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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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알지 못한다. 그 소녀의 이름을. 복잡한 버스 안에서 혹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 동네 슈퍼의 진열장에서 곁을 내주었을지 모를 그 소녀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세상이 더러워서 그녀가 더럽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모자라다. 세상이 각박해서 그녀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핑계는 처연하다. 그리고 세상이 이리도 힘든데 그 아이 얼굴을 들여다 볼 틈 조차 없었다고 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누군가는 그 소녀에게 욕정을 풀었고 누군가는 그 소녀의 작은 손에 쥐어진 지폐 몇 장을 희번득거리는 눈으로 탐했으리라. 그리고 그리하지 않은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곁은 내주는 일에도 망설이거나 무관심했으리라. 

보지에 자지를 넣으면 아기가 생긴다고 말하는 열 살 소녀의 위악은 감당하기 어려울정도로 불편했다. 만약 그녀가 양부모에 입양되어 성장했으면 <제리>의 그녀가 되었을까. 무시무시한 소설들이 출몰하는 여름이다. 

최진영의 소설 <당신 곁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이하 <당신>)은 은희경의 <새의 선물>과 천명관의 <고래>를 떠올리게 만드는 소녀 성장기다. 두들겨 맞고 자랐기에 진짜와 가짜를 탐하는 욕망이 커졌고 배고픔을 알았기에 쥐들이 싫었던 소녀. 풋내라고는 한 번도 나지 않았던 이 소녀는 이 년에서 언나로 저년에서 간나로 꼬마에서 유미로 불리며 떠돈다. 목적은 하나 진짜 엄마를 찾는 것이다. 다방과 식당과 폐가를 지나 각설이 패를 거쳐 불량 소녀의 온상에서 기거하는 소녀의 로드 무비는 참혹하리만큼 지독한 생존의 역사다.  

작가는 단 한 순간도 그녀에게 안온한 쉼터를 제공하지 못한다. 못한다라고 쓰는 것은 않는다 와는 다른 뉘앙스이기 때문이다. 소녀는 선택과 집중에 능하기 때문에 어떤 머무름에서도 찰나의 반짝임을, 머물러야 할 순간들을 발견해낸다. 그것이 생존을 목적으로, 살아남기만을 목표로 하는 이의 혜안이라면  소녀가 특출난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다방에서는 아름다움을, 식당에서는 너그러움을, 폐가에서는 외로움을 각설이 패에서는 어우러짐을 발견한 이 작은 여자 아이는 그러나 그 모든 공간에서 버림 받는다. 처음부터 버려졌기 때문에 버려지는 것은 무섭지 않다지만 마음을 내 준 이들의 곁을 버릴 때 마다 소녀는 아프게 성장한다. 작품 전체를 둘러 쌓고 있는 서늘한 기운, 바스락 타버릴 듯 바싹 마른 상황들은 챕터의 이별 장면에서는 뭉클하니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리고 그런 이별들을 통해서, 그리워 할 것들을 챙겨가며,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길 위의 인연들을 잊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는 소녀는 어른이 되어간다.  하지만 <당신>은 명백히 해피 엔딩을 거부하는 작품이다. <새의 선물>이 공간을 지나가는 시간들을 유머러스한 느낌표로 기억하였고 <고래>가 명백히 신화를 연상시키는 모성의 진화를 전설처럼 기록한 것에 비해 <당신>은 중성적인 것을 지나 무성적인 느낌의 독백으로 일관하는 일기에 가깝다. 소년이어도 무방한 소녀의 이야기에는 자조적인 유머도 모성의 신화도 거세되어 있다. 

지독하게 못된 소녀의 성장기를 지탱하는 것은 끈질기게 그녀의 뒤를 따라밟는 작가의 집중력이다. 팩 하니 돌아서 골목길로 사라져버릴 것 같은 소녀의 발자욱을 조심스레 되밟는 작가는 단단한 언어와 감상을 배제한 관찰력으로 이야기를 완성해나간다. 아무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 그녀의 지독한 여정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은 그 덕이다. 불편한 진실을 감추지 않고 불쾌한 진심을 숨기지 않는 까닭에 소녀는 눈물 흘리지 않지만 나는 몇 번 눈시울을 붉혔다. 

왜 모를까,라고 생각해 보았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소녀의 이름을 알고 싶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무시 당하지 않기 위해 말갛게 세수한 얼굴로 세상을 걸었으나 그녀는 스쳐갔으나 나는 지나쳤기 때문이다. 세상의 못된 기집애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천 원짜리 한 장을 떨어뜨리는 정도인 범인들에게 이 작품은 되묻는다. 쵸코파이 하나 쥐어주기 까지에도 온정이 필요하다고. 길 잃은 강아지도 쓰다듬어 온기가 통하기 전까지는 다가오지 않는 법이라고. 

차가운 세상, 그 세상의 온도를 질책하는 소설 하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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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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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라는 사람을 알고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무례할까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비야 누나는 분명 이렇게 말 할 것이다. ' 어머, 나한테 그런 모습이 있었다니!'하면서 박속같이 환한 치아를 드러내며 붉은 꽃 같이 해사한 웃음을 지으면서 기꺼이 귀를 열고 눈을 맞춰 누군가가 보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매우 흥미롭고 진지하게 반응할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멘토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철 없던 유년기를 지나, 뜨겁게 달궈진 청년기를 거쳐 서른이라는 조금은 무거워진 나이가 되고나니 너무나도 잘, 알게 된다. 매일같이 통화하는 단짝 친구는 아니지만, 사랑의 밀어를 주고 받는 곰살맞은 애인은 아니지만, 인생의 스승들은 뿌연 구름이 걷히면 드러나는 신록의 산처럼 올려다 볼 때마다 마음의 뼘을 넓혀주곤 하는 심정적으로 누구보다 가깝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한비야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은,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나의 멘토로 모시게 된 것은 벌써 10여년 전의 일이다. 꿈만 많고 표현은 넘치며, 정리는 서툴고 욕심은 성급했던 소년은 마치 노래하듯 이야기하고 통화하듯 다감하게 글을 쓰는 특별한 사람에게 매혹되었다. '바람의 딸'이라는 사람, 소년의 일상 곁에는 존재하지 않을 법한 특이한 경력을 걸어가는 사람은 그 치기 어린 소년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욕심이 아닌 열정, 소유가 아닌 경험, 그리고 진심과 진실을 향한 걸음. 걸어도 걸어도 멀게만 보일 미래라는 불안함을 나의 멘토는 고민하는 사이 헤쳐나가라고, 걱정하느니 부딪혀 실패하라고 꼬박 10년의 행적을 통해, 본인의 온 몸과 맘을 담은 시간들을 통해 보여 주었고 깨우쳐 주었다.   

그녀는 자꾸 본인의 평범한 외모라고 하지만 그녀의 웃는 모습은 이효리에 비할 바 못하게 청량하고, 본인 스스로 너무 크다고 말하는 호쾌한 목소리는 어느 정치가보다도 흡인력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글들은 참으로 잘 쓴 글들이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열정과 신념을 담아내는 문단들과 적절한 사고의 시간을 제공하는 행간들은 듬직하고 미덥다. 이번 책을 내면서 그녀는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다고 한다. 인터넷 포탈의 기사들은 발빠르게 그 소식을 전했고, 상상치 못한 악플들이 기사 밑에 달린 것을 보았다. '한비야는 깊이가 없다. 그녀의 책이 왜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안타까울 뿐이다. 평생가도 모를테니. 깊이라는 것을 강요받지 아니한 자의 넓이를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을테니. 짧은 비문으로 호전적이기만 한 악의를 표현한 그들에게 나는 굳이 한비야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싶지 않다. 분명 그들은 한비야라는 사람보다는 세상을 먼저 만나야 할테니 말이다. 키보드에서 전쟁을 치르는 이들에게, 세상 저 편의 '할례'로 고통받는 이들이 어디 가깝게 느껴지겠으며 굶어죽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눈망울이 보이기나 할까 해서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이번 책은 진심으로 한비야라는 사람의 일기장과도 같이 느껴진다. 그녀의 모든 책이 그랬지만 이번 책 역시도 마찬가지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밥공기에 눌러담듯 꾹꾹 눌러 담았고 부지런한 호흡들로 기록한 순간의 감정들을 고명 얹듯 빼놓지 않고 얹어 내었다. 정성스럽게 지켜온 시간들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자세는 강요된 깊이와는 다른 감동을 여전히 선사한다. 이 책을 읽으며 두 번 울었다. 첫 번째는 전화 통화로 멀리서 전해들었던 그녀의 병원기에서였다. 아무렇지 않게 쾌활하게 까지 느껴지는 활자들을 읽으면서 맘이 아프고, 목이 메여서 그리고 다행스럽고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 두 번째는 아프리카 여성들의 '할례'이야기를 읽으며 몸서리치는 공포와 나의 무지와 그리고 눈에 보이듯 생생하게 그려진 그 시공간의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에 뚝뚝 눈물을 흘려가며 울었다. 

범인들이 시도하지 못할 갈 지자의 행보를 척척 해내가는 그녀가 책을 쓰는 이유는, 끊임없이 강연을 하는 이유는 고작 인기나, 명성 때문만이 아님을 이 책 속에 있는 에피소드들은 정직하게 역설한다. 조심스럽게 세상의 구석들을 보듬고, 뜨거운 어조로 세상의 그늘들을 함께 보자는 그녀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것만 같은 경험. 너무 술술 읽혔던 이 전 책들과는 다르게 나는 몇 번은 망설이며, 어떤 에피소드들은 재차 읽으며   이 책을 읽어 내었다. 힘들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이제 스승의 가르침들을 실천해야한다는 당연한 의무감때문에서였다. 그녀가 나를 조금은 강하고 조금 더 씩씩한 어른으로 키웠듯 이제 그녀의 이야기들이 단순히 멋진 누군가의 경험으로 읽혀지는 것 이 아니어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얼까 고민하게 되었고 당장이라도 내가 해야할 일들이 어떤 것일까 반성하게 되었다. 책은 그래서 무거웠다. 무릎 위에 얹어 놓으니 책 속에 있던 수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동시대인들의 삶의 조각들이 유리처럼 파고 들었다. 그녀가 겪은 일들이 그저 멋있다고만, 그녀가 해냈던 수많은 선행들이 그저 감탄스럽다고만, 그녀가 지켜온 신념과 용기들이 그저 존경스럽다고만 하기엔 난 너무 많은 것을 그저 받기만 했다. 이 책의 수많은 에피소드들과 수첩에 옮겨 놓았던 문장들은 감히 이 편지에서는 적을 수가 없다. 그녀가 모르게, 세상이 기뻐할 움직음을 행하는 것만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덧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분주해진 며칠간이었다.  

많이 궁금했다. 그녀는 어떤 보약을 먹을까, 어떤 보약을 먹길래 저리도 늘, 한결같이 보리밭처럼 푸르고 능금처럼 반짝일까 하고. 그녀에게 보약은 주는 만큼 받는다는 '사랑'이라는 이름이었다. 조제되지 않은, 레시피가 없는 그 명약을 몇 수십년 기도하듯 복용했기에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게 아닐까. 이 책에서는 흙냄새와 땀냄새와 더불어 감히 어떤 로맨스 소설도 풍기기 힘들었던 사랑의 냄새가 난다. 내가 매혹되었던 그 향기가 사랑이었구나. 한비야 힘의 원천이 사랑이었구나 하는 커다란 안도에, 세상의 작고 아픈 이들 모두를 연인으로 택한 그녀의 무한한 욕심에 또 한 번 기립으로 박수를 보내고야 만다.   

소면을 리본으로 묶어, 작은 풋스크럽을 예쁜 상자에 넣어 그녀를 만나는 자리에서 선물하겠다. 어떤 길을 걸어도, 어떤 지도를 그려도 힘이 될 비빔국수의 원재료와 각질 없이 예쁜 두 발을 위해서. 밀봉하지 않고, 대신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사랑이라는 느낌표를 찍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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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둘리 2009-07-2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통해서도 큰 감동을 받았지만, 이 서평을 읽고나니 그 여운이 더해지는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실천이라는 그 말이 너무나 무거워서, 혹은 두려워서 저도 책을 읽고나서 글을 쓸 때 그 단어가 참 망설여진 듯 싶습니다.

방문자 2009-08-18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참, 잘 쓰셨습니다. 좋은 글 두 개를 만나고 갑니다.
 
김영하의 여행자 하이델베르크 김영하 여행자 1
김영하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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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간을 기억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공간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 어색한 웃음과 자연스럽지 못한 동작,모든 사진마다 등장하는 브이자 손짓.

혹은

그 순간 들었던 음악일 수도 있다. 낯선 기차 안에 앉아서 들었던 살랑이는 바람같던 멜로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노랫말, 그리고 낯선 거리를 고요히 울리던 목소리.

그리고 어떤 사람일 수도 있다. 어깨를 맞대고 언어보다는 눈으로 더 많은 대화를 나눴던 그 사람, 우연히 담뱃불을 빌리고 악수를 나눴던 사람, 한 순간 모든 감정을 송두리째 빼앗아 갈 정도로, 아무런 확신도 없지만 그저 그 뒤를 쫓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던 그 사람.

작가 김영하는 감각으로 공간을 기억해낸다. 손에 들려진 그립감 좋은 작은 카메라 한 대와, 불분명하게 시야를 넓히고 감각을 제어하는 눈동자, 그리고 이야기에 대한 근원적 욕망을 가지고 그가 만났던 사람, 만나고 싶었던 사람, 그 곳에 존재했던 사람, 혹은 그의 상상 속에서 탄생시킨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김영하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은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다. 단편에서 드러나는 예리한 생의 단면들을 포착하는 날카롭고 유머러스한 시선은 물론 <퀴즈쇼>나 <검은 꽃>등의 장편에서 느낄 수 있는 서사를 지탱하는 단단한 이야기의 매력은 단연 작가로서 김영하의 미덕이자 재능이다.

꽤 오래전 부터 그는 영화라는 매체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영화와 관련된 에세이 집을 두어권 발간했음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서 역할하면서 영화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했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지방의 여행기이자, 사진작가로서의 사진집, 실재와 허구를 뒤섞은 짧은 단편소설 그리고 카메라에 관한 에세이가 꼬리물듯 이어지는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삶과 죽음의 향기를 지닌 여행지에서 작가가 그려낸 단편은 수록된 사진들과 함께 기묘한 서정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미지의 한계를 고정하면서도 배반하는 작업이다. 평범한 컷들은 사연을 담고 자극적이거나 낭만적인 이야기는 겹겹이 쌓인 슬픔을 슬라이드 처럼 펼쳐보인다.  단편 소설의 꼬리를 무는 사진들은 길고 사연이 많은 엔딩크레딧 처럼 감상 후의 질감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흑백과 컬러로 펼쳐지는 공간들은 강렬한 연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반전같이 느껴지는 카메라에 관한 에세이는 디브이디의 코멘터리를 보는 듯 가장 사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객관적이다. 이 책은 가볍게 읽기 시작하면 힘이 들어가고 책장을 덮는 순간 열게 되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마치 짧고 강렬한 단편 영화를 보았을 경우의 감상과도 같다. 기억의 순간들을 빠르고 강렬하게 재탐색하려는 욕망처럼 김영하의 여행자는 그가 감각으로 기억하는 순간을 다시 확인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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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
이지민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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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민의 단편집 <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는 마치 엄선한 베스트극장의 단막극 모음 DVD같다.

일단 제목들부터 흥미롭다.

짧지 않은 문장이지만 호기심을 유발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한 줄의 잘 쓰인 카피 같은 <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를 비롯 <대천사>,<키티 부인>,<오늘의 커피>,<불륜 세일즈>등의 제목은 목차에서부터 흥미를 자극하지만 읽고나면 낚였다는 기분보다는 ' 이 작가 제목을 참 잘 뽑는구나' 하는 감탄이 들게 하는 적확한 제목들이다.

단편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들은 경쾌한 블랙 코메디를 연상시킨다. 다소 숨이 가쁠 정도로 리드미컬한 문장들은 행간의 여운보다는 흐름의 속도감을 즐기는 편이 적합하게 구성되어 있다. 특히 첫 번째로 수록된 단편 <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는 단편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기획자라면 페이지 몇 장을 넘기자마자 탐낼만한 재미가 분명한 작품이다. 본인이 봐도 잘난 남자와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남자를 바래다주는 일을 위해 만나는 한 여자의 몇 달여간의 생활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풍경들을 재치있게 소묘한다. 작가는 광화문 스타벅스와 부암동 근처로 짐작되는 주택가까지 이어지는 도시의 얼굴들을 세밀하게 스케치하는데 그 솜씨가 빼어나다.마치 그녀의 펜은 그녀가 걸어왔던 모든 길을 기억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비롯 대부분의 단편들은 굳이 신상명세를 읊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캐릭터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남자 혹은 어떤 여자의 생활들은 대부분 그들의 취향에서 기인한다는 점은 동시대적인 공감대를 어렵지 않게 형성하며 이 소설집의 재미라는 큰 장점을 지탱한다. 키티, 타파, 오늘의 커피, 프렌치 비스트로등은 칙릿에 노골적으로 등장할 법한 소재들이지만 이지민의 소설집에서는 재미있게도 욕망의 매개체로 그려진다. 칙릿들이 브랜드에 품는 맹목적 지지와는 다르게 작가는 사물들 혹은 사물들을 대하는 연정을 서글프고 우울하게 그려낸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불륜 세일즈>와 <영혼 세일즈>로 이어지는 마치 연작같은 두 작품이다. 콘돔을 끼고 대리 기사에게 업혀서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과 매일 아침 모텔에서 정부와의 섹스를 치루는 그의 아내는 파편같이 이 도시에 박혀 있는 반짝이는 구성원들이다. 흔하디 흔한 아침 드라마에 나올법한 설정들을 상쇄시키는 이지민만의 매력과 필력을 욕망의 지점들을 살피는 관찰력이다. 작가는 매우 꼼꼼하게 도시의 관계들을 탐구한다. 이 점은 정이현과는 또 다르다. 도시 여성의 삶을 꼼꼼하게 살피고 감정의 지점들을 연결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정이현의 소설들이 쌀쌀맞지만 예의바른 여성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면 이지민은 좀 더 쾌활하고 분방하다. 그녀가 그리는 여자들은 대체로 감정의 극단을 드라마틱하게 오간다.

여덟번의 성형 수술을 거치는 <대천사>의 주인공, 키티 캐릭터에 집착하는 <키티 부인>의 주인공, 마치 아파트의 티파티 같은 모닝 섹스에 집착하는 <불륜 세일즈>의 주인공, 그저 영양가 없는 사심만으로 카페를 차리는 <오늘의 커피>의 주인공.

이지민 소설 속의 그녀들은 정이현의 깜찍하게 영리해서 현실적인 도시 여성들과는 달리 주변의 누구와도 쉽사리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녀들은 불같이 단순한 감정에 사로 잡혀 자신의 일상을 한 순간에 바꾸어버리거나 빠른 속도로 다른 일상에 발을 들인다. 그 모든 동력은 욕망을 그대로 따르는 몸의 움직임이다. 코에 손을 대고 눈을 고치고, 팔뚝에 주사를 꽂는 미녀는 어느 순간 욕망이 일그러진 자화상을 마주치게 되고,새로 구입하기만 하면 소중한 것을 결코 잃을 일이 없어서 키티 인형만 74개를 가지고 있는 부인의 취향을 그저 소녀적이라고 하기엔 섬짓하다. 카페의 어느 공간보다 주인인 자신이 앉을 자리를 공들여 꾸미고 잡지책 속의 화보같은 일상을 꿈꾸는 그녀는 얼마전 까지 생활인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알아낼 수 없이 무모해보인다.

그녀들은 욕망한다. 삶의 다른 순간들을 욕망하고, 시대가 원하는 아름다움을 욕망하고, 자신만의 공간을 욕망한다. 

욕망의 지점들만 경쾌하게 나열해 놓았다면 이 소설집 역시 최근의 칙릿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새를 갖추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작가는 소설속의 주인공들이 어쩔 수 없이 치루어야만 하는 욕망과의 이별, 그 지점들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잔혹한 결말을 통한 반전보다는 정말 우리의 일상이 그러하듯이 어떤 절정 이후의 먹먹함들을 모른채하지 않고 살피고 있는 것이다. 꼼꼼한 관찰력을 통해 얻어진 명민한 시각은 이러한 지점들에서 빛을 발한다. 세상의 모든 이별이 아리게 아프듯이 우리가 욕망과 이별하는 순간 역시 동일한 에너지를 요구한다. 사랑이 잊혀지듯 욕망이 빛을 바랄때 어쩌면 스스로에게 가장 말간 얼굴을 보일 수 있는 것이 이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아닐까.하는 질문을 던지듯 작가는 공들인 세부 묘사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마지막 장면이 최고인 미니시리즈처럼 단단한 맺음새를 자랑하는 이지민의 또 다른 소설집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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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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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대부분은 가족보다는 친구와 함께 진행된다.

계획도 없고, 미래도 없는 하루 하루의 북닥거림과 속닥거림은

어쩌면 그것이 생의 평온이고 안락인듯 느껴져서 서로를 안심케 한다. 왜 가끔 지하철에서 알 수 없는 놀이에 흰자위를 희번득 거리면 즐거워 하는 남정네들이 있지 않은가. 호프집에서 죽였던 음담패설의 시간들, 길거리를 수놓았던 필터까지 빨아댄 담배꽁초들, 만화와 당구와 오락과 허접한 쇼핑으로 채워졌던 일상들이 남의 일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소설집은 책장에 꽂아두었던 일기장과도 같다.

 

자동피아노, 매뉴얼 제너레이션, 엇박자 D,악기들의 도서관....

각 단편들의 타이틀은 마치 음반의 수록곡들과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사실 이 소설집 자체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곡들의 흐름을 통해 앨범 전체의 느낌을 알게 하는 잘 다듬어진 한 장의 음반처럼 이 소설집 역시 각 단편들의 면면도 흥미롭지만 전체의 흐름이 하나가 되었을 때 더욱 매력적으로 '들린다'.

특히 읆조리듯 묘사되는 일상의 비루함을 흥미로운 문체로 묘사한 킬링 트랙인 <유리 방패>는 영에이지 리얼리스트 김애란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20대 남성의 일면을 들춰낸다. 있는 돈을 모두 꺼내어 호프집 탁자위에 두고 그만큼의 맥주를 들이키는 루저버디들의 흔한 저녁 시간을 그려낸 이야기는 현실에 밀착한 소설의 재미와 쓸쓸한 감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이 소설집 속에는 이러한 '루저버디'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의 직업은 비정규직도 아닌 소일거리에 그치거나 혹은 면접에 탈락하는 것이 현재의 직업이기로 하며 때로는 평범한 이들의 취미를 직업으로 삼아 밥벌이를 한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설파하지는 않지만 무심한 행간의 표정 뒤에 숨은 절절함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밤새워 레코드를 뒤지는 루버 버디들, 서른도 훌쩍 넘어 지하실에서 기타를 가르치고 배우는 루저 버디들, 그리고 지하철에서 플라스틱 칼과 방패로 땀흘리는 싸움놀이를 하는 정말, 루저 버디들.

 

스타일을 논하는, 혹은 연애의 오기와 적립의 쾌락 사이를 또각거리는 향수 냄새 나는 소설들의 사이에서 이 소설집의 가치는 도드라진다.

그것은  이 소설집이 사라져 버린 버스의 뒤꽁무니를 쫓아가는 매캐한 연기처럼 우리의 코를,눈을 그리고 가슴을 알싸하게 만드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몸에서 나는 살냄새 나는 풍경을 가까이에서 맡게 하는 그런 힘이 충만한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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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4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