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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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 개면서 심심해서 처음으로 전자책을 TTS로 들어봤다. 되도록 아무 생각 없이 읽을 / 들을 수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띄엄띄엄 보다가 완전한 내 취향은 아니라서 한 번에 못 읽은 <보건교사 안은영>을 선택했는데 오, 생각보다 들을 만했다. (아마도) 기계음이 의문문의 끝부분만 살짝 올릴 뿐 시종일관 비슷한 솔 톤으로 따박따박 읽어준다. 오디오북은 들어본 적이 없고 들어볼 생각도 없는 게, 혹시나 낭독자가 성우처럼 자기 감정을 넣어 연기를 하면 어쩌나 싶기 때문이다. 앞으론 출근길이나 아침에 청소할 때 음악을 듣는 대신 책을 들을까 보다.

그건 그렇고, 처음부터 끝까지 젤리들이 튀어다니는 단편은 아니었다. 특히 오늘 아침 이<가로등 아래 김강선>을 듣다가 찔끔 울 뻔했다. 나는 그런 상상은 많이 한다: 몸의 숨이 끊어지고 나서 영혼이 아직 하늘이나 땅속으로 가지 않고 이 세상에 있을 때(그러니까 사십구제 전 같은 기간에) 늘 마음 속에 담아두었지만 실제로 만난지는 오래된 사람들을 찾아가 보는 것. 무슨 할 말이 있다기보다(정말 할 말이 있다면 대부분 미안해, 겠지. 고마와, 보다 미안해, 가 더 많은 삶이란...) 그냥 정말 그저 궁금해서. 대부분은 안은영처럼 귀신을 볼 능력이 없으니 내가 가도 알아채지 못하겠지. 하지만 죽은 친구가 나를 찾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는 안은영처럼 귀신을 보는 능력이 없으니 나를 찾을 이유는 없어 싶다가도, 내가 다른 사람을 그저 궁금해하는 것처럼 나를 그저 궁금해서 찾아올 수 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어쨌든 나는 안은영처럼 귀신을 보는 능력이 없으니까.

정말 결정적인 건, 소설을 읽을 때나 이런 생각들을 해보는 거지 나는 몸과 분리될 수 있는 정신, 의식, 영혼, 등등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거다. 내 몸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걸 아니까 이런 소설들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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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었다! 문득 <공중그네>의 이라부 선생과 이라부 식 힐링이 떠오른다. 성격이 기득권이라고 뻔뻔스럽고 무례함을 자랑으로 여기는 문어같은 이라부 선생보다 천성이 수줍고 수수하지만 하필 귀신 보는 능력이 있어서 사서 고생인 안은영 선생이 칠백오십이 배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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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인 사고였어. 넘어오는데 그대로 깔려 버렸어. 멍청한 말이지만, 나는 그런 상황이 생기면 언제나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피하기는 무슨.˝
은영은 문득 크레인 사고 뉴스를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되짚어 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크고 무거운 기계가 중심을 잃고 부러지고 휘어지고 떨어뜨리고 덮치는 일이 흔하단 말인가. 새삼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이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싸서 그래. 사람보다 크레인이. 그래서 낡은 크레인을 계속 쓰는 거야. 검사를 하긴 하는데 무조건 통과더라.˝
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값없게 느껴졌다.
˝고층부 작업하려고 최대한 늘였을 때 꺾였는데, 순식간이었어. 그때 날 그 아래서 끌어냈던 동료들이 오래 찬 바닥에 앉아서 보상금을 받아 줬어. 누나들은 그냥 포기하고 장례 치르려고 했는데 고마웠지. 큰누나가 염할 때 삼베 안 입히고 양복 입히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더라. 양복 한 벌 못해 줬다고 우는데 내가 언제 양복이 필요했다고.˝
- p191. <가로등 아래 김강선>

선한 규칙도, 다른 것보다 위에 두는 가치도 없이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 특유의 탁함을 은영은 견디기 어려웠다.
- p210. <전학생 옴>

일을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거절도 할 줄 아셔야 해요. 과도한 업무도 번거로운 마음도거절할 줄 모르면 제가 아무리 털어 봤자 또 쌓일 거예요. 노 하고 단호하게 속으로라도 해 보세요.
-p213. <전학생 옴>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저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인표가 은영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크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인표가 아니라 은영 스스로가 말한 것 같기도 했다. 거짓말이어서,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 p264. <돌풍 속에서 우리 둘이 안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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