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 문체부 제작지원 선정작
복일경 지음 / 세종마루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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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기억』은 첫 소개를 읽는 순간부터 뭔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긴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아버지의 자살, 시어머니의 치매, 친정어머니의 암까지.

이렇게만 나열해도 숨이 턱 막히지만, 막상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감정의 방향이 조금 달라진다.

이게 소설 속 과장된 비극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 내 주변 어딘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 법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치매와 암, 상실과 희생을 한 가족 안에 모아 둔 이야기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저자는 감정을 억지로 부풀려 눈물을 강요하기보다 담담한 톤으로 이야기를 밀고 나간다.

주인공이 “아버지가 꿈에 나오면 항상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회상하는 대목에서부터, 독자는 이미 좋지 않은 소식을 예감하게 된다.

불길함을 알고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서서히 다가오는 구조 덕분에 마음은 점점 불안해지는데, 그 불안이 곧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끝까지 지켜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되어, 결국 쉼 없이 마지막 장까지 읽게 되는 소설이었다.

소설의 중심에는 교사로 일하며 딸 예린을 키우는 윤주가 있다.

젊은 시절 여행사 일을 하던 남편 재훈은 말레이시아 출장지에서 폭력 사건에 휘말려 세상을 떠나고, 윤주의 아버지는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남긴 채 사고사로 위장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뒤, 윤주는 딸 하나를 붙들고 겨우 생계를 이어 가며 버티다가

시어머니의 전폭적인 도움에 기대어 조금씩 삶을 이어 간다.

\하지만 그 시어머니가 어느 순간부터 낯선 언행과 망상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중증 치매 판정을 받으면서 그나마 유지되던 가족의 균형은 완전히 기울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평생 칼국숫집을 하며 살아온 친정어머니는 암 진단을 받고도

딸과 손녀를 돕겠다며 집으로 들어와 가사와 간병을 도맡는다.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와 암을 앓는 친정어머니, 이 두 사람이 끝내 저수지에서 서로의 운명이 교차하게 된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고되어 있지만, 막상 그 장면에 도달했을 때의 충격과 먹먹함은 예상보다 훨씬 더 깊게 다가왔다.

또한, 이 책에서 특히 마음에 남았던 건, 이 소설 속 세계가 거의 온전히 여성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와 남편은 이미 자리를 떠났고, 이야기의 대부분은 남겨진 윤주와 두 명의 어머니, 그리고 딸 예린이 서로를 의지한 채 간신히 버티는 모습으로 채워진다. 그 안에서 사랑, 동정, 책임, 죄책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처음에는 서로를 지탱해 주던 돌봄이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는 한 사람의 삶을 서서히 갉아 먹는 족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는 이 작품이 보여 주는 가족의 풍경이 낯설지 않다는 점이 가장 섬뜩했다.

누군가를 위해 애쓴다는 이름으로, 정작 자기 자신은 잃어 가는 삶을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이미 많이 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처음에는 치매와 암이라는 소재 때문에 눈물샘을 자극하는 비극적인 가족 드라마일 거라고 짐작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이 소설은 그런 단순한 감정 소비를 거부한다. 오히려 평범한 부엌, 좁은 거실, 병실, 학교 교무실 같은 일상 공간을 무대로, 가족과 돌봄이라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너무나 힘든 현실을 정면으로 끌어온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가족, 내 주변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를 돌보아야 할 수도 있고, 또 언젠가는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버티기 힘든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 소설이 들려주는 비극은 상상 속 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동네 어딘가에서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현재 진행형처럼 느껴졌다.

저수지에 가라앉은 두 개의 달과, 그 뒤에 다시 떠오르는 또 하나의 달이라는 이미지는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처럼 보인다. 처음 두 개의 달은 마치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삶, 끝까지 짊어진 채 저수지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린 두 어머니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에필로그에서 윤주가 대청호를 지나며 창밖으로 비친 달빛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이미지에 또 다른 결을 더한다. 예린은 전화 너머에서 “엄마, 나 결혼 안 하고 엄마 옆에 있을 거야. 나중에 엄마 아프면 내가 다 돌볼게”라고 말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미래를 또 다른 돌봄의 굴레 위에 올려놓으려 한다. 그때 윤주는 “엄마는 네가 짊어질 짐이 아니야”라고 조용히 말하며, 딸의 그 다정한 마음을 서서히 방향을 바꾸어 준다. 예린이 “엄마도 이제 엄마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는 순간, 그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뒤로 밀어 두었던 윤주 역시 비로소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나는 이 소설이 말하는 희망이 거창한 기적이나 완벽한 회복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느꼈다. 큰 상실을 겪은 뒤에도 그저 오늘 하루를 다시 살아 보기로 마음먹고,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조금 더 잘 돌보려는 작은 결심. 그 소박한 다짐이야말로 이 작품이 말하는 ‘다시 살아감’에 가장 가까운 모습처럼 느껴졌다.

작가는 말미에서 이 소설의 시작이 한 편의 신문 기사였다고 밝힌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딸을 보다가, 고단한 딸의 삶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노인이 결국 사돈을 살해했다는 짧은 기사.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순간적인 비극이 아니라, 오랫동안 축적된 돌봄의 무게와 사랑, 원망, 죄책감이 뒤얽힌 시간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이 이야기가 단지 상상력으로만 만들어진 비극이 아니라 실제 기사 한 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이 특별히 극적인 인물이 아니라, 내 주변에서 마주칠 법한 엄마와 딸, 며느리의 얼굴과 자연스럽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과학과 의학의 발전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치매와 노인 돌봄 문제 앞에서는 여전히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지적한다. 평균 수명은 길어졌고 치매 환자는 늘어났지만, 그 무게는 여전히 대부분 여성에게 집중되어 있다. 어린 자녀를 돌보는 일에서 병든 부모를 부양하는 일까지, 여성은 평생을 당연한 돌봄의 역할 속에서 살아간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때로 그 희생을 정당화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 작품이 단지 눈물 나는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돌봄 구조’를 문학의 언어로 해부해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느꼈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분명 사랑이지만, 그 사랑으로 한 사람의 삶이 완전히 잠식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미덕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집요하게 보여 준다.

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도 언젠가는 부모를 돌보아야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 버티기 힘들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때 나는 돌봄을 의무처럼 주고받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을 핑계로 누군가의 삶을 조금씩 소모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은 그런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기억이 사라진 뒤에도 결국 무엇이 남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돌봄 속에서 쌓인 시간과 감정, 후회와 다짐이 남은 이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계속 흔적을 남기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기억』은 쉽게 읽어 보라고 권하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읽지 말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책이다.

읽는 동안 적지 않은 상처와 피로를 느끼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 감정을 외면하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한번쯤은 주인공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오히려 이런 일들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나는 내 자리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은 가족 돌봄을 경험해 본 사람,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은 사람, 고령화와 치매 사회를 단순한 통계나 뉴스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마주해 보고 싶은 사람에게 오래 마음속에 남는 이야기가 되어 줄 것같다.

두 개의 달은 물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빛은 여전히 윤주의 마음속에,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우리의 마음속에도 오래도록 잔잔히 머물러 있을 것 같다.


'세종마루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배워가고 싶었다.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잃지 않는 법과, 책임과 존재 사이에서 자신을 놓치지 않는 법을. 자신을 살피는 일은 결코 이기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어머니가 남긴 삶의 방식에 대한 응답이자, 예린에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한 조용한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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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해답은 언제나 나를 찾아온다
대프니 로즈 킹마 지음, 김정홍 옮김 / 테라코타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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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해답은 언제나 나를 찾아온다』는 제목 그대로,

인생의 바닥에 서 있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여기가 끝이 아니다”라고 건네는 책이다.

노먼 커즌스의 말처럼 인간은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다만

잠시 방향을 잃었을 뿐이라는 믿음이 책 전체를 이끌어 간다.

저자는 수많은 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시련이 없는 인생은

이제 막 태어났거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뿐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라고

절규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고 말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첫 번째 메시지는,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 때 우리는 흔히 ‘내가 뭘 잘못했나’,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건가’라는 자책과 후회에 빠진다. 잃어버린 기회, 잘못된 선택, 미리 막지 못한 사고들을 끝없이 떠올리며 자신을 괴롭힌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가 신이 아니기에 모든 불행을 예측하고 막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진짜 시련은 우리가 현실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고,

바로 거기서부터 새로운 자아가 확장될 여지가 생긴다고 말한다.

삶이 일부러 준비하지 않은 시련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은,

지금의 고통조차 내 인생의 큰 설계 안에 포함된 것일 수 있다는 위로를 건넨다.

이 책이 특별한 지점은, 시련을 단순히 ‘이겨 내야 할 장애물’로 보지 않고

‘삶이 보낸 전령’으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데 있다.

저자는 “이 모든 시련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독자 스스로에게 던지게 만든다. 그 질문은 단순한 긍정 사고가 아니라, 내 삶에 정말로 어떤 변화가 요청되고 있는지를 귀 기울여 듣는 작업이다. 시련을 통해 감정이 치유되고 영혼이 성숙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을 통과한 뒤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 열린다고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그렇다고 이 책이 추상적인 영성 담론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얼마나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는지를 꼬집는다.

슬픔을 꾹 눌러 담고 괜찮다며 살아가다 보면,

부정적인 감정만이 아니라 기쁨과 설렘 같은 긍정적인 감정도 함께 무뎌진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늘 밝고 씩씩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던 캐리의 이야기는 특히 인상 깊다.

겉으로는 멀쩡하고 기능적으로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의 슬픔을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

극단적인 선택까지 몰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네가 직면해야 할 것은 시련이 아니라, 그 시련을 겪고 있는 너의 슬픔”이라고 말하며,

감정 그 자체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고 한다.

감정을 다루는 비유도 강렬하다. 우리 마음을 감정이 흘러나가는 배수로에 비유하면서,

슬픔과 분노가 제때 흘러가지 못하면 낙엽에 막힌 배수로처럼 결국 삶 전체를 침수시킨다고 말한다.

울지 못한 슬픔은 어느 순간 몸과 영혼을 통째로 울게 만드는 방식으로 터져 나온다.

한 인물이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이 책의 메시지를 압축한다.

저자는 “울어야 산다”는 선언과 함께, 눈물이야말로 깊은 슬픔 뒤에 찾아올 평온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안내자라고 말한다. 실컷 울고 난 뒤에 비로소 다시 살아 볼 힘이 조금씩 생겨난다는 경험을, 저자는 체험과 사례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책 속에는 술로 감정을 마비시키며 버텨 온 알코올중독자 롭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는 힘들 때마다 술잔을 찾으며 고통을 덮어 버리려 했지만, 결국 그 술이 자신을 삶의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다. 롭의 서사는 삶을 버티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망가뜨리는 굴레가 되었다.

폴라의 사례도 인상적이다. 마음속 공허를 보지 않기 위해 옷장과 쇼핑백을 끝없이 채우던 그는,

쌓여 가는 물건과 달리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구멍 앞에서 결국 무너진다.

이 둘의 이야기는 우리가 힘들 때마다 붙잡게 되는 일종의 임시 처방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술, 누군가에게는 쇼핑, 일, SNS, 인정욕구가 될 수 있다.

저자는 그 모든 임시방편이 결국 고통을 미루는 것에 불과하며,

진짜 치유는 고통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그 슬픔을 온전히 겪어 내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개념은 ‘디폴트(default)’다.

컴퓨터를 처음 켰을 때 자동으로 설정되어 있는 기본값처럼,

우리에게도 어떤 상황에서 자동으로 작동하는 반사적 패턴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만 생기면 남 탓부터 하는 사람, 무조건 일에 몰입하거나,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도망치는 사람, 혹은 늘 누군가를 구해 주려 들다가 스스로는 무너지는 사람들. 이 각각의 반응이 바로 그 사람의 디폴트다.

저자는 시련의 순간에 오래된 디폴트만 고집하면,

겨울 코트를 한여름 내내 입고 다니는 것처럼 삶이 숨 막히게 된다고 경고한다.

진짜 변화는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준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선택지를 찾을 때 때 비로소 시작된다.

특히 마음에 남는 장면은, 교도소에 있는 한 사람이 젊은 수감자들을 위해 대신 울어 주는 이야기다.

이제 그들을 위해 울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하며 흘리는 그의 눈물은,

남을 위한 눈물이 곧 자기 자신을 위한 눈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나의 상처와도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그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한다.

이 장면은 슬픔을 나누는 행위가 얼마나 관계를 회복시키고, 동시에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한다.

결국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은,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그 안에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질서와 의미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고, 때로는 정말로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당신은 분명히 이 과정을 통과해 낼 것이고, 삶의 해답은 결국 당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이 책은 그 말을 공허한 위로가 아니라, 수많은 상담 사례와 자기 경험, 구체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증명해 보인다.

『삶의 해답은 언제나 나를 찾아온다』는 시련을 억지로 이겨내라고 다그치기보다,

그 경험을 통해 자신과 삶을 다시 바라보고 싶은 사람에게 더 어울리는 책이다.

빠른 해결책이나 ‘세 시간 동안 울고 다시 힘내라’는 식의 실용주의적 위로에 지친 독자라면,

이 책이 권하는 느리고 깊은 방식의 치유를 한 번쯤 경험해 볼 만하다.

“여기가 끝”이라고 느끼는 순간, 그 자리가 사실은 전환점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믿어 보고 싶을 때, 이 책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테라코타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는 요즘도 틈만 나면 눈물을 흘려요. 예전엔 나를 위해, 나로 인해 세상을 떠난 그를 위해, 그리고 그의 유가족을 위해 밤늦도록 울었죠. 그런데 요즘은 교도소에 갓 들어온 젊은이들을 위해 웁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제 그들을 위해 울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본인들조차 울지 않죠. 그래서 내가 대신 눈물을 흘립니다. 내가 처음 교도소에 들어왔을 때가 바로 그 나이였죠. 그들과 나는 다르지 않아요. 그들을 위한 눈물이 바로 나를 위한 눈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외롭지 않아요. 남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혼자일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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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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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즈키 유이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단순히 괴테 명언 모음집이 아니라,

말 한 문장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일본 최고의 괴테 연구자로 불리는 히로바 도이치.

평생 괴테의 작품을 읽고 가르치며 살아온 사람이다.

어느 날 결혼기념일을 맞아 아내와 딸과 함께 간 레스토랑에서 딸이 가져온 홍차 티백 꼬리표에서 이상한 문장을 발견한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뒤에는 괴테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런데 평생 괴테만 들여다본 그조차 기억에 없는 문장이다.

이 한 줄이 도이치의 삶을 뒤흔든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도이치는 원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라는 말을 일종의 농담이자 주문처럼 여겨 왔다.

독일에서는 아무 말이나 한 뒤 “괴테가 말하길―”을 붙이면 왠지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농담이 있다는데, 젊은 시절의 도이치에게 이 말은 괴테 연구자로 살아가는 자신을 지탱해 준 마법 같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이 말을 너무 쉽게, 너무 자주 쓰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누가 괴테의 명언을 인용해도 ‘어디에 있었더라, 아마 어딘가에서 했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자신도 근거가 불확실한 말을 괴테의 권위 뒤에 숨겨 밀어붙일 때가 있었던 것이다.

한때는 힘이 되던 문장이, 이제는 자신을 좀먹는 저주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티백 문장의 출처를 찾아 나선 도이치는 오랫동안 함께 공부해 온 동료 시카리, 제자들, 옛 스승 마나부, 그리고 새로운 세대의 연구자들과 차례로 대화를 나눈다. 시카리는 명언에도 종류가 있다며 세 가지를 들려준다. 너무 길어서 기억하기 쉽게 줄이는 ‘요약형 명언’, 여러 사람을 거쳐 전해지며 누구 것이었는지 흐려지는 ‘전승형 명언’, 그리고 사실은 그 사람이 한 말이 아닌데 붙여 버린 ‘위작형 명언’.

테르툴리아누스, 나폴레옹, 루터, 마더 테레사까지 우리가 교과서와 SNS에서 익숙하게 보아 온 문장들이 하나씩 예로 등장하는데, 읽다 보면 내가 믿어 온 말들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 과정에서 시카리라는 인물이 특히 인상적이다.

도이치의 스승 마나부를 통해 처음 만나게 된 그는, 로젠츠바이크 같은 어려운 사상가 이야기가 통하는 드문 친구이자 동료다. 서로 편하게 말을 놓고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상대의 전문성과 생각을 깊이 존중하는 관계로 그려진다. 시카리는 자신이 잘 아는 분야에 대해서는 또렷하게 말하지만,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이론이 허술하다고 느껴지면 기꺼이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물러선다.

이런 태도가 학문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미덕으로 묘사되는데, 이런 면을 보면서 내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한 명쯤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리고 ‘나는 주변사람에게 이런 존재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도이치의 태도 역시 배울 점이 많았다. 시카리가 긴 시간 동안 거의 혼자 떠들다시피 할 때에도, 도이치는 짜증을 내거나 대화를 끊지 않는다. 끝까지 듣고, 질문하고,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먼저 상대의 논리를 이해하려 한다. 작중 후반부에 등장하는, 젊은 연구자 쓰즈키와의 술집 장면에서도 도이치의 태도는 일관됐다. 다소 버릇없게 느껴질 수 있는 날 선 질문들이 이어지지만, 그는 거만한 표정을 짓거나 내가 선생인데 하는 식으로 눌러버리지 않는다. 대신 차분하게 묻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다. 타인과의 관계를 호의적으로 유지하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생각해 보면, 결국 이런 ‘경청의 태도’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술집 장면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대목이기도 하다. 쓰즈키는 이렇게 말한다.

“전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괴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 그게 저에게 힘이 되었어요.”

이 말 뒤에 도이치는 “사르트르 같군. 완전성과 불가능성.”이라고 중얼거린다.

쓰즈키는 거기에 “그래서 괴테가 『파우스트』를 완성하고 나서 세상을 떠난 게 대단하게 느껴져요.”라고 덧붙인다.ㅡ 괴테는 『파우스트』를 20대에 쓰기 시작해 80대가 되어서야 겨우 완성했다.

인간의 욕망과 지식, 악마와의 계약, 구원, 세계의 본질까지, 자신이 평생 붙들고 씨름해 온 모든 질문을 한 작품 안에 쏟아부은 셈이다. 괴테는 세상의 진리를 완전히 말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미 누군가가 다 말했으니 이제 그만해도 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진리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가 보기 위해 평생을 걸고 생각하고 쓰고 고쳐 나갔다. 쓰즈키가 느낀 ‘대단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진리를 완전히 붙잡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끝내 다 말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그 방향으로 계속 걸어간 사람이라는 점에서, 괴테는 그에게 용기를 주는 존재가 된다.

작품 속에서 도이치는 자신이 오랫동안 고민해 온 ‘잼적 세계’와 ‘샐러드적 세계’라는 개념을 떠올린다.

모든 것이 하나로 녹아 흘러내리는 잼 같은 세계와, 각자의 형태를 유지한 채 한 그릇 안에서 어우러지는 샐러드 같은 세계.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라는 티백의 문장은,

마치 이 두 세계를 한 번에 설명해 주는 문장처럼 보인다.

사랑은 모든 것을 마구 섞어 엉망으로 만드는 힘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서로의 모양을 유지한 채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하는 힘이라는 뜻이다. 도이치는 이 문장이 정말 괴테의 말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만들어 붙인 위작형 명언인지 찾아 나가면서, 동시에 자신이 평생 붙잡고 온 세계의 이해 방식과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 소설이 더 흥미로운 지점은, 작가 자신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는 점이다. 2001년생인 수즈키 유이는 동일본 대지진 당시 초등학생이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어른들의 입에서 서로 다른 말이 쏟아지는 경험 속에서, 그는 “도대체 어떤 말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말이 사람을 위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을 속이고 상처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경험한 셈이다. 그때의 의문이 시간이 흘러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라는 농담 같은 문장과 만나 이 소설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출판사 설명을 읽고 나니, 작품 전체에 흐르는 묵직한 불신과 동시에 언어에 대한 애정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면서도, 말투와 분위기는 의외로 잔잔하고 유머가 있다. 학자들끼리 명언의 출처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를 “생각하는 갈빗대”로 잘못 아는 학생 이야기가 나올 때는 피식 웃게 되고, 가족과 제자들이 서로의 손등에 문장을 적어 가며 기억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묘하게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 가족의 일상, 학자의 고민, 친구의 표절 사건, 젊은 세대 연구자의 고민이 층층이 쌓이면서도, 마지막에는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는 문장에 자연스럽게 닿는다.

이 책이 끝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세상에는 이미 수많은 명언과 고전, 경전이 쌓여 있고, 우리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그 흔적 위를 다시 걷는 일에 가깝다. 그러나 그 문장을 그대로 외우는 것만으로는 절대 내 것이 되지 않는다. 괴테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애초에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없다는 한계를 알면서도, 자기 언어로 다시 말해 보려는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전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괴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라는 쓰즈키의 고백은 결국 우리에게도 향한다. 완전한 말, 완벽한 문장은 불가능할지라도, 끝까지 말해 보려고 애쓰는 그 방향성 자체가 한 사람의 인생을 버티게 해 주는 힘이 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빌려 쓰는 대신 내 언어로 다시 말해 보려는 노력을 조금은 더 해 보고 싶어졌다. 동시에, 다 말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그럼에도 계속 말해 보자는 조용한 격려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기보다는,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이 불안하고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래가는 위로로 남는다.

'포레스트북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전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괴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 그게 저에게 힘이 되었어요."
(중략)
"사르트르 같군. 완정성과 불가능성." 한동안 침묵한 뒤 도이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네, 그래서 괴테가 ‘파우스트‘를 완성하고 나서 세상을 떠난 게 대단하게 느껴져요."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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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철학 - 고대 철학가 12인에게 배우는 인생 기술
권석천 지음 / 창비교육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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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마디로 말하면, 고대 철학자 12명(소크라테스, 소포클레스, 플라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 세네카, 플루타르코스, 키케로,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아리스토파네스)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다시 묻는 인생 기술 안내서다. 이 책은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시대를 어떻게 버티고 걸어가야 하는지, 각 철학자의 삶과 문장을 빌려 아주 구체적인 삶의 태도로 보여준다.

그래서 제목도 ‘최고의’가 아니라 ‘최선의’ 철학이다. 남을 이기는 비법이 아니라, 자기 자리에서 어떻게든 성실하게 살아내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생각의 틀을 건네준다.

이 책이 특히 좋았던 이유는, 예전에 읽었던 《소크라테스의 변론》, 《향연》, 《파이돈》을 다시 떠올리게 해줬기 때문이다. 그때 읽은 건 원전에 아주 가깝게 옮긴 번역본이라 문장 이해가 어렵고, 논리 전개도 낯설어서 솔직히 전체 내용을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최선의 철학》에서 만난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쉽게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어려운 개념 설명을 최대한 줄이고, 대화 장면과 핵심 질문을 일상적인 말로 풀어줘서 “소크라테스가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했구나” 하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예전에 분명 읽었던 내용인데, 이번에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소크라테스 파트의 시작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곧바로 연결된다.

저자는 AI 시대에는 질문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곧 경쟁력이라고 말한다.

같은 AI를 쓰더라도,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얻는 답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던 한 철학자를 불러온다. 바로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이라는 횃불을 들고 진리를 좇아간 사람이었고,

바로 그 질문들 때문에 재판에 서게 되었고, 끝내 독배를 마시며 생을 마감한 인물이기도 하다.

책은 소크라테스의 삶을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꼭 필요한 핵심만 또렷하게 보여준다. 그는 석공인 아버지와 산파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직접 돌을 다듬는 일을 했고, 마흔이 지나서야 비로소 철학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가 하던 철학은 우리가 떠올리는 어려운 학문과는 달랐다. 아테네 거리 곳곳을 걸어 다니며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묻고, 다시 되묻는 것이 전부였다. 여기서 중요한 비유가 바로 산파다. 산파가 아이가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옆에서 돕듯, 소크라테스 역시 질문을 통해 사람들 안에 이미 있는 생각과 진실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이끌었다. 이 때문에 그의 대화법을 ‘산파술’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는 그 방식으로 평생 진리를 향한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이 책은 특히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중심으로 그의 질문법을 보여준다. 법정에서 소크라테스는 나는 화려한 말로 꾸미지 않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말을 일상적인 언어로 말하겠다고 했다. 당시 법정에는 웅변가들이 과장된 수사와 눈물 섞인 호소로 배심원을 움직이는 문화가 있었다는 배경까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기 때문에, 왜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특별한지 쉽게 이해된다. 감정을 자극해 사람을 움직이는 대신, 진실을 놓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평범한 말을 택했다. 이 한 가지 태도만으로도 그의 품격이 느껴지는 것 같다.

재판 장면에서는 멜레토스와 주고받는 문답이 특히 또렷하게 살아난다. 소크라테스는 “정말 내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면, 그 피해가 결국 내게 돌아올 텐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겠느냐”, “새로운 신을 믿는다고 고발해 놓고, 동시에 나는 신을 전혀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앞뒤가 맞느냐” 하고 집요하게 되묻는다. 저자는 이 대화를 풀어 설명하면서, 소크라테스가 먼저 말의 뜻을 분명히 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고, 그다음에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따져 묻는 질문, 말 속에 깔린 전제가 맞는지 확인하는 질문, 마지막으로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실제로 어떤 결과가 나와야 하는지 끝까지 따라가 보는 질문을 차례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정리한다. 한마디로, 흐릿한 말을 그냥 넘기지 않고 의미와 근거를 끝까지 밝혀 내는 ‘질문의 기술’이 이 짧은 재판 장면 안에 압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특히 마음에 남았던 문장이 있다. “워딩이 흐리멍덩하면 세상도 흐리멍덩해진다.” 말이 애매하면 생각도 흐려지고, 결국 사회 전체가 서로 오해하고 헛도는 밤을 끝없이 반복하게 된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누군가 “근거를 알려 달라”고 말하면 괜히 까다롭고 분위기 망치는 사람 취급을 받기 쉽다. 그래도 소크라테스를 떠올리면, ‘이건 충분히 물어봐도 되는 질문’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수가 맞다고 하는 결정은 과연 정말로 옳은가?”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다수가 찬성하고 인정한다고 해서, 그 결정이 자동으로 합리적이고 정의롭다고 볼 수는 없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라서,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이라면 진짜로 옳은 선택이 아니어도 그 방향을 택하기 쉽다. 게다가 그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이 “그래, 그게 맞지” 하고 동의해 주면 죄책감은 더 줄어들고, 나중에는 우리가 한 결정이 원래부터 옳은 거였어라고 믿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주로 ‘집단사고’라고 부른다. 서로 다른 의견을 불편해하고,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비판을 삼가다 보니, 집단 전체가 위험하고 왜곡된 결정을 향해 한꺼번에 달려가는 현상이다. 여기에 “남들이 다 그러니까 나도 맞겠지”라는 ‘동조 효과’,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자기정당화’까지 더해지면, 누가 봐도 이상한 결정인데도 아무도 브레이크를 걸지 못하게 된다.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어쩌면 너무 옳은 말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반감을 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질문은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던 생각 속 모순을 하나씩 찔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불편함과 반감이 쌓인 사람들이 결국 다수의 힘으로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려는 마음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진짜 생각과 가능성을 깨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을 받는 입장에서는 그 깊은 마음보다 당장의 불편함이 먼저 느껴졌을 것이다. 질문을 듣는 그 순간, 불편함을 잠깐 견디고 자신에 대해 깊이 성찰할 수 있었다면, 각자의 불안한 현실과 미래 속에서 자기만의 답을 찾는 기회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현실을 인정하고, 지금의 나를 솔직하게 마주보는 태도에서 배울 수 있는 게 훨씬 많다고,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책 속에서 저자는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오늘날의 SNS 현실과도 자연스럽게 겹쳐 보여준다. 이슈가 하나 터지면 인플루언서들이 피라냐 떼처럼 몰려들어 대상을 물어뜯고, 그 과정을 통해 조회수와 수익을 끌어올린다. 누가 처음 말을 꺼냈는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제대로 확인되기도 전에 이미 한 사람이 절벽 끝까지 몰려가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남을 향한 무차별적인 공격과 조롱이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소비되고, 그럴수록 더 자극적인 말과 행동이 반복되는 구조를 보면,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률과도 완전히 무관하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현실을 떠올리다 보니, 최소한 이런 일들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제도와 법, 그리고 “거기까지만 하자”,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 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더 단단해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소크라테스 파트가 이 책의 시작을 알렸다면, 나머지 11명의 철학자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삶을 비춰준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통해서는 신념을 끝까지 지킨다는 것의 무게와 책임을 떠올리게 하고, 플라톤의 《메논》에서는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 모른다고 인정하고 계속 배우려는 초보자의 용기를 강조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일기 같은 글을 따라가다 보면, 혼란스러운 마음을 스스로 달래고 다잡는 연습이 왜 중요한지 느끼게 된다.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같은 이름은 역사와 서사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버티고 선택해 왔는지를 보여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결국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세네카와 키케로, 플루타르코스와 아리스토파네스는 각각 인간관계, 말하기와 글쓰기, 타인의 삶을 통해 나를 비추는 법, 세상을 비틀어 보는 유머와 비판적 상상력 같은 주제를 던진다. 각각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지는 않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건져 올린 핵심을 오늘의 언어로 쉽게 풀어 줘서 부담 없이 읽힌다.

전체적으로 문장은 어렵지 않고, 예시도 현대인의 일상과 가깝다. “멈춤 버튼 증후군”처럼 OTT 영상의 일시정지 버튼에서 출발해 삶의 불안과 회피를 설명하는 부분도 그렇다. 저자는 긴 기자 생활을 마치고 “나는 누구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다시 묻게 된 개인적인 경험이 책의 바탕에 깔려 있어서, 추상적인 철학 설명이 아니라 실제 삶의 고민에서 나온 문장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중·고등학생이 읽어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고, 어른이 읽어도 “맞아, 나도 이런 고민 했지” 하며 공감할 만한 지점이 많다.

물론 각 철학자마다 깊이 있게 파고드는 전문 연구서는 아니다. 한 사람의 사상을 끝까지 따라가는 대신, 12명의 철학자에게서 “지금 내게 필요한 질문”을 하나씩 건져 올려 주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오히려 입문서로는 더 적절하다. 여기서 관심이 생기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때 원전이나 다른 책으로 넘어가면 될 것 같다.

책을 덮고 나면 “최선의 삶”이라는 말이 아주 거창한 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던질 수 있는 작은 질문들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든다. 멈추고 싶고, 피하고 싶고, 남들 눈치 보느라 입을 다물고 싶은 순간에도, 한 번쯤 소크라테스처럼 조용히 되물어 보는 것. “정말 그런가?”, “나는 왜 그렇게 믿는가?”, “이 선택이 나와 타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그런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결국 나만의 “최선의 철학”을 만들어 가는 힘이라는 걸 이 책이 알려주고 있다.


'창비교육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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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놀 인스타 @hagonolza



소크라테스는 이어 자신이 어떻게 명성을 얻었고, 자신에 대한 비방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이야기합니다. 고발인들의 프레임(frame)을 본격적으로 반박하기에 앞서 자신의 프레임부터 보여주는 것입니다. 상대방 프레임부터 말한 뒤 반박하면 그 프레임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프레임을 먼저 분명하게 제시해야 상대방 프레임에 맞설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철학 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 계기를 ‘델포이의 신탁’에서 찾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카이레폰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가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물었는데, 그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탁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신탁에 곤혹스러움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지혜롭기로 이름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지혜롭지 않음’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처음엔 정치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그들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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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들 - 주석 스님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
주석 지음 / 담앤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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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등바등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기분이 조금 가라 앉고 있는 시점에 집안 문제까지 겹쳐 머릿속은 복잡하고 스트레스도 쌓였다.

그때 우연히 『주석 스님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 : 순간들』을 읽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딱 맞게 찾아온 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뒤엉킨 마음을 다독여 주는 시간이었다. 이 책은 스님이 조용히 써 내려간 일기 같은 소박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글을 읽다 보면 나만 이렇게 힘든 것은 아니구나하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책의 초반에서 스님은 위로가 되는 음식을 이야기한다.

꽁꽁 언 항아리에서 막 꺼낸 얼음 박힌 동치미, 여름날 할머니가 된장을 풀어 설렁설렁 끓여 주시던 된장찌개, 시험 보러 가는 아침마다 어머니가 싸 주시던 도시락. 이 음식들은 그저 추억 속 장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지친 마음을 붙잡아 주는 힘이 된다고 스님은 말한다. 우리에게도 힘들 때 문득 떠오르는 음식이 하나쯤은 있다. 사실 그 음식이 위로가 되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마음과 시간이 함께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스님은 학창 시절, 밥을 나누는 일을 “영혼을 나누는 일”이라고 여겨서 함부로 누구와 밥을 먹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지금도 의무적으로 어울려야 하는 식사 자리는 조금 불편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계절이 되면, 따뜻한 음식을 볼 때 누구와든 그 온기를 나누고 싶어지는 마음이 든다고 한다. 마음까지 서늘해지는 때, 마음 끓이지 말고 냄비에 따뜻한 찌개를 한 번 끓여 먹는 하루가 되면 좋겠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사람을 향한 스님의 따뜻한 시선을 엿볼 수 있었다.

“힘 나눠 갖기”에서 스님은 자기 안에 들어 있는 ‘힘’에 대해 돌아본다.

내가 더 옳다는 힘, 내가 더 잘 안다는 힘, 내 말이 무조건 맞다는 고집 같은 것들.

수행자라고 해서 이런 마음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그 힘을 조금씩 빼 보는 연습을 한다고 한다.

내 목소리를 낮추고 상대의 말을 들어 보면, 그제야 상대의 아픔이 들리기 시작한다.

내 손의 힘을 조금 빼고 상대의 손을 잡아 보면,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이 전해진다.

큰 돌과 작은 돌이 서로를 품고 쌓여 오래 버티는 돌담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도 힘을 나누어 가질 때 비로소 무너지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잔잔하게 남는다.

스님이 운영하는 ‘쿠무다(KUmuda)’라는 공간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이곳은 전통적인 사찰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고, 누구나 편안하게 드나들 수 있는 문화 공간을 지향한다. 종교 시설을 이렇게 열어 두는 것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종교인의 책임이 아닐까라고 스님은 말한다. 절이 기도만 하러 가는 곳이 아니라,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잠시 들러 숨을 고를 수 있는 쉼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도 스님은 솔직하고 현실적으로 이야기한다.

우리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소개했는데, 정작 소개받은 사람은 별로라고 느끼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한다. 스님은 그 이유를 “업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나와 그 사람은 비슷한 업의 틀을 가지고 있어 잘 맞지만, 다른 사람과는 그 틀이 잘 맞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상대를 내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할 때 관계는 서서히 틀어지고 멀어진다.

그래서 타인의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야기는 ‘이해’와 ‘거리 두기’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장자의 글을 인용하며, 발을 잊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세상을 살면서 완벽하게 맞는 사람과 상황은 거의 없고, 우리는 맞추어 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님은 ‘오해’에서 숫자 몇 개를 덜어내고 ‘이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자고 제안한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한 번 숨을 고른 뒤 상대를 바라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조금씩 달리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침묵의 가르침”에서는 양관 선사와 말썽 많은 양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모두가 양자를 쫓아내자고 말할 때, 양관 선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마지막에 짚신 끈을 매어 주다가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을 본 양자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삶을 바꾸게 된다. 이 장면을 통해 스님은, 때로는 소리 높여 비난하는 말보다, 말없이 지켜보는 눈빛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상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연민할 때, 굳어 있던 마음도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고정관념과 선입견에 대한 이야기도 만나게 된다.

스님은 벽에 걸린 그림도 앉아서 볼 때, 서서 볼 때, 누워서 볼 때가 다르고, 내가 가진 고정된 시선을 조금만 바꾸어도 전혀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선입견을 품은 채 사람을 대하면, 상대가 아무리 좋은 행동을 해도 그 선입견의 틀을 거의 벗어나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좋지 않은 카르마가 계속 쌓이고, 그 카르마가 또 다른 카르마를 만들어 결국 악순환이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결국엔 좋은 마음이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는 거 아니까 생각해보게 됐다.

이 책을 읽으면서 특히 마음에 남았던 문장은,

“인생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순간 지나간다.” 라는 말이었다.

지금 현실이 희망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끼며, 불행이라는 그림자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이 있다면, 이 문장은 작은 숨 구멍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어둠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지나가고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결국 지나간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서 너무 깊이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이 짧은 문장을 가슴속에 새겨 두는 사람들도 많았으면 한다.

스님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 낭중지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 같은 한자 성어도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결국 튀어나오고, 아무리 화려한 꽃도 열흘을 가지 못하며, 어떤 권력도 십 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처럼, 세상에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깨달음을 여러 장면에서 되새기게 한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에 가깝다. 힘든 시간도, 억울한 순간도, 부끄러운 실패도 결국은 지나가는 순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스님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통찰과 직접 쓴 시들이 함께 엮여 있는 산문집이다.

책 곳곳에서 스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리해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고, 말은 한 번 더 삼켜 보고 내보내야 하며, 섣불리 상대를 판단하기보다 먼저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태도로 스님은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를 말한다.

나만 깨닫는 길이 아니라, 나도 깨닫고 상대도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삶, 나와 타자가 함께 성숙해지는 삶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생은 한 번 정해진 대로 굳어 있는 그림이 아니라, 수많은 순간들이 모여 계속해서 모양을 바꾸어 가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나간 일에 마음을 너무 끓이기보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따뜻한 찌개 한 냄비를 끓여 먹는 하루를 살아가면 된다.

그렇게 소박하고 평범한 하루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의 삶 전체가 조금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방향으로 천천히 돌아서 있을지도 모른다.

'담앤북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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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화문(口是禍門)이니 필가엄수(必加嚴守)하라.’는 말은 모든 문제의 원인은 입에서 나오는 말로 시작되는 것이니 우리의 입을 엄하게 지키라는 뜻이다. 부처님과 조사(祖師)스님(불교에서 법맥을 잇는 중요한 승려)들은 물론 세상의 모든 성인이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사실 이런 말씀이 아니어도 우리는 눈을 뜨면서 시작해 눈 감을 때까지 하루에도 수없이 말로 인해서 생겨나는 문제를 겪고 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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