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가 남아 있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칠십대의 어느 날, 할아버지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충동적으로 영정 사진을 찍으러 갔다. 술을 마셔서 볼이 붉어진 채로, 이런 일이 재미있다는 듯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 P117

잊어버려도 괜찮구다. 시가가 말했다. 또 그러는 뒤에사실 우리는 대로 잊어야 하지 않는건 중요한부러라도 그래야 해 - P119

너무도 많은 사람이 아픈 사람에게 원인을 돌리면서 쉽게균열을 봉합한다. 아픈 사람에게 암을 부르는 성격이 있다고믿을 때, 아픈 사람 이외의 모두에게 세계는 덜 취약하고 덜위험해진다. 아픈 사람조차 병이 그냥 생겼다기보다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해서 생겼다고 믿기도 한다. 불확실성보다는 죄책감이 더 편할 수도 있는 것이다." - P123

나는 빗길을 운전하면서 시간의 자비로움을 떠올렸다. 시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가능하게 한다. 축적된 경험으로 나를 일깨우기도 하고 지난 일로부 거리감을 확보하여 전체를 조망하게 하기도 한다. 내가 바꿀 수 없는 부분을 수용하게도 하고 망각이라는 진통제를 주입해주는 관대한 존재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시간을 거스르면서 억지를 부리는 일이 어리석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하기도 한다. - P127

어떤 강아지는 자꾸만 뒤를 돌아 주인을 확인한다는 것도, 어떤 어린아이는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자신이 느끼는기쁨을 감추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 P133

살림조합의 공동 창립자 추혜인은 대학교 1학년 때 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 활동을 하다가 "성폭력 피해자의 입장에서 진료해줄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진로를 변경하여 의과대학에 진학한다. 대학 시절 여성주의 운동에 몸담으며 여성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의료협동조합을 계획하고 2012년 실행에 옮긴다. 그 과정에 대한 가슴 풍클한 이야기는 그녀의 책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에서 읽을수 있다. - P151

"혼자 살아서 외롭지 않아?"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내가 외롭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는 외롭다. 하지만 혼자 살아서 외로운 건 아니다. 나는 타인과 함께 살아도 더 깊이 외로울 수 있다는 걸 안다. 괴로움이 더해진 외로움은 비참하기까지하다는 것도. 적어도 지금 나의 외로움에는 비참함이 없다. - P156

나는 계속 거울을 봤다. 눈 수술은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고치고 나니 코도 고치고 싶었다. 그다음은..... 그다음은......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 P170

더이상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고 ‘못생겼다는 느낌‘을 받지않는다. 그렇다고 ‘예쁘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아니다. 거울 속에는 그저 한 사람이 있다. 사십 년의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한 사람이. 나는 이제 그 사람이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지난 시간과 노력을 인정하고도 싶다. - P179

은희와 내가 요구받았던 착함은 수동성이었던 것 같다. 누가 때려도, 부당하게 대해도, 맞서지 말고 싸우지 말고 참고삭이며 감정이나 생각을 ‘거칠게‘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가 ‘착함‘이라는 일종의 규율로 여자아이들에게 강요됐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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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무를 품고 있지 않은 씨앗은 없다. - P54

「해는 어떻게 뜨는가」와 「선고」는 제임스 조지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읽다가, 「재두루미」는 설날겨울철새를 구경하려고 민통선 안으로 들어간 한지인의 경험담을 듣다가 구상하였다. - P61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떠돌아다니는 것들을 떠돌아다니게 내버려두지 말고 붙잡아야 한다. - P62

일상이나 현실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
말하자면 당신만의 시각, 당신의 욕망이나 해석. - P64

무엇이 보이느냐(무엇이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무엇에 의미를 부여하는지)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만이 글로 표현될 수 있기때문이다. - P65

호수라는 우회로를 통해 목적지에 느리게 도달하게 하는 이 지연 효과가 사용 설명서나 신문 기사와똑같은 문자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 문장들을 문학으로 만든다. 은유, 돌아서 가기가 없으면 문학이 없다. - P72

신비주의자가 되지 말라. 신비주의자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뛰어넘으려고 한다. 엑스터시든 니르바나든 홀리지 말라.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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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앞에서는 나의 여섯번째 책이자 첫번째 에세이집이다. 원고를 묶으면서 처음 책을 냈을 때처럼 기분좋은 떨림과긴장을 느낀다. - P9

그때의 나는 내가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비밀스러운갈망을 철저히 감추고 덮어야 한다고 믿었다. 종이 위에 쓰지않는 한 그런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를 속일 수 있었다.
쓰지 않는 한 나에게 얼룩과 그림자가 없다고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쓰는 일을 멈출 수 없었고, 종이 위에서는 나를속이기가 어려웠다. 내게 존재하는 더럽고 자랑스럽지 않은감정과 생각이 나는 부끄러웠다. - P12

그때 왜 그렇게까지 소설 생각에 몰두했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오랜 시간 눌러왔던 깊은 욕구가 내 의식에서 인정받자마자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던 걸까. 첫 책의작가의 말에 쓴 대로 이 일을 포기한다는 생각만으로 울음이터져나오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단어 말고는 그 상태를 설명할 언어가 없을 것 같다. 그러는 동안 공모전에 응모했지만 예심도 통과하지 못하고 떨어졌다. - P35

"나는 차가운 모래 속에 두 손을 넣고 검게 빛나는 바다를바라본다. 우주의 가장자리 같다." - P36

나를 추동하고 나아가게 하는 내 안의 이야기. 내가 선택할수 없는 삶의 방식, 쓰지 않으면약해지고 마는 나외존재. 그 모든 것이 나를 다시 앞에 서게 한다.

내가 결핍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걸 밝히면서 역설적으로 그문제로부터 일정 부분 자유로워졌다고 느꼈다. 예전에는 그런이야기를 할 용기가 없었다. 누군가 내 결핍을 알아챌까봐 전전긍긍했고 나를 결핍이 많은 사람으로 평가할까봐 그렇지 않은척 애썼다. ‘애정 결핍인가봐‘ 같은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경멸당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결핍이라는 건내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없으며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느낌보다 내게더 고통스러운 건 없었다. - P63

아프면 사람의 마음은 외로움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아플때면 어쩔 수 없이 아픈 부분을 의식하게 된다. 만성적인 위경련을 겪는 사람은 위를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다. 무릎이 아픈사람은 무릎을, 마음이 아픈 사람은 마음을 의식한다. 아프지않은 사람은 무릎이나 마음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순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데도. - P81

심지어 누군가는 내 목소리를 들어주고 있다. 이삶에서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 이축복 안에서 내 삶은 더이상 벌이나 짐이 아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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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작가다.

위력적인 매체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여전히 소설과 글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친연의 정을 느낍니다. 이 책의 어떤 문장이 누군가의 창작 의욕을 불러일으킨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 P8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는 바둑 세계의 격언을 인용했습니다. "정석을 익혀라. 그리고 잊어버려라‘가 그것입니다. 그 단락의 끝에 있는 문장을 여기로 끌어와 깃발처럼 꽂아두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의 내용도 잊어버려야 한다. 잊어버리고 소설을 써야 한다."
2026년 봄이승우 - P9

읽은 사람만이 쓴다.
잘 읽은 사람이 잘 쓴다.

그런데 꼭 독이 묻어 있어야 했을까?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책이 곧 독이라는비유를 읽는다.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책은 왕을죽인다. 이야기의 부재가 죽음인 것이다. 삶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진실이듯 이야기가 삶을 만드는 것 또한 진실이다. - P29

독자들은 어떤 작품에 대해 자전적이지 않느냐고묻는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모든 소설은 궁극적으로자전적이다. 작가는 여러 권의 책을 통해 한 편의 자서전을 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작가다. - P29

소설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이다.
이미지가 아니라 형상이다. - P43

그러니까 소설을 쓰려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거울이 이 세상에 대해 어떤 불만과 의혹, 어떤 욕망과의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소설은, 어떻게 말하든 소설을 쓰는 사람의 세계 해석이고, 그 해석의 뿌리는 그의 욕망과 의도이기 때문이다. - P46

기억은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을 망라한 과거의 모든 유의미한 경험의 집합이다. 그러나 기억은 단순한 과거 경험의 퇴적이 아니라 편집된 과거다. 편집의 과정에는 잘라내기와 붙여 쓰기와 축소와 과장과 오려 붙이기가 포함되어 있다. 치명적인 기억은 과장되었을 수도 있고 잘라내졌을 수도 있다. 다른 맥락에 붙어 있을 수도 있다. 때로는 드러내기 두려울 수도 있다. 그것은 말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말할 때, 소설로 쓸 때신중해지지 않을 사람은 없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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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우표 박물관은 신주쿠역에서 전철로 세 정거장을 가면 나오는 메지로역 근처에 있다. 나는 메지로역 바로 한 정거장 전인 다카타노바바역에서 내려15분 정도 걷는 길을 선호한다. 참고로 다카타노바바역은 아톰을 만든 회사가 있는 곳으로, 작가가 아톰의고향으로 설정한 장소이기도 하다. - P102

그곳에서 일하며 나는 괜찮은 어른으로 살아가는쪽을 택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나 오후에 잠깐 졸린정신을 환기하러 온 근처 직장인들과 퇴근 후 스스로를 돌보러 온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집과 회사 사이의제3의 공간을 지키고 있다는 묘한 자부심이 생겼다. - P122

この胸のリズムを信じてぼくらは歩くただそんだけ.
내 마음의 리듬을 믿고 우리는 걷는다.
단지 그뿐. - P125

. 모든 게 예상보다 좋았다. 마.
치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던 음악을 우연히 알게 되어 ‘이걸 왜 지금까지 안 들었지?‘ 하며 남몰래 듣는 기분이었다. - P126

첫 줄의 가사가 나오는 <Walking In The Rhythm>에는이런 가사가 있다.
걷는 속도를 늦추고 몇 가지 소원을 믿으며차가운 이 길을 노래하듯 걷고 싶어. - P127

한 가지에서 벚꽃이 세 송이 이상 피면 공식 개화를 선언한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일본은 정말 콘텐츠가 끊이지 않는 나라라는 생각을 했다. - P134

매일의 날들은 대체로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당연하게 내일을 약속하고 먼 미래를 계획하며 비슷한 심박수를 유지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이토록 불완전하고 당장 한 시간 뒤를 예측할 수 없는 매일을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무슨 확신으로 사는가 싶어 희한한 감탄이 나올 때가 있다. 그 감탄은 비행기표를끊을 때 육성으로 내뱉어지기도 한다. - P139

나와는 상관없는 내일의 날씨. 여기는 오늘처럼아침엔 날이 맑다가 저녁에는 비가 오는구나. 그 저녁의 모습을 나는 영영 알 수 없다. 화면을 보다 까무룩잠이 들면 어느새 푸른 새벽 사이로 동이 터온다. 내일보자며 인사를 하고 떠난 이들에게 돌아갈 시간이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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