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영의 집은 화운령에서도 좀더 걸어올라간 곳에 있었다. 운탄고도 5길이 시작되는 화운령 초입에 주차를 하고 등산화를 꺼내 신으면 연못 터 부근에서부터 이어지는 산길이 보였다. - P9
김춘영의 집은 거실 통창이 크게 나 있는 단층 목조주택이었다. 창 앞에 서면 제일 먼저 화운령 골짜기가 보였고 그 뒤로 운탄고도가 지나는 산자락들이 파도처럼 겹겹이 펼쳐졌다. 실내 쪽창턱에 줄지어 세워놓은 황도 통조림통에선 여러 종류의 다육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벽에 걸린 농협 달력과 달마도, 광업소 이름이 새겨진 오래된 괘종시계, 탁자 한쪽의 대형 주전자와 온풍기, 애초 용도와 달리 수납 박스로 쓰이고 있는 김치통 - P11
‘지역과 여성의 기억‘ 아카이브 연구팀은 그간 광부의 가족으로만 소환되던 탄광촌 여성을 주체로 세울 것이다. 이것은 탄광사회사도 주민운동사도 노동생활사만도 아닌, 각 여성의 이름 석자를 전면에 내세운 생애사 작업이었다. 내가 완성할 텍스트의주인공은 김춘영이었다. - P14
구술 흐름이 그 사건을 향해 가지 않는 건 다섯 면담 중 김춘영과 나의 작업뿐이었다. 안은 내게 말하곤 했다. "박선생, 우리가쓰는 건 라이프 스토리가 아니라 라이프 히스토리야." 하지만 나는 구술자들의 고유한 생애를 사건으로 환원하려는 안의 방식에그다지 동의하지 않았다. 김춘영의 구술이 사건의 증언으로 수렴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이 작업의 주체는 사건이 아니었다. 김춘영이었다. 나는 오직 김춘영의 말을 들을 것이다. 김춘영이 말하는 김춘영의 기억을 들음으로써 김춘영이라는 대체 불가능한한 개인에 대한 이해에 도달해갈 것이다. 다른 연구자가 아니라나여서 가능한, 오직 나와 김춘영의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한, 김춘영과 나의 공동작업이기 때문에 포착 가능한 어떤 진실에 접근해갈 것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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