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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여행가방 -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집
문학동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30년쯤 전에 한 여자 아이가 있었다.
또래 중 키가 작은 편이었고, 글자나 산수는 빨리 배웠지만, 운동 신경이 둔한데다가 겁이 많아서 몸을 움직이는 놀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아이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을 읽는 것이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풀린다면 어떤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건 첫 줄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알아차렸듯이 내 이야기고,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지는 않았다.
집에 책은 많았다. 기자이자 (내 짐작이지만) 문학 청년이셨을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책을 좋아하셨다. 두 분은 지금의 나처럼 언젠가는 읽겠지라며 책을 일단 사다가 쌓는 분들도 아니었다. 딸들에게 물려주실 거라고 생활비를 쪼개 구입하신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도 다 읽으셨고, 이사를 할 때마다 책이 가장 큰 짐이었던 모양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나? 좋아하긴 했다. 부담은 없이 친근하기만 한 사물이 책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받은(그러니까 선물로 주는 것인 줄 알고 받은) 선물도 책(유치원에서 성탄절 재롱잔치 끝에 산타할아버지가 주신 여섯 권의 그림책)이고,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도 책(초등학교 2학년 때 산타할아버지가 성탄절 새벽에 머리맡에 두고 가신 책으로 제목이 무려 '공비의 딸'1)이다. 부모님은 종종 내가 키가 크지 않은 이유가 어렸을 때 아빠의 커다란 책상 밑에 들어가서 책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책상 밑에 책을 가지고 한번 들어가면 여간해서는 나오지 않았다고. 그런데 내 기억은……?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하지 못하는 걸수도 있지만, 하여튼 내가 책을 쫓아다녔다는 기억은 없다. 그냥 있으면 읽고 없으면 다른 놀이를 하고. 어른들이 읽는 두껍고 글자들이 빽빽한 책들을 읽으려고 시도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벽을 보면서 어떤 얼굴을 상상하고 그 인물에게 내가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던 기억은 있다. 다시 안타깝게도 지어낸 이야기가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여튼 그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에 학교에 산문 한 편을 냈는데, 그 글이 덜컥 전국 규모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탔다. 제목은 '세 자매의 저금통'이었고, 상을 받으러 무려 서울 어린이대공원까지 가서 목에 메달을 걸고 손에 상장을 들고 찍은 사진도 있다. 글 쓰는 게 별로 어렵지가 않았고, 그걸로 상까지 받은 아이의 기쁨은 대단했다. 일어났으니 일어난 일인가 보다 하는 정도로 실감했을 뿐, 별로 힘들지도 않았는데 큰 칭찬을 받은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아이는 신기하고 신이 난 나머지 그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 '이런 일이라면 커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세상에서 글짓기를 제일 잘 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 뭐야?" 엄마는 대답하셨다. "글쎄. 노벨문학상이 아닐까?" 그때 아이는 '노벨문학상'이란 단어, 아니 '문학'이란 단어부터 처음 들어 보았다. 그리고 그 단어-'노벨문학상'보다는 '문학'-는 곧장 아이의 마음 속에 별로 꽂혔다.
그 때부터 아이는 진지하게 책을 읽고, 자기가 느낀 것들을 부지런히 글로 쓰곤 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풀린다면 여기서부터라도 어떤 작가의 비범한 어린 시절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물론 이것은 내 이야기이고 거듭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글짓기 숙제를 받아오면 큰 부담없이 뚝딱 써내기도 하고(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림 숙제를 받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기운이 쭉 빠졌었다), 그걸로 몇 번 상을 받기도 했지만, 작가들의 어린 시절 회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독서에의 탐닉, 쓰고 싶다는 욕구' 같은 것은 사춘기에 이르러서도 뚜렷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결정적으로 고등학교 때, 내가 다니던 여고에는 (글짓기반, 독서반, 심지어는 문학반이나 문학클럽, 문학써클도 아니고) '문학회'가 있었다. 어린 시절 가슴에 박힌 별의 영향이었는지 스르륵 그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나는 정말로 '독서에 탐닉'하고, '문학'을 고민하고, 시를 ('짓는' 것이 아니라) '쓰고', 소설을 '습작'하는 선배들을 만나게 되는데, 마음 속에 '문학'이라는 단어로 꽂힌 별 밖에는, 그 선배들에 비하면 읽은 것도 고민한 것도 쓴 것도 없다는 것을 하나의 깨달음으로 받아들이고 '쓰는 것'을 그만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문학'은 마침내 나에게 가본 적도 갈 능력도 없지만 언제나 그리운 먼 별과 같은 무엇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게 된 나의 마음은, 자라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 얻어 듣거나 겪어서 얻은 지식들로, (규모는 비할 바 아니겠지만) 우주가 팽창하듯 커졌고, 문학의 별도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졌다. 책들은 여전히 친근하고 애틋한 친구로서 손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려 애를 썼지만, 돌이켜 보면 20대에 도대체 무슨 책을 읽었는지, <토지>와 <태백산맥>, 그리고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제외하고는 기억나지 않는다. 몇 번의 연애에 실패하면서 마음 속의 뭔가를 꺼내어 쓰고 싶다는 욕구가 일 때도 있었으나, 그저 작은 물결, 몇 번 출렁이지도 않는 그런 물결에 불과했다. 그나마 병원에 들어간 후에는 '문학'이라는 단어가 내게 소중했던 시절은 전생이었을 것만 같이, 책들도 거의 숨막히는 일상의 도피처로서 찡그린 얼굴로 숨어드는 곳에 불과했다.
그런 시간이 또 10년 가까이 지나고, 2년 전부터 출퇴근 시간이 일정한, 그리고 퇴근 후 시간을 온전히 개인적인 일에 쓸 수 있는 직장에 안착했을 때, 제일 먼저 손이 간 것은 책이었다.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책에 대한 갈증이 또렷해지면서 무수한 책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고, 2년새 나는 읽은 것의 두 배 이상 되는 책을 사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읽고 사면서 아주 가끔은 나도 뭔가를 써보고 싶다는 욕구가 일렁, 했지만 그저 한 번 일렁, 하고는 다시 말끔해지는 물결 이상은 아니었다. 글쎄. 난 훌륭한 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훌륭한 소설들이 이미 이렇게나 많은데, 내가 더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이 책이 등장한다. 알라딘의 주문 내역을 뒤져보니 책을 사다 놓은지도 6개월이 지났다. 시간이 참 빠르기도 하다.
'노벨문학상'에 특별한 애착이 있는 건 아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에게 처음 그 단어를 들은 이후, 일상 생활에서 '노벨문학상'이란 '참 대단한 상'일 뿐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것을 알고 대한 첫 번째 작품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었는데, 이 소설을 읽은 계기도 노벨문학상보다는 '빌 클린턴(1992년에 미국대통령으로 당선된, 당시만 해도 젊고 잘생긴, 케네디와 비교되던 그이)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라는 기사 때문이었고, 그것도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노벨상을 수상하고 10년이나 지난 후에 읽은 것이다. 게다가 <백년 동안의 고독> 이후 도전한 노벨문학상 작가의 작품 중 성공한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노벨문학상이니까 읽어보자고 도전했다가 실패한 첫 번째는 토니 모리슨. 그녀의 작품은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갑자기 번역본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러면서 번역의 질들이 떨어지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도무지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 이후로는 '문학상 수상작이니까 일반적인 독자가 읽기엔 너무 심오할 것'이라는 선입견에 사로 잡혀 한참 시도하지도 않다가, '마술적 리얼리즘'의 작가라는 주제 사라마구를 만나게 된다. 주제 사라마구도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그의 <수도원의 비망록>은 즐겁게 읽었다. 그런데 지금은 '읽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게다가 <눈먼 자들의 도시>를 또 한 번에 읽어내지 못했다. 귄터 그라스는 노벨문학상 수상 훨씬 전부터 알고 있던 작가였지만 <양철 북>은 아마 세 번쯤 시도만 했을 것이다. 알베르 카뮈에 대해서는 머리로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지 호감을 느낀 적은 없었고, 오에 겐자부로, 가오 싱젠, 르 클레지오는 시도할 생각조차 갖지 않았다. 시詩라는 것은 번역에서 운율이 사라지기에 원문이 아니면 별로 소용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에게도 아예 관심이 없었다. 다만 비교적 최근의 오르한 파묵이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노벨문학상 수상 전부터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었고, 지금도 읽고 있는 작가들이긴 하다. 여하튼 그런데도 이 책을 읽으려고 한 것은, 내 마음 속의 먼 별의 단어 '노벨문학상'이 깜빡였기 때문일까?
소개된 열 명의 작가는 나름대로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가다운 쉽고 깊고 넓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르 클레지오는 '작가는 오로지 배고픈 사람을 위해 글을 쓰고자 하나, 먹을 것이 충분한 자들만이 자신의 존재를 깨달을 여유가 있다는 패러독스의 숲에서 문학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고민한다'고 대답한다. 오르한 파묵에게 작가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제2의 존재와 그 존재를 만들어낸 세상을 인내심을 가지고 오랜 세월 동안 노력하여 발견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어느 날엔가 우리가 쓴 것들이 읽히고 이해될 거라는,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의 낙관주의로 글을 쓴다고 말한다. 작품 활동에 대한 중국 정부의 억압으로 프랑스에 살면서 중국어로 글을 쓰는 가오 싱젠은 '문학은 그 자체로 존재의 이유를 지켜나가야지 정치적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작가는 오직 개인으로서, 보상을 바라지 않고 쓰고자 하는 바를 쓰며, 증인의 위치에서 진실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귄터 그라스는 '작가들이란 늘 높은 의자 위에서 거만을 떠는 권력자들의 수프에 기꺼이, 그리고 신중하게 침을 뱉게 되어 있는', '과거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고, 너무 빨리 아문 상처들을 열어젖히고, 입구를 봉해놓은 지하실에서 시체를 발굴해내고, 금지된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금단의 음식을 먹어치우는 존재들'이라고 설명하고,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 비로소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는 주제 사라마구는 작품을 쓰면서 그 작품들의 인물들이 스승이 되어 자신의 생각과 인생이 어떻게 달라지고 다음 작품들을 쓰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가장 좋았던 글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연설이다. 그의 글은 그냥 수상 소감을 넘어서 유럽의 소위 지식인들에게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과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를 주문하는 정치적 선언서처럼 읽히기도 한다. 특히 초반에 압축해서 일러주는 라틴아메리카의 짧은 '역사'는 도무지 있었던 일 같지 않은데 '역사'인 마술적 사실주의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그외 폴란드의 시인 비수아바 심보르스카,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미국의 토니 모리슨, 보스니아의 이보 안드리치, 그리고 알베르 카뮈의 이야기와 고민도 대가인, 남보다 앞서 더 많이 더 깊이 고민한 것이 분명한 작가로서 '쓴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다르지만, 읽다 보면 관통하는 공통된 지혜를 걸러낼 수 있다. 그것은 작가란 기본적으로 언어를 다루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은 생존의 조건에 대한 한 개인의 깊은 고민으로부터 시작되며, 개인의 무지를 인정하고 모든 권위에 대해 질문하고 더 나아가 저항하는 것을 통해 약자의 편에, 결국 나와 같은 '인류'의 편에 서게 된다는 것으로 나는 읽었다.
결국 이 책을 집어들게 한 것은 어린 시절 꿈과 관련된 개인적으로 거창한 이유보다, 그저 문학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훌륭한 작품을 써내는 작가가 직접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나의 바램을 200% 이상 채워 주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대가들이 '왜 쓰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글쓰기에 관해서라면 아직 수정란도 되지 못한 나라는 것을 깨달은 동시에 '쓰고 싶다'는 욕구를 강렬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여고 시절, 비유를 하자면 대가들에 비해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둥 마는 둥 하는 단계에 있었을 '문학 소녀 선배'들에게조차 확 주눅 들어, 영리한 척 손 들었던 나였는데 말이다. 거기다가 무턱대고 어려울 것이니까 패스하려 했던 르 클레지오, 오에 겐자부로, 가오 싱젠은 물론, 아마도 다른 욕심들과 어렸기 때문에 포기했을 토니 모리슨과 귄터 그라스, 안타깝게도 잊어버린 주제 사라마구까지 새롭게 또는 다시 읽어야 할 책들의 리스트는 즐겁게 받아 안은 덤이라고나 할까. 오래 산다는 것이 늙는다는 것과 동의어로 여겨져 별로 탐탁치 않았는데 이 많은 책들을 다 읽을 때까지는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을 정도로. 읽는 내내 빨리 이 책을 읽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는 조바심을 느낄 정도로.
옥의 티라면 책 맨 앞에 붙은 편집자의 말. "한국문학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라니. 아니 이 책이 무슨 '노벨문학상, 이렇게 하면 탈 수 있다 - 속성코스' 같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노벨문학상'을 목표로 글을 쓴다는 것이 있을 법한 일인가. 모르겠다.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에 공공연한 위원회의 입맛이라는 게 있어서 대충 그해의 수상작을 점칠 수 있는 것처럼, 노벨문학상 선정 위원회에도 입맛이라는 게 있는지. 그런데 노벨문학상은 어떤 '작품'에 수상하는 상이 아니다. '작가'에게, 그가 그때까지 발표한 작품 세계와 그 영향을 인정하는 의미의 상이다. 그런데 어찌 '노벨문학상 수상 전략'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문학상 뿐 아니라 노벨상의 모든 부문이 그러하지 않나. 어떤 업적이 이후 세상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는 상으로 과학 부문의 상은 대체로 수십 년 전의 연구 업적에 대해 수여된다. 이런 상에 어떻게 '전략'과 '전술'로 덤빌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 중에 정말 웃긴 책이 있었다. 이름하여 <내 아이 노벨상 수상자로 키우기: 문학상>. 책 말미에 논술 + 심화학습장까지 붙여서, 읽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지식으로 자리매김 하게끔까지 신경을 쓴 책이라고 한다. '상'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지 '시험'의 틀에 맞추어 전략과 전술을 내는 사람들의 심리는 물론 능력까지 대단하고도 한심하다.
결론. 올해에 단 한 권의 책을 읽었다면 감히 이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올해 말까지 50권은 더 읽는게 목표지만). 나처럼 한때 '글쓰기'의 로망을 품었던 사람들에게는 물론, 작가의 꿈을 가지고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문학'이라는 단어에 경외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 아니 대가들의 진솔하고 현명한 삶의 이야기란 언제 어느 때나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므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꼭 읽어 보세요. 문학동네와 외대 외국문학연구소에서는 다른 작가들의 수상연설집도 더 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부문 수상자들의 연설도 나오면 더욱 더 좋겠고.www.nobelprize.org 에서 영어연설문을 읽을 수 있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