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폭설이 내리지 않았다면, 김춘영의 집에서 하루를 묵게되는 변수가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안과 그동안 해온 언쟁을 반복하며 내 속마음을 쏟아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잠자코안의 말을 들었다. 애써보겠다고 말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면담 - P17
내 구술자를 할머니라고 칭하는 그들은 오십대 중반쯤으로 보였고 부부라고 했다. "근 십 년 만에 둘이서만 온 여행입니다." 그들은 운탄고도 트레킹과 백운산 등산을 마친 뒤 리조트에 며칠머물면서 카지노와 골프장을 경유해 돌아갈 거라고 했다. - P19
"여기서 오십 년을 넘게 사셨으면 그야말로 탄광촌 산증인이시네요.‘ - P21
부부는 자신들을 폭설로부터 대피시켜준 이 고마운 할머니가 매일 마음을 졸이며 남편을 갱도로 출근시키던 광부의 아내였는지, 탄가루 속에서 선탄을 하던 여성 광부였는지 알고 싶은 것 같았다. - P23
그때 그 강의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2024년 12월 3일 이후의겨울을 지나 2025년 3월 강의실에서 마주앉은 얼굴들이 아니었다면. 함께 오카 마리와 기시 마사히코, 최윤과 아다니아 쉬블리를 읽던 시간이 아니었다면 모여 앉은 이들은 모두 쓰는 사람들이었고 서사를 향한 욕망이나 재현의 윤리라는 말 앞에서 느껴온두려움이 있었다. - P39
이모는 내가 사귄 남자들을 다 알았다 - P51
"이야, 따님들이 정말 예쁘네요. 어디서 똑같이 찍어내신 것 같습니다." 엄마는 창밖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네, 아빠한테서 찍어냈죠." - P53
결국 나는 차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비가 들이쳤다. 별수 있나. 비를 맞으며 서둘러 트렁크를 열고 준비해온 캐리어를 꺼냈다. 28인치였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붉은 길을 걸었다. - P63
아니, 어쩌면 새로 시작된 것일지도. - P81
"이걸로 끝내. 더는 누구도 아무 소리 하지 마." - P92
"난 언젠가 너희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너희는 기껏해야 불행을나누는 사이일 뿐이니까." - P92
내가 그녀에게 불필요하고, 무의미하고, 더는 중요하지 않은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는 것.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절박하게 매달리는 기분이 들게 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녀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는 것. - P95
얼마나 지났던가. 이모가 눈을 떴다. 그녀는 살짝 놀랐다는 듯나를 보더니 힘없이 말했다. "진이구나...... 몰라보겠다." - P103
백미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못생긴 게. - P105
소설을 다 쓰고 보니, 그런 인물이 한 명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가족이 그러면 그렇지 싶어서 우습고 슬펐다. 거푸집으로 찍어낸듯한 이 비슷한 인간들. - P107
빅토리아시대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는여자의 사진을 보면 그들은 침대 위에서 허리를 활처럼 휘고 있다. 그 장면은 깃을 세워 날아오르려는 새의 몸짓을 연상케 한다. 시공간적 폐색감 속에서 여성들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이탈하고, 자아 역시 두 조각으로 나뉜다. 이 상시적 분열의 상태가 바로 여성고딕의 관습 중 하나인 분신 double을 낳았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고딕적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축은 분신과도 같은이모와 조카의 관계에 있다. - P110
세상의 평이한 전언은 하나의 고통이 다른 고통을 정확히 알아볼 때, 그 크기가 줄어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성 고딕은 그 순간 고통이 두 배로 불어나 더 아찔하고 황홀한 기쁨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 고통의몸들이 커진 만큼 횡포를 휘둘러온 세상은 축소된다. 아주 오래전 이모가 자신에게 그러했듯 화자가 이모를 쓰다듬을 때, 이모는 살짝 웃으며 나의 남자친구에 대해 익숙한 농담을 한다. 뿌리깊은 애착과 불안으로 뒤엉킨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순간 이상한방식으로 잠시 숭고해진다. - P115
셜리 잭슨이 한 시인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는 문구. "나는 내가두려워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 delight in what I fear"는 이 소설의정동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듯하다. 소진되고 고립된 자들의 자기혐오와 구별되지 않는 사랑. 동경하는 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증오하며 파열하는 사랑 강화길의 「거푸집의 형태는 이사랑을 끌어안으며 우리 소설이 한 번도 가닿은 적 없는 정동의미답지에 들어선다. 끔찍한 두려움과 희열에 떨면서.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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