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1권을 다 읽긴 했다. 결론은 ’아 내가 그동안 괜찮은 판타지를 꽤 읽긴 했구나.’ 그러니까 이 책은 영 아닌 판타지. <부서진 대지>의 작가도 첫 책은 어쩔 수가 없었군 (즉 난데없는 천재는 아니었군). 세계는 진부한데 자잘한 설명과 제약이 너무 많다. 인물들은 너무 도식적이다 (장르소설적으로는 규칙을 잘 따르고 있는 건가 모르겠다만).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순정만화적 감성! 아니 그보다는 좀더 높은 연령대를 겨냥하고 있으니 할리퀸적 감성이랄까. 읽는 내내 (그림이라면 선 하나도 제대로 그을 줄 모르지만) 순정만화 그림체의 장면이 저절로 눈 앞에 떠올랐다. 달리 보면 그만큼 묘사가 생생했다는 건가?!우리 세대의 전설적인 순정만화로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란 작품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처럼 사랑하고 싸우고 질투하고 배신하고 여하간 인간과 다름없이 온갖 희노애락을 느끼는 신들의 세계와 인간들의 세계가 얽히는 와중에, 인간 대표라 할 수 있는 넷째 딸 레 샤르휘나(“샤리”)와 신 대표라 할 수 있을 전쟁의 신이자 샤리의 ’운명의 상대(!)’인 에일레스가 주인공인데…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 책의 두 주인공 예이네와 나하도스와 아주아주 비슷하다. <아르미안>이 30년 먼저 나옴.한편으로는 <트와잇라잇>류의 영어덜트 로맨스 판타지이기도 하다. (남들이 보기엔) 굳센 의지 외에 별것 없는 여주인공과 엄청난 힘과 그만큼 커다란 제약을 가진 어두운 남자 주인공이 서로를 구원하는…(으… 이제는 생각만 해도 으웨엑스러운…)난 왜 이런 책을 욕하면서 읽고, 읽고 나서 욕하는 글까지 쓰느라 정성을 버리는 걸까. 이게 다 <부서진 대지>가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다. 그 작가를 차마 이렇게 버릴 수는 없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