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앞에서는 나의 여섯번째 책이자 첫번째 에세이집이다. 원고를 묶으면서 처음 책을 냈을 때처럼 기분좋은 떨림과긴장을 느낀다. - P9

그때의 나는 내가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비밀스러운갈망을 철저히 감추고 덮어야 한다고 믿었다. 종이 위에 쓰지않는 한 그런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를 속일 수 있었다.
쓰지 않는 한 나에게 얼룩과 그림자가 없다고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쓰는 일을 멈출 수 없었고, 종이 위에서는 나를속이기가 어려웠다. 내게 존재하는 더럽고 자랑스럽지 않은감정과 생각이 나는 부끄러웠다. - P12

그때 왜 그렇게까지 소설 생각에 몰두했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오랜 시간 눌러왔던 깊은 욕구가 내 의식에서 인정받자마자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던 걸까. 첫 책의작가의 말에 쓴 대로 이 일을 포기한다는 생각만으로 울음이터져나오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단어 말고는 그 상태를 설명할 언어가 없을 것 같다. 그러는 동안 공모전에 응모했지만 예심도 통과하지 못하고 떨어졌다. - P35

"나는 차가운 모래 속에 두 손을 넣고 검게 빛나는 바다를바라본다. 우주의 가장자리 같다." - P36

나를 추동하고 나아가게 하는 내 안의 이야기. 내가 선택할수 없는 삶의 방식, 쓰지 않으면약해지고 마는 나외존재. 그 모든 것이 나를 다시 앞에 서게 한다.

내가 결핍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걸 밝히면서 역설적으로 그문제로부터 일정 부분 자유로워졌다고 느꼈다. 예전에는 그런이야기를 할 용기가 없었다. 누군가 내 결핍을 알아챌까봐 전전긍긍했고 나를 결핍이 많은 사람으로 평가할까봐 그렇지 않은척 애썼다. ‘애정 결핍인가봐‘ 같은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경멸당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결핍이라는 건내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없으며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느낌보다 내게더 고통스러운 건 없었다. - P63

아프면 사람의 마음은 외로움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아플때면 어쩔 수 없이 아픈 부분을 의식하게 된다. 만성적인 위경련을 겪는 사람은 위를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다. 무릎이 아픈사람은 무릎을, 마음이 아픈 사람은 마음을 의식한다. 아프지않은 사람은 무릎이나 마음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순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데도. - P81

심지어 누군가는 내 목소리를 들어주고 있다. 이삶에서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 이축복 안에서 내 삶은 더이상 벌이나 짐이 아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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