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까지 잘해줘요? 솔직히 상부한 지 오래됐잖아." - P202

"저는 최선을 다했는데요."
"희지 씨, 그러지 말아요.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정말로. 그래서 괜찮은 거예요." - P203

목록에 들어가보니 ‘희지‘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마치 백지처럼, 유희지도 아니고 아줌마도 아닌 담백한 나의 이름,
회지, 나는 그걸 본 순간 앞으로 우리가 함께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아차렸다. - P209

해피엔드: 저는 동현이었던 사람이 아닌데요.
여인2: 하지만 당신이 해피엔드인 건 확실하니까요. - P207

"기대한 사람이 아닌 거 알아요."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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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몸을 꾸었다. - P106

신해욱의 시는 늦게 온다. 연과 연 사이가 아득하기 때문이다. 그 아득한 틈을 우리는 천천히, 너무나도 천천히이동해야 한다. 초속 5센티미터쯤의 속도로 그 틈을 통과하고 나면, 문득 우리는 다른 시공간에 있다. 신해욱의시는 그 연과 연 사이는 웜홀과 비슷한 데가 있다. 그 틈을 통과하면 우리는 시인이 발화하지 않은 낯선 곳에 도착한다. 이상하고도 따뜻한 정오의 공원 같은 곳에 도착한다. - P110

1인칭 혹은 ‘나‘라는 자명한 개체에 대한 회의에서 그 의미는 출발한다. 현대시는 이상과 김수영 이래로 1인칭 자의식의 각축장이었다. 그러나 사실 1인칭은정말로 1인칭인가. ‘나‘라는 개체는 생활 속에서 정말로실재하는가. ‘나‘와 ‘나 밖의 것들‘이 지닌 유기적인 그물망 속에서 왜소해져가는 1인칭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수많은 ‘나‘들의 집합 속에서 희미해져가는 ‘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리고 다음 시를 읽는다. - P129

신해욱의 시를 설명하기 위해서 ‘군더더기가 없다‘라는말을 쓰면 안 된다. ‘절제‘라는 낱말도 들먹이면 안 된다.
이런 용어들은 신해욱에게 조금 요란하다. 신해욱의 언어는 ‘곡진한 속삭임‘에 가깝다. 곡진한 말은 간절함보다 더고요하고, 정성보다 더 아련하며, 사려보다 더 신중한 말이다. 말을 아끼려고 아끼는 게 아니라, 말로 할 수 없는말. 말들의 타임캡슐.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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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는 혼자 살면서도 옛날에 크게 살림하던 버릇을 버리지못해 김치며 장아찌 같은 걸 자꾸 담갔다. 그 뒤치다꺼리는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었다. 며느리랑 같이 살 때는 아마며느리가 했을 것이다. - P184

그렇게 말하며 두부 할머니의 손을 가져다가 힘을 실어꾹꾹 눌렀다. 두부 할머니는 시원한지 대꾸도 안 하고 잠자코 있었다. 나는 얼마간 마사지를 하다가 두부 할머니에게질문을 던졌다. - P188

김영순님 전화받아주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월세 올리는 조건으로 재계약 가능합니다.
-다시 연락해주세요.
저는 퇴거 조치에 응하지 않겠습니다. - P190

어떤 말들은 오히려 입 밖에 냄으로써 그것을 진심으로 믿게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 전까지 항상 의문으로 남아 있던 것들이 오히려 발화를 통해 명백해져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나의 명백한 진심인 것은 아니다. - P193

사전 교육을 듣던 누군가 내게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시터가 고된 노동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나는 그질문을 받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내놓았다.
이 일은 고되다 못해 서러운 노동입니다. 가족 사이에 끼어들어 어느 정도의 친밀감을 형성하되, 분명한 선을 지켜야만 하고 가사 노동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제 몫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죠.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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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으로 머리를 감았다. - P91

하루에서는삼십 분이 삭제된 것처럼. - P95

만약의 물을 미리 마실 수는 없는가. - P99

목을 보호하며한겨울 같은 이빨을 키운다면어떠한가. - P99

왜 그에게는실망의 표현이 존재하지 않는가. - P103

나를 믿어 마지않는 그에게나는 어찌하면 좋은가.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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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있지 않으면서 그곳에 있는 것." 자리의 곤경. 이것이바로 뿌리 깊은 "소요", "자리 옮김"의 어려움이다. "소요"란 폭력적인 행동이 초래하는 거대한 무질서다. 자리 옮김에는 폭력, 즉찢김의 폭력이 있다. 결코 정돈될 수 없을 어떤 것이 있다. - P87

실제로 우리는 어떤 곳에도 뿌리내리지 않는 것을 강점으로생각할 수 있다. 고정된 자리가 없다는 것. 하나의 사회적 공간에서 다른 사회적 공간으로, 하나의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이동할수 있다는 것,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 처함으로써 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 역시 하나의 특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온전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간격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승인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모든 형식의 인간 연구에 필요한비판적 거리를 만들어 준다. 이것이 바로 역사학자 로맹 베르트랑이 매우 분명하게 주장했던 바이다. "안에 존재하기보다는 "사이에 존재하기, 안주하지 않고 항상 자리를 바꾸기, 나아가 이런본성적 "불안"은 어쩌면 인문학의 소명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89

불손함은 그러므로 제자리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자리를 얻고자 하는 야망이자 갈망, 욕망이고, 우리와 어울리는 자리, 우리를 나타내고 표현하는 자리를 직접 창조하겠다는 각오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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