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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으로의 부르심 - 총체적 구원을 위한 선교적 교회론
대럴 L. 구더 지음, 허성식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 되어야 한다.” 참 멋진 말이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에 속한 목사로서 동의하고, 공감하는 명제다. 그런데 실상 이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나 이 구호가 외쳐지는 교회들을 보면 금세 마음이 식어진다. 개인의 명예나 조직의 결속을 위해서만 외쳐질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증인으로 부르심>의 저자 데럴 구더는 이러한 교회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집어낸다. “근본적으로 사도성은 선교적인 것이지 계보적인 것이 아니다.” 이 말을 내가 속한 교단과 교회들에게 적용해보자면 이렇게 바꿀 수 있겠다. 루터와 칼빈의 개혁 노선을 따른다는 것은 각 교회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개혁하며 선교적 교회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개인의 구원과 교회의 교리적 순수함을 지키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선교적 교회의 논의가 교회의 본질에서 점점 멀어진 작금의 교회들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라 지적한다. ‘도대체 교회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어진 상황들이 생겨났고, 그러한 상황 중에 성경과 신학들을 다시 검토해보니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은 분명 지금과 많이 다르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본질에서 벗어난 현재 교회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교회론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것, 개인적인 구원의 메시지와 하나님 나라를 분리시키는 것, 먼저 구원을 베풀고 교인들의 구원 상태를 유지하는 기관으로 교회를 바꿔버린 것, 현대적인 맥락에서 대부분의 주요 교단들을 괴롭히는 전도와 사회정의의 양극화 같은 것이다”
교회가 이런 모습들을 보이기까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소위 ‘기독교 세계’ 기간 동안 쌓여온 인식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거나, ‘후기 기독교시대’로 접어든 이후 개인의 욕구 충족을 절대적 선으로 여기는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했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이러한 교회의 인식과 태도는 구원을 개인의 유익으로, 교회를 교회 멤버십들의 유익을 보존하고 증진하는 기구 정도로, 종말의 모습을 구원 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거할 장소적인 차원으로 환원시켜버렸다.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등....신학의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게토화된 교회를 지탱 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저자는 칼 바르트, 데이비드 보쉬, 레슬리 뉴비긴과 같은 저명한 학자들의 논의를 바탕으로 환원주의를 극복하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교회를 부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선교적인 속성을 가지고 계시기에 본질적으로 선교적일 수밖에 없다. 구원 역시 칭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화와 소명으로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 개인의 구원과 교회의 본질을 선교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성도와 교회는 선교적 교회로서의 삶의 방식, 즉 복음에 합당한 삶을 자신들의 존재 방식으로 택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가질 수밖에 없는 급진적 타자성에 헌신하는 것이다.
<증인으로 부르심>은 위의 내용을 기본으로 교회는 선교를 (간간히) 하는 모임이 아닌, 선교적인 삶을 살아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을 선교 신학, 기독론, 교회론, 성경, 리더십에 걸쳐 폭넓게, 깊이 있게 논한다. 이를 통하여 교회가 왜 지금의 모습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지, 개혁 교회는 왜 계속해서 개혁하며 선교적 교회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튼튼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해준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은 지금 교회의 모습을 ‘선교적 교회’로 이동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