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원고를 쓰기 위해 영화를 다시 보려니 이 자식들아 피임을 똑바로 해라, 하고 말하고 싶다. - P45

편집자는 첫번째 독자다. 하지만 편집자가 여타의 독자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편집자는 책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이 중간자적 위치가 편집자를 작가와 독자와 출판 산업이만나는 한가운데에 놓이게 한다. 문제는 편집자가 작가 눈에는 독자와 출판사 편인 것처럼 보이고, 독자의 눈에는 작가와 출판사와 한통속으로 보이고, 출판사 눈에는 작가와독자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 P50

끊임없이 버리는 중에 선택하고, 선택한 자신의 안목과 그 원고가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일을 믿는사람을 왜 천재라고 부를 수 없을까. - P51

편집자의 천재성이작가의 천재성과 분리되어 이야기될 수 없고, 천재가 발견되는 것은 편집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 P55

나는 ‘컴포트 푸드‘처럼 ‘컴포트 무비‘도 있다고 주장한다.
마음이 병들고 지쳤을 때, 너덜너덜해진 심신으로 틀어놓으면 저절로 빨려들고, 영화가 끝나면 ‘잘 살아 있음‘으로 안전하게 착륙시켜주는. - P57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한 유미코가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은 이곳 부엌뿐일지도 모른다. 이때의 물소리는 약간은 우는소리 같다. 자기 공간을 따로 갖지 못한 여성들이 감정을 삭이는 곳으로서의 부엌. - P64

요리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맛있는 순간‘이보이지만, 먹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 P67

"그녀가 나를 지켜보고 있어요. 내가 새들처럼 높이 날 수있다면 그녀의 품으로 곧장 날아갈 텐데." 노래 가사는 흥겹게이어지고, 이것은 그녀의 현실이 아니다. 무표정한 눈 깜빡임.
영화적 농담, 그리고 끝. - P77

정점에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임박한 추락의 순간을 암시하는 것이다. 정물화적인,
메멘토 모리적인 행복의 순간을 담아내기. - P81

. 「가디언」은 필리스 나지와의 인터뷰 기사 마지막에 이런 문장을 덧붙였다. "세계를 약간 바꾸려면, 그것으로 돈이 벌려야 한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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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를 쓸 때, 제품이 얼마나 좋은지를설명하기보다 그 제품을 통해 달라질 ‘나의 세계‘를보여주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는 이야기를 드린것을 기억하시나요? - P267

마음을 짠하게 만드는 카피가 있는가 하면, 어떤카피는 어쩐지 반성하게 만듭니다. 이 카피가그렇습니다. - P268

좋은 술이 좋은 대화를 부르고좋은 대화는 그리운 풍경에 색을 입혀준다.
아, 좋은 밤이다. - P271

무언가를 끝까지 사랑했던 기억은 평생을 살며아무도 가질 수 없는 큰 무기입니다. 아무도시키지 않은 일을 스스로 하고 비효율적이기도,
결과를 보장하지도 않는 것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쓰면서 마음의 끝까지 갔던 길은 모두 내 땅이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무언가에 빠지다보면 이해할 수 없었던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되기도 하고, 다른 새로운 도전을 할 때 마음의허들이 낮아지기도 합니다. ‘ - P280

너의 용기를 만나러 갈게.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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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폭설이 내리지 않았다면, 김춘영의 집에서 하루를 묵게되는 변수가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안과 그동안 해온 언쟁을 반복하며 내 속마음을 쏟아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잠자코안의 말을 들었다. 애써보겠다고 말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면담 - P17

내 구술자를 할머니라고 칭하는 그들은 오십대 중반쯤으로 보였고 부부라고 했다. "근 십 년 만에 둘이서만 온 여행입니다." 그들은 운탄고도 트레킹과 백운산 등산을 마친 뒤 리조트에 며칠머물면서 카지노와 골프장을 경유해 돌아갈 거라고 했다. - P19

"여기서 오십 년을 넘게 사셨으면 그야말로 탄광촌 산증인이시네요.‘ - P21

부부는 자신들을 폭설로부터 대피시켜준 이 고마운 할머니가 매일 마음을 졸이며 남편을 갱도로 출근시키던 광부의 아내였는지,
탄가루 속에서 선탄을 하던 여성 광부였는지 알고 싶은 것 같았다. - P23

그때 그 강의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2024년 12월 3일 이후의겨울을 지나 2025년 3월 강의실에서 마주앉은 얼굴들이 아니었다면. 함께 오카 마리와 기시 마사히코, 최윤과 아다니아 쉬블리를 읽던 시간이 아니었다면 모여 앉은 이들은 모두 쓰는 사람들이었고 서사를 향한 욕망이나 재현의 윤리라는 말 앞에서 느껴온두려움이 있었다. - P39

이모는 내가 사귄 남자들을 다 알았다 - P51

"이야, 따님들이 정말 예쁘네요. 어디서 똑같이 찍어내신 것 같습니다."
엄마는 창밖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네, 아빠한테서 찍어냈죠." - P53

결국 나는 차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비가 들이쳤다. 별수 있나.
비를 맞으며 서둘러 트렁크를 열고 준비해온 캐리어를 꺼냈다.
28인치였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붉은 길을 걸었다. - P63

한대 칠까.
여자가 말을 이었다. - P71

아니, 어쩌면 새로 시작된 것일지도. - P81

"이걸로 끝내. 더는 누구도 아무 소리 하지 마." - P92

"난 언젠가 너희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너희는 기껏해야 불행을나누는 사이일 뿐이니까." - P92

내가 그녀에게 불필요하고, 무의미하고, 더는 중요하지 않은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는 것.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절박하게 매달리는 기분이 들게 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녀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는 것. - P95

얼마나 지났던가. 이모가 눈을 떴다. 그녀는 살짝 놀랐다는 듯나를 보더니 힘없이 말했다. "진이구나...... 몰라보겠다." - P103

백미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못생긴 게. - P105

소설을 다 쓰고 보니, 그런 인물이 한 명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가족이 그러면 그렇지 싶어서 우습고 슬펐다. 거푸집으로 찍어낸듯한 이 비슷한 인간들. - P107

빅토리아시대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는여자의 사진을 보면 그들은 침대 위에서 허리를 활처럼 휘고 있다. 그 장면은 깃을 세워 날아오르려는 새의 몸짓을 연상케 한다.
시공간적 폐색감 속에서 여성들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이탈하고,
자아 역시 두 조각으로 나뉜다. 이 상시적 분열의 상태가 바로 여성고딕의 관습 중 하나인 분신 double을 낳았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고딕적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축은 분신과도 같은이모와 조카의 관계에 있다. - P110

세상의 평이한 전언은 하나의 고통이 다른 고통을 정확히 알아볼 때, 그 크기가 줄어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성 고딕은 그 순간 고통이 두 배로 불어나 더 아찔하고 황홀한 기쁨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 고통의몸들이 커진 만큼 횡포를 휘둘러온 세상은 축소된다. 아주 오래전 이모가 자신에게 그러했듯 화자가 이모를 쓰다듬을 때, 이모는 살짝 웃으며 나의 남자친구에 대해 익숙한 농담을 한다. 뿌리깊은 애착과 불안으로 뒤엉킨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순간 이상한방식으로 잠시 숭고해진다. - P115

셜리 잭슨이 한 시인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는 문구. "나는 내가두려워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 delight in what I fear"는 이 소설의정동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듯하다. 소진되고 고립된 자들의 자기혐오와 구별되지 않는 사랑. 동경하는 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증오하며 파열하는 사랑 강화길의 「거푸집의 형태는 이사랑을 끌어안으며 우리 소설이 한 번도 가닿은 적 없는 정동의미답지에 들어선다. 끔찍한 두려움과 희열에 떨면서.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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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영의 집은 화운령에서도 좀더 걸어올라간 곳에 있었다. 운탄고도 5길이 시작되는 화운령 초입에 주차를 하고 등산화를 꺼내 신으면 연못 터 부근에서부터 이어지는 산길이 보였다. - P9

김춘영의 집은 거실 통창이 크게 나 있는 단층 목조주택이었다. 창 앞에 서면 제일 먼저 화운령 골짜기가 보였고 그 뒤로 운탄고도가 지나는 산자락들이 파도처럼 겹겹이 펼쳐졌다. 실내 쪽창턱에 줄지어 세워놓은 황도 통조림통에선 여러 종류의 다육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벽에 걸린 농협 달력과 달마도, 광업소 이름이 새겨진 오래된 괘종시계, 탁자 한쪽의 대형 주전자와 온풍기,
애초 용도와 달리 수납 박스로 쓰이고 있는 김치통 - P11

‘지역과 여성의 기억‘ 아카이브 연구팀은 그간 광부의 가족으로만 소환되던 탄광촌 여성을 주체로 세울 것이다. 이것은 탄광사회사도 주민운동사도 노동생활사만도 아닌, 각 여성의 이름 석자를 전면에 내세운 생애사 작업이었다. 내가 완성할 텍스트의주인공은 김춘영이었다. - P14

구술 흐름이 그 사건을 향해 가지 않는 건 다섯 면담 중 김춘영과 나의 작업뿐이었다. 안은 내게 말하곤 했다. "박선생, 우리가쓰는 건 라이프 스토리가 아니라 라이프 히스토리야." 하지만 나는 구술자들의 고유한 생애를 사건으로 환원하려는 안의 방식에그다지 동의하지 않았다. 김춘영의 구술이 사건의 증언으로 수렴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이 작업의 주체는 사건이 아니었다. 김춘영이었다. 나는 오직 김춘영의 말을 들을 것이다. 김춘영이 말하는 김춘영의 기억을 들음으로써 김춘영이라는 대체 불가능한한 개인에 대한 이해에 도달해갈 것이다. 다른 연구자가 아니라나여서 가능한, 오직 나와 김춘영의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한, 김춘영과 나의 공동작업이기 때문에 포착 가능한 어떤 진실에 접근해갈 것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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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힘드냐는 말엔 언뜻 솔깃함이 있다. 고통은 보편적이며,
누구나 느낄 수 있으니까. 책 안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고통의민주주의" 속에서 산다. 극우도 억울함과 박탈감을 주장하며 피해자라고 호소한다. 가해 용의자는 눈물을 흘리며 피해자로 둔갑하고, 피해자는 가해자로 의심받고 되려 공격당한다. 게다가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어떤 고통이 더 많이 보여질지에 깊이 관여해 이미인기 있는 고통의 말을 증폭한다. 특권을 가진 자들의 고충이 긴박한 고통으로 부풀려진다. 플랫폼 위에 피해자가 범람하고 자신의고통이 더 중요하다고 치받는 사이, 사람들은 누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지 혼란스러워한다.

인권과 평등이 보편화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증언, 그리고그들의 용기와 희생은 결정적이었지만, 오늘날 피해자라는 언명자체는 더 이상 진보의 원동력이 되기 어려워졌다. 전통적인 지배집단이 스스로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피해자 중에서도 특권층만이피해자로서의 권리를 누리게 되면서, 진정한 소수자들의 권리는더 이상 피해자로서 정치화되기 힘들게 되었다.

각 사회집단은 (동일한) 모국어로 발언하지만그 용법은 천차만별이고, 강렬한 감정이나 중요한 개념이관건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어떤 언어적 기준으로 봐도 "틀린"
집단은 없다. 일시적으로 지배적인 집단이 자신의 용법이
"옳다"며 이를 강제하려고 애쓸 수는 있어도.
레이먼드 윌리엄스, 《키워드>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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