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짊어질 수 없는 역할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때로는감정의 폭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의자 놀이를 가족적 메타포만큼이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메타포로도 읽을 수 있다. - P147

"나는 안정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곳, 범할 수 없는 곳,
손대지 않았으며 거의 손댈 수 없는 곳, 깊게 뿌리내린 변함없는 곳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준거점이자 출발점, 근원이 되어 줄 장소들이. - P149

나의 고향, 내 가족의 요람, 내가 태어났을지도 모르는집, 내가 자라나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르는(내가 태어난날 아버지가 심었을지도 모르는) 나무, 온전한 추억들로채워져 있는 내 어린 시절의 다락방・・・・・・ - P149

알파벳E 없이 책 한 권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면, 부재 투성이의 구멍난 삶이라 해도 그것을 살아 내는 것 역시 가능하다. 모국어에서 가장 필요한 글자 E 없이 책 한 권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 없이도 인생을 전부 살아낼 수 있다. 그 부재가 우리의 문법을 바꾸고 어휘에 그늘을 드리운다 해도 우리는계속해서 실존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 P1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도와줄까? 나 이래봬도 편집자 출신이야."
잠시 말이 없던 엄마가 대답했다.
"내가 할 수 있어. 내가 할 거야." - P134

쉴새없이 캣콜링을 하는 길거리의 남자들을 매일같이 감내해야 하는 극동아시아 여성 유학생에게 이 도시의 문화예술을 학생 할인가로 소비하는 행위는 향유라기보다는 투쟁에 가깝다고 말이다. - P138

"수민아, 한국은 닭이 참 작고 이쁘다." - P139

수민은 하루하루가 신나는 모험으로 이루어진 듯한 선배의 메일을 받을 때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건 성장과는 무관한 감각으로, 수민은언젠가 국어사전을 보다가 딱 떨어지는 단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래 묵은 이끼를 뜻한다는 ‘구태‘였다. - P142

Tume manques.
보고 싶어 - P144

수민은 정우 선배가 편지 끝자락에 적어넣은 문장을 속삭이듯 발음해보았다. 직역하면 ‘나에게 네가 없어‘라는 뜻으로, ‘manquer‘라는 동사 안에는 ‘결핍‘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러니까 그리움에는 반드시 결핍이 수반되는 것이다. 네가 내 곁에 없어서, 혹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없어서. - P144

그의 척추를 따라 길게 이어진 흉터를 매만질 때마다 그결함이 마치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처럼 느껴진다던 선배는 일 년 전, 남자친구와 시민연대계약을 맺었다. - P149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오라는 거야. 그럼 자기가노랫소리를 듣고 마중나오겠대. 완전 미친 사람인 줄 알았잖아." - P154

용도를 알기 어려운 구덩이 주위로 물이 고인 듯 햇빛이내려앉아 있었다. 수찬은 요즘 자주 구덩이에 시선이 머문다고 했다. 자신이 도려낸 나무의 자리를 바라보면서 이유없이 불쑥불쑥 치솟는 분노를 그 속에 던져 넣는 상상을 한다고 덧붙이면서. 그러면 화가 조금 가시는 것 같다고 말하던, 시선을 살짝 낮춘 수찬의 옆얼굴이 그날 수민이 숲에서본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 P1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민은 엄마와의 통화 내역을 확인했다. 엄마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건 일주일 전. 기억을 더듬었지만 인상에 남을 만한 내용은 없었다. 산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이라길래, "너무 높이까지 가지 마. 위험하잖아"라고 타박했던것 정도가 떠오를 뿐이었다. - P83

"나한텐 생존의 문제야." - P85

수민은 비로소 깨달았다. 어린 시절 자신이 끔찍이 싫어했던 불행의 냄새가 사실은 생존의 냄새였다는 걸 말이다 - P86

수민은 수찬의 입에서 엄마 이야기가 나오면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 그가 유독 살가운 사위였기 때문이었다. - P88

수찬은 뒷길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연립주택들 사이에마치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 탄 회사원들처럼 끼여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들이 있는데 본 적 있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수령이 무려 사백육십 년이나 된 보호수도 있다면서, 비록사람들 틈에 사느라 수관의 폭도 좁고 형태도 뒤틀려 있지만 또 그래서 아름다운 거 아니겠냐고 말하는 수찬을 바라보는 엄마의 굳은 입가가 서서히 느슨해졌다. - P89

수민은 자신이 남들보다 적은 양의 사랑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애정을 베푸는 데 인색하고 설사 최대치를 주어도 상대방은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거라고 말이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수민만의 콤플렉스였다. - P93

꿈속을 헤매는 듯천진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단단한 인과의 세계를 부수고자신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가줄 것만 같아서. - P97

"사모님이 보통 돈독이 오른 분이 아니셔서."
임정희에게는 그 말이 어쩐지 칭찬처럼 들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돈에 관해서라면, 그에게는 일종의 권위가 있었다. - P113

"엄마, 걱정 마. 나한테 돈 있어.
작게 접힌 오천원짜리 지폐 한 장이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모서리에는 평소 수민이 갖고 놀던 익숙한 보석스티커가 반짝였다. - P127

"내가 도와줄까? 나 이래봬도 편집자 출신이야."
잠시 말이 없던 엄마가 대답했다.
"내가 할 수 있어. 내가 할 거야." - P134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던 스페인 출신의 작곡가 엔리케그라나도스는 일생에 단 두 번 고국을 떠났다. 스무 살 때떠난 파리 유학은 장티푸스를 앓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다. - P1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민은 오늘 아침 밥알처럼 부풀었던 마음의 정체가 다름 아닌 슬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P59

동을 조율은 건반 하나를가볍게 누른 뒤 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장력을 조정해 먹이를 없애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맥놀이를 듣는 능력과신속하고 정확한 손놀림이 핵심인 셈이다. - P64

"일종의 퍼포먼스지. 조율 끝내고 멋들어지게 한 곡 치면 고객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 P66

"나 이제 혼자 있고 싶어. 혼자 파스타 먹으면서 영화도보고 싶고, 노래방도 맘대로 가고 싶어."
할머니가 울자 아이가 따라 우는 바람에 지은은 정신이아득해졌다. - P69

수민이 이삿날 도우러 가겠다고 하자 엄마는 완강히 거절했다.
"오지마. 다 버리고 갈 거니까." - P75

"어머니가 싫어하실 수도 있잖아요? 사정이 있다거나 혼자 있고 싶다거나....."
"그런 게 어딨어, 가족끼리? 관심 가져주면 다 좋아하지. 난 우리 엄마 평생 옆구리에 끼고 살 건데?" - P76

피아노 건반 깊이의 표준 규격은 10밀리미터다. 그런데건반 깊이에 예민한 연주자들은 작은 차이에도 쉽게 손가락의 피로를 느낀다고 했다. 장시간 격렬한 연주를 이어가야 하는 경우엔 더 그렇다고 말이다. 건반 깊이를 낮추는방법으론 건반 밑에 얇은 종이 펀칭을 여러 장 덧대 건반이들어가는 깊이를 얕게 만드는 방식이 있다. 그러니까 여든여덟 개의 건반 밑에 일일이 종이 펀칭을 깔아 높이를 균일하게 맞춰야 한다는 이야기다. - P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비극적인 자리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머지 거의 불미스러운 일로 여겨져서, 어떤 언어권에서는 그것을 지칭할 단어조차 남겨 두지 않는다. 프랑스어에는 아이를 잃어 상중인 부모를지칭하는 단어가 없다. - P1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