,

나폴레옹을 세습 권력의 사슬을 끊은 인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상주의자들이 자주 빠지는 ‘현실을 무시하는 태도’는 경계하면서도, 지켜야 할 원칙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해즐릿의 글을 읽다 보면, 그가 말하는 급진성이라는 것이 빠르게 변화시키려는 마음이 아니라, 끝까지 깊이 생각하고 따져 보려는 태도에 가깝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저자가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은 바로 ‘진부한 비평가’에 관한 부분이다.

이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남이 한 말이나 유행하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마치 자신의 의견인 것처럼 말한다.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는 “위대한 작가지만 기복이 있다”고 쉽게 단정하고,

『맥베스』의 성공 역시 “음악이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단편적으로 해석한다.

고전 희극에 대해서도 아무 고민 없이 “저속하다”고 잘라 말한다.

이렇게 남의 생각을 반복하면서도 스스로는 통찰력 있는 평가를 한다고 믿는 모습이,

해즐릿이 이 글에서 가장 경계하고자 한 지점이다.

그들의 문제는 틀린 말을 한다는 게 아니라,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과정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읽다 보면 200년 전의 풍자가 지금 우리의 인터넷, SNS, 댓글 현실까지 그대로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저자가 말하는 ‘생각 없이 따라가는 사람’의 특징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가 겪는 정보 과잉 시대의 문제와 정확히 겹쳐 보였다. 진짜로 아는 사람보다 아는 척하는 사람이 더 눈에 띄고, 그런 사람들이 사회 분위기까지 흔드는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강렬했던 부분은 ‘온화한 사람의 두 얼굴’이다.

저자는 겉으로 늘 부드럽고,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고, 언제나 친절해 보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사실 ‘자기 문제와 관계없는 일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나고 누가 학살당하고 어떤 민족이 고통받아도 자신의 삶에 직접 닿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식사를 망친 작은 그을음 하나에는 하루 종일 예민해지는 존재다.

이런 묘사는 처음엔 과한 일반화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온화한 사람은 이기적, 까칠한 사람은 정의롭다”라는 구도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타인의 고통에는 차갑지만 자기 불편에는 과도하게 민감한 인간의 모습)을 읽다 보면, 이 글이 단순한 흑백 논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자기 중심성을 들춰내는 분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겉으로 까칠하고 불편해 보이는 사람 중에는 타인을 위해 끊임없이 신경 쓰고, 부당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대목에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앞부분만 보면 너무 단정적인 주장처럼 느껴졌지만, 뒤에 이어지는 사례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큰 일이 벌어져도, 정작 나는 내 일만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라는 부끄러운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저자는 사람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넘겨온 마음의 구조를 차분히 해부한다. 이런 통찰이야말로 읽는 사람을 한 번 멈춰 서게 만드는 힘이다.

‘인격을 안다는 것은’에서는 사람의 외모나 첫인상이 의외로 정확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한다.

말은 꾸밀 수 있지만, 표정과 태도는 쉽게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또 동시에 인간은 너무 복잡해서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을 떠올려 보면, 누군가를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판단을 쉽게 할 수 없다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다. 저자는 이 모순을 “판단의 유보”라는 태도로 정리한다. 어느 하나의 행동만으로 사람을 단정할 수 없으며, 인간의 인격은 수많은 조각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 책을 통해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다시 깨닫게 된다.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의 작은 단면만 보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만, 해즐릿은 그 단면 너머를 생각하게 만든다.

표제작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는 청춘을 다룬다. 해즐릿에게서 청춘은 단순히 젊은 나이가 아니라, 삶의 모든 감정이 가장 선명하게 느껴지는 시기를 의미한다. 그때의 열정, 기대, 실망, 좌절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그 기억은 오래 남아 우리를 만든다. 이 대목은 한국 청년 세대의 현실과도 대비된다. 요즘 청춘은 세계가 나를 위해 열려 있다는 느낌보다는 세계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압박을 더 크게 느끼고 살아간다. 하지만 저자는 청춘의 순간이 지나도 그때의 흔적은 우리 안에 남아 계속해서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 책은 해즐릿 3부작의 마지막 권으로서, 그의 문장을 읽고 나면 “생각한다는 게 어떤 일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정치 비평, 인간 심리, 도덕 판단, 청춘의 기억까지 주제가 넓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이 책은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들이민다는 점이다. 진부한 비평가를 읽으면 ‘나도 생각 없이 말한 적이 얼마나 많았나’ 돌아보게 되고, 온화한 사람의 두 얼굴에서는 ‘나는 얼마나 작은 불편에 집착하며 살았나’ 돌아보게 만든다. 해즐릿의 문장은 200년 전의 것이지만 놀라울 만큼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아티초크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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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놀 인스타 @hagonolza



첫인상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우리는 첫인상을 그럴듯한 말이나 행동에 속아 잊어버렸다가, 결국 대가를 치르고서야 그 사실을 깨닫곤 한다. 한 사람의 얼굴은 오랜 세월이 만든 결과물이며, 그의 삶 전체가 표정에 새겨져 있다. 아니, 그것은 자연이 직접 찍어낸 흔적이며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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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 문체부 제작지원 선정작
복일경 지음 / 세종마루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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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기억』은 첫 소개를 읽는 순간부터 뭔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긴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아버지의 자살, 시어머니의 치매, 친정어머니의 암까지.

이렇게만 나열해도 숨이 턱 막히지만, 막상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감정의 방향이 조금 달라진다.

이게 소설 속 과장된 비극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 내 주변 어딘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 법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치매와 암, 상실과 희생을 한 가족 안에 모아 둔 이야기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저자는 감정을 억지로 부풀려 눈물을 강요하기보다 담담한 톤으로 이야기를 밀고 나간다.

주인공이 “아버지가 꿈에 나오면 항상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회상하는 대목에서부터, 독자는 이미 좋지 않은 소식을 예감하게 된다.

불길함을 알고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서서히 다가오는 구조 덕분에 마음은 점점 불안해지는데, 그 불안이 곧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끝까지 지켜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되어, 결국 쉼 없이 마지막 장까지 읽게 되는 소설이었다.

소설의 중심에는 교사로 일하며 딸 예린을 키우는 윤주가 있다.

젊은 시절 여행사 일을 하던 남편 재훈은 말레이시아 출장지에서 폭력 사건에 휘말려 세상을 떠나고, 윤주의 아버지는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남긴 채 사고사로 위장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뒤, 윤주는 딸 하나를 붙들고 겨우 생계를 이어 가며 버티다가

시어머니의 전폭적인 도움에 기대어 조금씩 삶을 이어 간다.

\하지만 그 시어머니가 어느 순간부터 낯선 언행과 망상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중증 치매 판정을 받으면서 그나마 유지되던 가족의 균형은 완전히 기울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평생 칼국숫집을 하며 살아온 친정어머니는 암 진단을 받고도

딸과 손녀를 돕겠다며 집으로 들어와 가사와 간병을 도맡는다.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와 암을 앓는 친정어머니, 이 두 사람이 끝내 저수지에서 서로의 운명이 교차하게 된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고되어 있지만, 막상 그 장면에 도달했을 때의 충격과 먹먹함은 예상보다 훨씬 더 깊게 다가왔다.

또한, 이 책에서 특히 마음에 남았던 건, 이 소설 속 세계가 거의 온전히 여성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와 남편은 이미 자리를 떠났고, 이야기의 대부분은 남겨진 윤주와 두 명의 어머니, 그리고 딸 예린이 서로를 의지한 채 간신히 버티는 모습으로 채워진다. 그 안에서 사랑, 동정, 책임, 죄책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처음에는 서로를 지탱해 주던 돌봄이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는 한 사람의 삶을 서서히 갉아 먹는 족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는 이 작품이 보여 주는 가족의 풍경이 낯설지 않다는 점이 가장 섬뜩했다.

누군가를 위해 애쓴다는 이름으로, 정작 자기 자신은 잃어 가는 삶을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이미 많이 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처음에는 치매와 암이라는 소재 때문에 눈물샘을 자극하는 비극적인 가족 드라마일 거라고 짐작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이 소설은 그런 단순한 감정 소비를 거부한다. 오히려 평범한 부엌, 좁은 거실, 병실, 학교 교무실 같은 일상 공간을 무대로, 가족과 돌봄이라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너무나 힘든 현실을 정면으로 끌어온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가족, 내 주변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를 돌보아야 할 수도 있고, 또 언젠가는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버티기 힘든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 소설이 들려주는 비극은 상상 속 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동네 어딘가에서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현재 진행형처럼 느껴졌다.

저수지에 가라앉은 두 개의 달과, 그 뒤에 다시 떠오르는 또 하나의 달이라는 이미지는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처럼 보인다. 처음 두 개의 달은 마치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삶, 끝까지 짊어진 채 저수지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린 두 어머니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에필로그에서 윤주가 대청호를 지나며 창밖으로 비친 달빛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이미지에 또 다른 결을 더한다. 예린은 전화 너머에서 “엄마, 나 결혼 안 하고 엄마 옆에 있을 거야. 나중에 엄마 아프면 내가 다 돌볼게”라고 말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미래를 또 다른 돌봄의 굴레 위에 올려놓으려 한다. 그때 윤주는 “엄마는 네가 짊어질 짐이 아니야”라고 조용히 말하며, 딸의 그 다정한 마음을 서서히 방향을 바꾸어 준다. 예린이 “엄마도 이제 엄마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는 순간, 그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뒤로 밀어 두었던 윤주 역시 비로소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나는 이 소설이 말하는 희망이 거창한 기적이나 완벽한 회복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느꼈다. 큰 상실을 겪은 뒤에도 그저 오늘 하루를 다시 살아 보기로 마음먹고,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조금 더 잘 돌보려는 작은 결심. 그 소박한 다짐이야말로 이 작품이 말하는 ‘다시 살아감’에 가장 가까운 모습처럼 느껴졌다.

작가는 말미에서 이 소설의 시작이 한 편의 신문 기사였다고 밝힌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딸을 보다가, 고단한 딸의 삶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노인이 결국 사돈을 살해했다는 짧은 기사.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순간적인 비극이 아니라, 오랫동안 축적된 돌봄의 무게와 사랑, 원망, 죄책감이 뒤얽힌 시간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이 이야기가 단지 상상력으로만 만들어진 비극이 아니라 실제 기사 한 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이 특별히 극적인 인물이 아니라, 내 주변에서 마주칠 법한 엄마와 딸, 며느리의 얼굴과 자연스럽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과학과 의학의 발전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치매와 노인 돌봄 문제 앞에서는 여전히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지적한다. 평균 수명은 길어졌고 치매 환자는 늘어났지만, 그 무게는 여전히 대부분 여성에게 집중되어 있다. 어린 자녀를 돌보는 일에서 병든 부모를 부양하는 일까지, 여성은 평생을 당연한 돌봄의 역할 속에서 살아간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때로 그 희생을 정당화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 작품이 단지 눈물 나는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돌봄 구조’를 문학의 언어로 해부해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느꼈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분명 사랑이지만, 그 사랑으로 한 사람의 삶이 완전히 잠식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미덕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집요하게 보여 준다.

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도 언젠가는 부모를 돌보아야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 버티기 힘들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때 나는 돌봄을 의무처럼 주고받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을 핑계로 누군가의 삶을 조금씩 소모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은 그런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기억이 사라진 뒤에도 결국 무엇이 남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돌봄 속에서 쌓인 시간과 감정, 후회와 다짐이 남은 이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계속 흔적을 남기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기억』은 쉽게 읽어 보라고 권하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읽지 말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책이다.

읽는 동안 적지 않은 상처와 피로를 느끼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 감정을 외면하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한번쯤은 주인공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오히려 이런 일들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나는 내 자리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은 가족 돌봄을 경험해 본 사람,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은 사람, 고령화와 치매 사회를 단순한 통계나 뉴스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마주해 보고 싶은 사람에게 오래 마음속에 남는 이야기가 되어 줄 것같다.

두 개의 달은 물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빛은 여전히 윤주의 마음속에,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우리의 마음속에도 오래도록 잔잔히 머물러 있을 것 같다.


'세종마루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배워가고 싶었다.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잃지 않는 법과, 책임과 존재 사이에서 자신을 놓치지 않는 법을. 자신을 살피는 일은 결코 이기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어머니가 남긴 삶의 방식에 대한 응답이자, 예린에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한 조용한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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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해답은 언제나 나를 찾아온다
대프니 로즈 킹마 지음, 김정홍 옮김 / 테라코타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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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해답은 언제나 나를 찾아온다』는 제목 그대로,

인생의 바닥에 서 있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여기가 끝이 아니다”라고 건네는 책이다.

노먼 커즌스의 말처럼 인간은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다만

잠시 방향을 잃었을 뿐이라는 믿음이 책 전체를 이끌어 간다.

저자는 수많은 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시련이 없는 인생은

이제 막 태어났거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뿐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라고

절규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고 말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첫 번째 메시지는,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 때 우리는 흔히 ‘내가 뭘 잘못했나’,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건가’라는 자책과 후회에 빠진다. 잃어버린 기회, 잘못된 선택, 미리 막지 못한 사고들을 끝없이 떠올리며 자신을 괴롭힌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가 신이 아니기에 모든 불행을 예측하고 막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진짜 시련은 우리가 현실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고,

바로 거기서부터 새로운 자아가 확장될 여지가 생긴다고 말한다.

삶이 일부러 준비하지 않은 시련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은,

지금의 고통조차 내 인생의 큰 설계 안에 포함된 것일 수 있다는 위로를 건넨다.

이 책이 특별한 지점은, 시련을 단순히 ‘이겨 내야 할 장애물’로 보지 않고

‘삶이 보낸 전령’으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데 있다.

저자는 “이 모든 시련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독자 스스로에게 던지게 만든다. 그 질문은 단순한 긍정 사고가 아니라, 내 삶에 정말로 어떤 변화가 요청되고 있는지를 귀 기울여 듣는 작업이다. 시련을 통해 감정이 치유되고 영혼이 성숙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을 통과한 뒤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 열린다고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그렇다고 이 책이 추상적인 영성 담론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얼마나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는지를 꼬집는다.

슬픔을 꾹 눌러 담고 괜찮다며 살아가다 보면,

부정적인 감정만이 아니라 기쁨과 설렘 같은 긍정적인 감정도 함께 무뎌진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늘 밝고 씩씩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던 캐리의 이야기는 특히 인상 깊다.

겉으로는 멀쩡하고 기능적으로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의 슬픔을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

극단적인 선택까지 몰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네가 직면해야 할 것은 시련이 아니라, 그 시련을 겪고 있는 너의 슬픔”이라고 말하며,

감정 그 자체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고 한다.

감정을 다루는 비유도 강렬하다. 우리 마음을 감정이 흘러나가는 배수로에 비유하면서,

슬픔과 분노가 제때 흘러가지 못하면 낙엽에 막힌 배수로처럼 결국 삶 전체를 침수시킨다고 말한다.

울지 못한 슬픔은 어느 순간 몸과 영혼을 통째로 울게 만드는 방식으로 터져 나온다.

한 인물이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이 책의 메시지를 압축한다.

저자는 “울어야 산다”는 선언과 함께, 눈물이야말로 깊은 슬픔 뒤에 찾아올 평온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안내자라고 말한다. 실컷 울고 난 뒤에 비로소 다시 살아 볼 힘이 조금씩 생겨난다는 경험을, 저자는 체험과 사례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책 속에는 술로 감정을 마비시키며 버텨 온 알코올중독자 롭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는 힘들 때마다 술잔을 찾으며 고통을 덮어 버리려 했지만, 결국 그 술이 자신을 삶의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다. 롭의 서사는 삶을 버티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망가뜨리는 굴레가 되었다.

폴라의 사례도 인상적이다. 마음속 공허를 보지 않기 위해 옷장과 쇼핑백을 끝없이 채우던 그는,

쌓여 가는 물건과 달리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구멍 앞에서 결국 무너진다.

이 둘의 이야기는 우리가 힘들 때마다 붙잡게 되는 일종의 임시 처방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술, 누군가에게는 쇼핑, 일, SNS, 인정욕구가 될 수 있다.

저자는 그 모든 임시방편이 결국 고통을 미루는 것에 불과하며,

진짜 치유는 고통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그 슬픔을 온전히 겪어 내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개념은 ‘디폴트(default)’다.

컴퓨터를 처음 켰을 때 자동으로 설정되어 있는 기본값처럼,

우리에게도 어떤 상황에서 자동으로 작동하는 반사적 패턴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만 생기면 남 탓부터 하는 사람, 무조건 일에 몰입하거나,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도망치는 사람, 혹은 늘 누군가를 구해 주려 들다가 스스로는 무너지는 사람들. 이 각각의 반응이 바로 그 사람의 디폴트다.

저자는 시련의 순간에 오래된 디폴트만 고집하면,

겨울 코트를 한여름 내내 입고 다니는 것처럼 삶이 숨 막히게 된다고 경고한다.

진짜 변화는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준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선택지를 찾을 때 때 비로소 시작된다.

특히 마음에 남는 장면은, 교도소에 있는 한 사람이 젊은 수감자들을 위해 대신 울어 주는 이야기다.

이제 그들을 위해 울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하며 흘리는 그의 눈물은,

남을 위한 눈물이 곧 자기 자신을 위한 눈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나의 상처와도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그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한다.

이 장면은 슬픔을 나누는 행위가 얼마나 관계를 회복시키고, 동시에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한다.

결국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은,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그 안에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질서와 의미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고, 때로는 정말로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당신은 분명히 이 과정을 통과해 낼 것이고, 삶의 해답은 결국 당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이 책은 그 말을 공허한 위로가 아니라, 수많은 상담 사례와 자기 경험, 구체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증명해 보인다.

『삶의 해답은 언제나 나를 찾아온다』는 시련을 억지로 이겨내라고 다그치기보다,

그 경험을 통해 자신과 삶을 다시 바라보고 싶은 사람에게 더 어울리는 책이다.

빠른 해결책이나 ‘세 시간 동안 울고 다시 힘내라’는 식의 실용주의적 위로에 지친 독자라면,

이 책이 권하는 느리고 깊은 방식의 치유를 한 번쯤 경험해 볼 만하다.

“여기가 끝”이라고 느끼는 순간, 그 자리가 사실은 전환점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믿어 보고 싶을 때, 이 책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테라코타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는 요즘도 틈만 나면 눈물을 흘려요. 예전엔 나를 위해, 나로 인해 세상을 떠난 그를 위해, 그리고 그의 유가족을 위해 밤늦도록 울었죠. 그런데 요즘은 교도소에 갓 들어온 젊은이들을 위해 웁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제 그들을 위해 울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본인들조차 울지 않죠. 그래서 내가 대신 눈물을 흘립니다. 내가 처음 교도소에 들어왔을 때가 바로 그 나이였죠. 그들과 나는 다르지 않아요. 그들을 위한 눈물이 바로 나를 위한 눈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외롭지 않아요. 남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혼자일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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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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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즈키 유이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단순히 괴테 명언 모음집이 아니라,

말 한 문장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일본 최고의 괴테 연구자로 불리는 히로바 도이치.

평생 괴테의 작품을 읽고 가르치며 살아온 사람이다.

어느 날 결혼기념일을 맞아 아내와 딸과 함께 간 레스토랑에서 딸이 가져온 홍차 티백 꼬리표에서 이상한 문장을 발견한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뒤에는 괴테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런데 평생 괴테만 들여다본 그조차 기억에 없는 문장이다.

이 한 줄이 도이치의 삶을 뒤흔든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도이치는 원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라는 말을 일종의 농담이자 주문처럼 여겨 왔다.

독일에서는 아무 말이나 한 뒤 “괴테가 말하길―”을 붙이면 왠지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농담이 있다는데, 젊은 시절의 도이치에게 이 말은 괴테 연구자로 살아가는 자신을 지탱해 준 마법 같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이 말을 너무 쉽게, 너무 자주 쓰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누가 괴테의 명언을 인용해도 ‘어디에 있었더라, 아마 어딘가에서 했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자신도 근거가 불확실한 말을 괴테의 권위 뒤에 숨겨 밀어붙일 때가 있었던 것이다.

한때는 힘이 되던 문장이, 이제는 자신을 좀먹는 저주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티백 문장의 출처를 찾아 나선 도이치는 오랫동안 함께 공부해 온 동료 시카리, 제자들, 옛 스승 마나부, 그리고 새로운 세대의 연구자들과 차례로 대화를 나눈다. 시카리는 명언에도 종류가 있다며 세 가지를 들려준다. 너무 길어서 기억하기 쉽게 줄이는 ‘요약형 명언’, 여러 사람을 거쳐 전해지며 누구 것이었는지 흐려지는 ‘전승형 명언’, 그리고 사실은 그 사람이 한 말이 아닌데 붙여 버린 ‘위작형 명언’.

테르툴리아누스, 나폴레옹, 루터, 마더 테레사까지 우리가 교과서와 SNS에서 익숙하게 보아 온 문장들이 하나씩 예로 등장하는데, 읽다 보면 내가 믿어 온 말들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 과정에서 시카리라는 인물이 특히 인상적이다.

도이치의 스승 마나부를 통해 처음 만나게 된 그는, 로젠츠바이크 같은 어려운 사상가 이야기가 통하는 드문 친구이자 동료다. 서로 편하게 말을 놓고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상대의 전문성과 생각을 깊이 존중하는 관계로 그려진다. 시카리는 자신이 잘 아는 분야에 대해서는 또렷하게 말하지만,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이론이 허술하다고 느껴지면 기꺼이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물러선다.

이런 태도가 학문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미덕으로 묘사되는데, 이런 면을 보면서 내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한 명쯤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리고 ‘나는 주변사람에게 이런 존재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도이치의 태도 역시 배울 점이 많았다. 시카리가 긴 시간 동안 거의 혼자 떠들다시피 할 때에도, 도이치는 짜증을 내거나 대화를 끊지 않는다. 끝까지 듣고, 질문하고,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먼저 상대의 논리를 이해하려 한다. 작중 후반부에 등장하는, 젊은 연구자 쓰즈키와의 술집 장면에서도 도이치의 태도는 일관됐다. 다소 버릇없게 느껴질 수 있는 날 선 질문들이 이어지지만, 그는 거만한 표정을 짓거나 내가 선생인데 하는 식으로 눌러버리지 않는다. 대신 차분하게 묻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다. 타인과의 관계를 호의적으로 유지하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생각해 보면, 결국 이런 ‘경청의 태도’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술집 장면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대목이기도 하다. 쓰즈키는 이렇게 말한다.

“전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괴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 그게 저에게 힘이 되었어요.”

이 말 뒤에 도이치는 “사르트르 같군. 완전성과 불가능성.”이라고 중얼거린다.

쓰즈키는 거기에 “그래서 괴테가 『파우스트』를 완성하고 나서 세상을 떠난 게 대단하게 느껴져요.”라고 덧붙인다.ㅡ 괴테는 『파우스트』를 20대에 쓰기 시작해 80대가 되어서야 겨우 완성했다.

인간의 욕망과 지식, 악마와의 계약, 구원, 세계의 본질까지, 자신이 평생 붙들고 씨름해 온 모든 질문을 한 작품 안에 쏟아부은 셈이다. 괴테는 세상의 진리를 완전히 말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미 누군가가 다 말했으니 이제 그만해도 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진리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가 보기 위해 평생을 걸고 생각하고 쓰고 고쳐 나갔다. 쓰즈키가 느낀 ‘대단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진리를 완전히 붙잡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끝내 다 말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그 방향으로 계속 걸어간 사람이라는 점에서, 괴테는 그에게 용기를 주는 존재가 된다.

작품 속에서 도이치는 자신이 오랫동안 고민해 온 ‘잼적 세계’와 ‘샐러드적 세계’라는 개념을 떠올린다.

모든 것이 하나로 녹아 흘러내리는 잼 같은 세계와, 각자의 형태를 유지한 채 한 그릇 안에서 어우러지는 샐러드 같은 세계.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라는 티백의 문장은,

마치 이 두 세계를 한 번에 설명해 주는 문장처럼 보인다.

사랑은 모든 것을 마구 섞어 엉망으로 만드는 힘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서로의 모양을 유지한 채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하는 힘이라는 뜻이다. 도이치는 이 문장이 정말 괴테의 말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만들어 붙인 위작형 명언인지 찾아 나가면서, 동시에 자신이 평생 붙잡고 온 세계의 이해 방식과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 소설이 더 흥미로운 지점은, 작가 자신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는 점이다. 2001년생인 수즈키 유이는 동일본 대지진 당시 초등학생이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어른들의 입에서 서로 다른 말이 쏟아지는 경험 속에서, 그는 “도대체 어떤 말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말이 사람을 위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을 속이고 상처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경험한 셈이다. 그때의 의문이 시간이 흘러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라는 농담 같은 문장과 만나 이 소설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출판사 설명을 읽고 나니, 작품 전체에 흐르는 묵직한 불신과 동시에 언어에 대한 애정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면서도, 말투와 분위기는 의외로 잔잔하고 유머가 있다. 학자들끼리 명언의 출처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를 “생각하는 갈빗대”로 잘못 아는 학생 이야기가 나올 때는 피식 웃게 되고, 가족과 제자들이 서로의 손등에 문장을 적어 가며 기억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묘하게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 가족의 일상, 학자의 고민, 친구의 표절 사건, 젊은 세대 연구자의 고민이 층층이 쌓이면서도, 마지막에는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는 문장에 자연스럽게 닿는다.

이 책이 끝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세상에는 이미 수많은 명언과 고전, 경전이 쌓여 있고, 우리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그 흔적 위를 다시 걷는 일에 가깝다. 그러나 그 문장을 그대로 외우는 것만으로는 절대 내 것이 되지 않는다. 괴테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애초에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없다는 한계를 알면서도, 자기 언어로 다시 말해 보려는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전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괴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라는 쓰즈키의 고백은 결국 우리에게도 향한다. 완전한 말, 완벽한 문장은 불가능할지라도, 끝까지 말해 보려고 애쓰는 그 방향성 자체가 한 사람의 인생을 버티게 해 주는 힘이 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빌려 쓰는 대신 내 언어로 다시 말해 보려는 노력을 조금은 더 해 보고 싶어졌다. 동시에, 다 말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그럼에도 계속 말해 보자는 조용한 격려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기보다는,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이 불안하고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래가는 위로로 남는다.

'포레스트북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전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괴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 그게 저에게 힘이 되었어요."
(중략)
"사르트르 같군. 완정성과 불가능성." 한동안 침묵한 뒤 도이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네, 그래서 괴테가 ‘파우스트‘를 완성하고 나서 세상을 떠난 게 대단하게 느껴져요."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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