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민은 엄마와의 통화 내역을 확인했다. 엄마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건 일주일 전. 기억을 더듬었지만 인상에 남을 만한 내용은 없었다. 산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이라길래, "너무 높이까지 가지 마. 위험하잖아"라고 타박했던것 정도가 떠오를 뿐이었다. - P83
수민은 비로소 깨달았다. 어린 시절 자신이 끔찍이 싫어했던 불행의 냄새가 사실은 생존의 냄새였다는 걸 말이다 - P86
수민은 수찬의 입에서 엄마 이야기가 나오면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 그가 유독 살가운 사위였기 때문이었다. - P88
수찬은 뒷길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연립주택들 사이에마치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 탄 회사원들처럼 끼여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들이 있는데 본 적 있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수령이 무려 사백육십 년이나 된 보호수도 있다면서, 비록사람들 틈에 사느라 수관의 폭도 좁고 형태도 뒤틀려 있지만 또 그래서 아름다운 거 아니겠냐고 말하는 수찬을 바라보는 엄마의 굳은 입가가 서서히 느슨해졌다. - P89
수민은 자신이 남들보다 적은 양의 사랑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애정을 베푸는 데 인색하고 설사 최대치를 주어도 상대방은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거라고 말이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수민만의 콤플렉스였다. - P93
꿈속을 헤매는 듯천진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단단한 인과의 세계를 부수고자신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가줄 것만 같아서. - P97
"사모님이 보통 돈독이 오른 분이 아니셔서." 임정희에게는 그 말이 어쩐지 칭찬처럼 들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돈에 관해서라면, 그에게는 일종의 권위가 있었다. - P113
"엄마, 걱정 마. 나한테 돈 있어. 작게 접힌 오천원짜리 지폐 한 장이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모서리에는 평소 수민이 갖고 놀던 익숙한 보석스티커가 반짝였다. - P127
"내가 도와줄까? 나 이래봬도 편집자 출신이야." 잠시 말이 없던 엄마가 대답했다. "내가 할 수 있어. 내가 할 거야." - P134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던 스페인 출신의 작곡가 엔리케그라나도스는 일생에 단 두 번 고국을 떠났다. 스무 살 때떠난 파리 유학은 장티푸스를 앓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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