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아이는 서러운 울음을 터뜨린다.
애들이 한 판 하고선, 나랑은 아무도 팀 안 하려고 하고, 경헌이랑 팀 한다고, 걔는 잘하니까. - P203

좀 못하면 어때, 못할 수도 있지. 게임이 그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너 잘하는 거 많잖아. 네가 잘하는 거 하고 놀자고해봐. 애들 초대해서 다 같이 거실에서 놀래? 엄마가 맛있는 것도해줄게. - P203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앙헬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쿠션에 기대어 앉아 여자의발음에 귀기울이며 베드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앙헬은 테이블위에 올려놓은 옥수수맛 크래커를 반으로 부수고 또 반으로 부수었다. - P79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눈먼 자와 다리저는 자를 고치고 물위를 걷는 기적을 행했다. 죽은 아이와 병든하인을 살리고 손이 오그라든 자의 손을 펴고 십이 년간 피 흘리던 여자의 피를 멈추게 했다. 남자는 길에서 먹고 때론 오래 금식하며 새벽에 일어나기도했다. - P77

이혼의 여파인지 당분간 일은 쉴 생각이라며 연수는 글쓰기를해보려 한다고 수줍게 말했다.
"에세이나 시 같은 거, 문화센터에서 하는 수업 있잖아. 거기다니고 있어. 좀 웃기지?" - P51

이후 이 년은 만옥에게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 P177

몸이 불편한 승석을 챙기느라 만옥은 순미가 하는 말도 찬호가하는 말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두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열 명 남짓한 하객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도 살피지 못했다. - P173

정오가 가까워지면 세상은 자명하게 반으로 나뉜다. 혼자 먹는사람과 같이 먹는 사람. - P9

우리는 별 의미 없지만 묘하게 평등한 분위기로 잡담을 나누었다. 묘하다고 한 이유는 연구소의 계급 체계가 매우 철저했기 때문이다. 나는 계약직 행정사무보조였고, 으레 내 몫으로 남곤 하는 복사기와 물티슈와 커피 필터를 앞에 두고 종종 불가촉천민이된다는 건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겼다. - P10

"스물한 살짜리를 유혹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에요."
문득 그가 중얼거렸다. - P13

"스물한 살요?"
흥미로우니 계속 말해보라는 얼굴로 그가 서 있는 쪽을 향해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되물었을 뿐인데 그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얼마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해하는쪽이 나는 아니었다. - P13

빌어먹을 험버트 험버트도 서른일곱살이었지. - P15

어떤 경우라도 열일곱에서 스물세 살, 스물네 살까지가 우리삶에서 가장 추한 시절이라는 걸 머릿속에 담아두어라…………추한 시절. - P16

그가 강의실에 들어서던 장면을 여전히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개강 첫날, 그는 십오 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기세 좋게 문을확 열어젖히긴 했지만 그건 자신감 있는 행동이라기보다는 문이너무 가벼워서였고, 그는 입구에 덩그러니 선 채로 강의실 안에사람들이 너무 많아 당황한 듯 잠시 멈춰 있다가, 밖으로 도로 나가 강의실 호수를 확인하고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 P17

커다란 담요 같은 외투를 몸에 두르고 다녔다. 남학생이고 여학생이고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그에게 매혹되었다. 지적이고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키 큰 남자를 싫어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조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 P18

강릉에서 태어난 순수 한국인인 장 피에르를 장 피에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사람은 연수였다. - P21

나이도 열 살이나 차이 나잖아. (고다르에게는 각각 ‘안나‘와 ‘안느‘라는 이름을 가진 두 명의 배우자가 있었고, 고다르와 결혼했을 때 그들은 모두 스무 살이었다. 스무 살에대한 꾸준한 취향.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사랑이란 어떤 시기로의지속적인 퇴행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이어서 연수가 고다르화를 욕했다. - P22

그러니깐 우린 저 사람처럼 곱게 미칠 수 없다고, - P24

어느 여름 한적한 바닷가에서, 그녀는 애인이 하나 있었다고말했다. 나이가 많고 유명한 남자라고 했다. - P27

나는 아무 힘이 없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 사람이 나는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라고 말했어. 그런 상태를오래도록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고귀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사람은 말이지, 불가능한 걸 꿈꾸는 대신 잘할 수 있는 것을 해야돼. 근데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야. 가끔씩 나는 뭔가 다른 게되고 싶거든. 뭔가 내가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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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남편이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더이상 남편의 제사상을 차리지 않기로 했다. 제사 전날 밤이면 남편은 항상 나를 찾아왔다 지난 십 년 동안 그랬다. 꿈은 늘 똑같았다. - P115

나를 발견한 청년은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고 했다. 원래는 밤을 새울 예정이었는데, 빗소리가 들렸고그 소리를 가만히 듣다보니 헤어진여자친구가 생각났다. - P104

구급대원이 내 입에 귀를 가까이 대고 물었다. "뭐라고요?
방금 뭐라 말했나요?"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추워요." - P59

다시 그 소리를 듣게 된 것은 서너 달이 지난 뒤였다. 생일날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을 위한 패키지 상품을 출시했는데 실패하고말았다. 한 달 주문이 일곱 건밖에 되지 않았다. 실패 원인을 분석해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정수리 주변으로 동그랗게 탈모가 진행되어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 P43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일곱 번이나 틀렸다. 태풍이 온다 그래서 나는 소파의 위치까지 바꾸었다. 거실 창 바로 앞으로 아로마 향초도 하나 사두었다. 소파에 앉아 비를 실컷 구경할 마음으로. 그랬는데 태풍은 오지 않았다. - P27

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기 위해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 주인공의 이름과 그 배우의 이름을 노트에 적어가면서. 나는 사주에 맞춰 이름을 짓고 싶지 않았다. 장손이라며 작명소에 쌀 두 가마니값을 주고 이름을 지었던 병철오빠의 삶도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생명선이 길었던 병준 오빠는 마흔을 넘기지 못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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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틀어박혀 읽은 많은 자료 속에서 가장 빈번히 발견한단어는 아마도 오래전 ‘윤리‘가 강조했던 것처럼 ‘가난‘이나 ‘희색‘ ‘애국‘ 같은 말일 것이다. - P73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을 정도의 아름다움이지?" - P74

1. 선자 이모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을 탐문하는 한편 내가 선자 이모의 일기를 읽으며 첫사랑을 찾는 데 필요한 단서를 찾아내기2. 누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물으면 모든 것은 내가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1 일이라고 말하기3. 매주 금요일 방과후에 만나서 알게 된 정보들을 공유하기 - P79

"엄마, 만약에 사람들이 꼭 한번 다시 만나고픈 사람을 누구든딱 한 명만 만날 수 있게 된다면 보통은 첫사랑을 가장 보고 싶어할까?" - P81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찾기 위해 독일행을 결심했던 마리아이모는 모은 월급으로 자동차를 사서 휴가 때마다 미니스커트를입고 유럽 전역을 누볐다. 이모가 산 첫 자동차는 빨간색 중고 폭스바겐 비틀이었다. - P91

‘게다가 엄마는 나한테 관심이 없거든. 엄마가 관심 있는 건 엄마 자신뿐이야."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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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경험이라는 자양분 - P127

좋아하면 닮느냐고? 많이 읽으면 아무래도 문체에영향받는 부분이 있다. 애초에 삶의 가치관 부분에서 비슷한 점이 많아서 좋아하게 된 것도 있으니. 그래서 따라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다. - P126

근본적으로는 모두가 저마다 하나의엄연한 직업이자 프로페셔널의 세계인 것이다. 특정 글의 장르나 방식이 비하받을 이유는 없다. 타인의 평가나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그 일을 할 필요는 없다. - P139

나이와 감정.
나이가 들면 마음이 흔들리거나 설레거나 떨리거나감동할 일이 점점 없어질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서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자제하려고 한다. - P39

나는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은 사는 내내 계속좋아했던 것 같다. 어떤 특정 감정들, 어떤 삶의 방식, 어떤 결과 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자극을 받을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 크게 영향받지는 않았다. - P41

‘개인이 가장 중요한지‘라는 질문은 항간에 많이 나오는 ‘내가 가장 중요하다‘, ‘나를 사랑하자‘라는 자존감을 위한 논리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많은 부분타당한 지점들이 있으나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일‘은내가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 내가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애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의 마음을 상상해보는 일이 결과적으로 갈등을 풀어주는 계기가 되기도한다. - P57

고정 연재물로 글을 쓰면 하나의 주제 아래 꾸준히연속적으로 글을 써나갈 수 있는 실력을 보여줄 수 있다. - P97

한 문학평론가는 나를 두고 ‘한국에서 정사장면을 가장 잘 쓰는 작가‘라고 평가해준 적이 있는데 이것은 차별적 우위라고 할 수 있을까.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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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궁금하다. 가령 청중 앞에서기 전 긴장감 같은 것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불안이라는 것은 내가 그것을 잘해낼 수 있을까에대한 자기 의심인데, 그 의심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 P66

. 불안의 궁극적인 치료는 그냥 직면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 P67

다른 직업에 위엄을 실어주는 훈장이나 명성에 필요한 굿즈처럼 간주되는 풍경은 다소 외면하고 싶다. 나무라는 조물주의 작품을 몹시 사랑하는 나로서는 나무에게 미안하고 싶지 않다. - P73

에세이와 소설을 쓸 때 내가좋아하는 글의 톤은 ‘건조함’인데 그것은 격한 감정을 속으로 절제한다는 것을 뜻한다. 폭발적인 감정을 느끼면서도 상대를 위해 그것을 가슴 한편에 억누르는 먹먹한마음을 귀하게 생각한다. - P92

새로운 일에 도전하다 보면 시간은 참 잘 흐른다. - P91

. ‘결혼’이라는 주제가 그런 것 아니겠는가. 무거우면서도 가볍고, 출구 없는 터널 같아 좌절하다가도 저만치서 한줄기 빛이 쏟아지는. - P87

참, 이 시기에 나는 처음으로 ‘작가‘라는 호칭으로불리게 되었다. 책을 열 권 정도 쓴 다음에야. - P85

. 뭐든지 열심히 해두면 나쁘지는 않구나, 라는 생각을한참 후에 하게 되었다. - P78

‘가까스로’라고 쓴 이유는 문예지나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지 않고는 (등단을 해도 어려운 측면은 있지만) 이름이 알려진 연예인 정도나 가능할까, 소설을 내주는 출판사를 찾는 일은 당시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 P79

들어오는 일은 가급적 해보려고 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서 나와 맞지 않으면 단호하게 하지 않고, 조금더디더라도 내가 보여지고 싶은 방식으로 보여질 수 있고, 내가 이해받고 싶은 방식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독자를 조금씩 늘려가는 방향. 현재로서는 나를 그렇게 운영해나가려고 한다. - P96

지속적으로 글과 책을 쓸 기회가 있었던 것은 같은 이야기를 해도 조금 다른 관점을 피력하거나 남들은 꺼려할 만한 솔직한 이야기를 서슴없이했기 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 P99

작가업은 정직하고 야멸차다. 편법과 샛길이 불가능한업종이다. 좀 더 나은 글을 쓰려고 애쓰고, 딱 그만큼의고통을 담보로 한다. - P119

그러니까 내 마음이 약간 애매하다 싶을 때는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치는 것이 좋겠다. 책 같은 것은 쓰지 않고도 이 세상과 나 자신한테 이로울 수 있는 방법은 부지기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어도 글을 쓰고 싶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이런 절실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나로서도 말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가늘고 길게 망해보기로 한다. - P121

옆에서 지켜봐주고 참견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시점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도록, ‘아마추어‘로 안주하지않도록 자극을 줄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난 직장인이니까 이 정도면 훌륭하지‘라며 여지를 주지 않고 ‘저자‘로서 가혹함의 시험대에 서는 것. 그러면 누가 옆에서말리지 않더라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글을 통해 무엇을 진정으로 구하고 있었는지를. - P132

• 검토하는 데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 (당신은 우선순.
위가 아니다.)• 내가 전화로 내용을 간단히 설명해주겠다. (원고를보면 다 안다.)나는 아는 사람도 많고 SNS 팔로워 수도 많다.(그래서 뭐? 그들이 책을 다 사줄 거라고 정말 생각하는가?)내 주변 사람들이 책 몇 부를 사줄 것이다. (불필요한장담이나 자랑은 미끼 같아 기분이 나쁘다.)다른 출판사와 비교하는 말. (예: 마케팅은 어떻게 진행하실 예정인가요.) - P135

일을 적지 않게 하기도 했고, 재밌어한 부분도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쓰는 일 위주로 하고 싶어진다. 차분하고 세심하게, 공을 들여 쓰고 싶다. 비록 쓰는 일이 세상 최고로 효율이 나쁜 일이라고 해도.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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