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에 나도 모르게 발끈 성미가 났다.
"도대체 비무장공비란 것이 뭐우꽈? 무장도 안한 사람을 공비라고 할 수 이서 마씸? 그 사람들은 중산간 부락 소각으로 갈 곳 잃어한라산 밑 여기저기 동굴에 숨어 살던 피난민이우다." 84p

 섣불리 들고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웠다. 고발할 용기는커녕 합동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낼 뱃심조차 없었다. 하도 무섭게 당했던 그들인지라 지레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코 고발이나 보복이 아니었다. 다만 합동위령제를 한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들을 진혼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해자가 쉬쉬해서 삼십년 동안 각자의 어두운 가슴속에서만 갇힌 채한번도 떳떳하게 햇빛을 못 본 원혼들이 해코지할까봐 두려웠다. 86p

 어른들은 도무지 잊을 수없었다. 아이들이 장난으로 팡팡 쏘아대는 화약총 소리에도 매번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그들이었다. 어떤 아이는 어디서 났는지 불에 타서 엿가락처럼 휘어진 총신만 남은 구구식 총을 끌고 다니다가 제 아버지한테 얻어맞고 빼앗겼는데, 총의 그 푸르딩딩한 탄 쇠빛은 꼭 죽은 피 빛깔을 연상시켜주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순이 삼촌만큼 후유증이 깊은 사람은 없었으리라. 삼촌네 그 옴팡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은 시체가둘 있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았다. 그해 고구마농사는 풍작이었다. 송장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 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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