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도와줄까? 나 이래봬도 편집자 출신이야." 잠시 말이 없던 엄마가 대답했다. "내가 할 수 있어. 내가 할 거야." - P134
쉴새없이 캣콜링을 하는 길거리의 남자들을 매일같이 감내해야 하는 극동아시아 여성 유학생에게 이 도시의 문화예술을 학생 할인가로 소비하는 행위는 향유라기보다는 투쟁에 가깝다고 말이다. - P138
"수민아, 한국은 닭이 참 작고 이쁘다." - P139
수민은 하루하루가 신나는 모험으로 이루어진 듯한 선배의 메일을 받을 때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건 성장과는 무관한 감각으로, 수민은언젠가 국어사전을 보다가 딱 떨어지는 단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래 묵은 이끼를 뜻한다는 ‘구태‘였다. - P142
Tume manques. 보고 싶어 - P144
수민은 정우 선배가 편지 끝자락에 적어넣은 문장을 속삭이듯 발음해보았다. 직역하면 ‘나에게 네가 없어‘라는 뜻으로, ‘manquer‘라는 동사 안에는 ‘결핍‘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러니까 그리움에는 반드시 결핍이 수반되는 것이다. 네가 내 곁에 없어서, 혹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없어서. - P144
그의 척추를 따라 길게 이어진 흉터를 매만질 때마다 그결함이 마치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처럼 느껴진다던 선배는 일 년 전, 남자친구와 시민연대계약을 맺었다. - P149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오라는 거야. 그럼 자기가노랫소리를 듣고 마중나오겠대. 완전 미친 사람인 줄 알았잖아." - P154
용도를 알기 어려운 구덩이 주위로 물이 고인 듯 햇빛이내려앉아 있었다. 수찬은 요즘 자주 구덩이에 시선이 머문다고 했다. 자신이 도려낸 나무의 자리를 바라보면서 이유없이 불쑥불쑥 치솟는 분노를 그 속에 던져 넣는 상상을 한다고 덧붙이면서. 그러면 화가 조금 가시는 것 같다고 말하던, 시선을 살짝 낮춘 수찬의 옆얼굴이 그날 수민이 숲에서본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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