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견해로는 해석학은 이중의 동기 유발을통해 생명력을 얻는 것 같다. 즉 의심하고자 하는 의지와 경청하고자 하는의지가 그것이다. 같은 것을 엄밀함에 대한 요구와 복종에 대한 요구로 표현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는 아직도 우상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마치지 못했으며 간신히 상징을 경청하는 일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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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에 따르면 "역사가 우리에게 속한 것이아니라 우리가 역사에 속해 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대결말에 이르게 된다. "개인의 선입견은 그의 판단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그 존재의 역사적 실재를 구성한다."
- P335

가다머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지평개념, 즉 "어떤 특수한 시점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지평, 개념을 자기 것으로 흡수한다. "지평은 우리가 그 안으로 움직여가는 어떤 것, 그러면서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어떤 것이다. 움직이고있는 사람에게는 지평들이 바뀌어간다. 따라서 과거의 지평은 언제나 움직임 중에 있다. 이런 식으로 텍스트를 읽는 작업은 역사적 의식을 발생시킨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자신을 타자의 자리에 놓아봄으로써…타자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 - P337

 대화로부터 무엇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미리 알 수 없다. 대화 상대방이 타자 일수록 발생하는 내용들은 보다 더 창조적일 것이다. 대화란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의 심연을 연결하여 신선한 내용들이 발생하도록 허용한다.
- P340

가다머는 이렇게 썼다. "해석학은 무엇보다도 실천이다. 실천에서 우리가무엇보다 실행해야 하는 것은 경청과 민감성이다. 즉 선행하는 결단들, 예상들, 개념 안에 이미 가정된 흔적들에 대한 민감성 말이다. 바로 이것이성경을 경청하는 접근법에 있어 전체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핵심 열쇠라할 수 있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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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교회에게 주어진,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지만 성경이 계시에 대한 증언 인반면 정경은 교회를 통해 인정을 받는다(교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은 정경에 속한다. 성경은 계시에 대한 증언일 뿐 아니라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한 교회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 P293

 그의 관점에 따르면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따라서 이해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 P295

또한 제임스 바는 언어학을 기반으로 하여 "어원으로 의미를 추적하는 의심스런 작업도 공격한다. 흔히 어원학이 의미의 "본질을 제공한다고믿지만 이는 "의심쩍은 설교술적 속임수일 뿐이다. 왜냐하면 통시적 언어연구는 단어의 역사가 곧 의미는 아님을 논증하기 때문이다.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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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신칭의 교리처럼 탈신화화라는 우리의 시도는 모든 거짓 안전장치를 파괴해버린다.…진짜 안전은 모든 안전장치를 버림으로써만 발견되는 것이다."

보수적인 동료들이 신약의 신뢰성을 "변호할 때, 불트만은 사람들이 가짜안전에 의지하지 못하도록 "회의주의의 불길을 활활 지피는 것을 자신의소명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이 신학자의 역사적 회의주의는 탈신화화의 기획과 일관성을 가지게 된다. 불트만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없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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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 개념은 저자와 독자 사이의 공통적인 어떤 것을 포함한다. 무엇인가가 이해된다는것은 독자와 저자 사이에 어떤 공통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해는
"저자의 입장에 자기 자신을 놓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21 - P244

해석학은 전체와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 만일 두 방식 중 하나만 사용할 경우 어떤 일이일어날까? 슐라이어마허의 언급에 따르면 예감적 방법만을 따를 경우 "애매모호함에 머물게 될 것이다. 비교적 방법만을 사용한다면 현학의 위험에 처할 것이다. - P247

 슐라이어마허는 완전한 이해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러려면 텍스트 저자에 대한 완전한 지식과 동시에 언어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완전한 지식이란 불가능하다" (p. 100), 따라서 이해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시간이 걸리는 느린 과정이다.
(신앙에 이르는 일과도 비슷하다).
- P251

희한한 사실은 같은 시기에 사우스웰과 노팅엄의 초대 주교를 역임한조지 리딩(George Ridding)이 성직자들을 위한 장황한 회고담을 준비하고있었는데, 그 속에서 주교는 딜타이의 논점과도 유사하게 타자처럼 느끼고사고하기 위해 자신의 입장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는 개념을 정식화했다는점이다. 하지만 딜타이와 리딩은 둘 다 "타인의 감성을 자신의 것으로 측정하는 일 만큼이나 자아와 타자 사이의 차이를 느끼는 것도 강조했다. 에른스트 폭스와 만프레드 메츠거(Manfred Metzger)에 따르면 모든 개인은 유일하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의 경험을 절대 "추체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딜타이의 주장처럼 이런 목표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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