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이 말들은 가끔 범상치 않은 힘을 보여주기도한다.
이를테면 이런 말. "나 사실은 너 좀 좋아해."
이때 좀은 좀이 아니다. - P49

"작은아버지가 엄청난 강수지 팬이셨거든요. 그래서 강수지의 <시간의 향기〉라는 노래 제목을 한자화해본 거래요" - P51

"기본적으로 ‘그리움‘이라는 뜻을 품고 있기는 한데 그뉘앙스가 참 복잡해요. 슬프지만 동시에 행복하고, 돌아가고 싶을 만큼 그립지만 그렇다고 그때로 정말 돌아가고싶은 건 또 아니고…………. 영원히 감을 못 잡을 수도 있을 것같아요, 제가 그 나라 사람이 아니니까." - P67

사전에서 누락된 ‘여자 노예‘라는 단어는 오랜 우정과 신뢰의 시간을 거쳐 리지의 입을 통해 더 위대한 정의를 획득한다. - P71

"단어들은 너를 위한 거란다." - P73

말 한마디의 위력은 경험할 때마다 기가 찰 만큼 놀랍다.
고작 이 한마디 하기가 그렇게나 어려운 순간이 많다는 사실이 허탈하기도 하고, - P77

세상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남들은 안 되는 게 되는 사람들이 많다. 매운 음식을 아무리 좋아해도 매운맛에 취약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매운 음식을 먹어도매운 줄 모르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 P81

교훈은 다음과 같다.
커플 모임은 하는 게 아니다. - P85

미련한 행동은 삶의 성취감을 격상시킨다. 자기를 다그치며 몰아붙이는 데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도 유혹적이고말이다. ‘미라클 모닝‘처럼 이름과 형식을 조금 바꾼 채로자주 유행이 되기도 하는 미련한 행동에 나는 삼계절 휘둘린다. 그러나 여름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다짐한다. - P87

"우리는 보통 마음이 몸에게 말하잖아요. 몸이 마음을따라야 하고요. 그런데 달릴 때는 마음이 몸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 같아요. 반대죠."
언젠가 인터뷰 중 촬영을 도와주시던, 나처럼 달리기를좋아한다는 사진작가님께서 툭 던지듯 하신 말이다. - P87

역시 책이라는 물성에 내가 각인되는 일은 영광이다. 아무리 부끄러운 글이더라도, 누가 비웃더라도, 읽어주지 않아도, 바로 잊히게 되더라도.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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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SF를 쓰려는 사람들에게 ‘SF란 무엇인가‘의 미로 속에서 한번 길을 잃어보는 것이 가치 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그 시간은 가치 있었다. 미로를헤매며 SF 세계의 복잡하고 종잡을 수 없는 특성을 직접 몸으로 체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탐험할 드넓은 세계의약도를 대략적으로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 P56

소재를 정했다고 이야기가 바로 떠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엇을 쓰기로 결심하면 그에 대한 자료를 계속 찾아본다. 아무리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아도 관련된 책을 열권정도 읽으면 그 사이에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가급적 이전에는 잘 모르던 것들, 낯설고 새로운 개념을 알려주는 책일수록 좋다. - P57

과학책을 읽을 때 나는 무조건 연필과 플래그를 지참한다. - P65

가끔은 소설 쓰기를 낯선 여행지의 가이드가 되는 일에 비유한다. 나에게는 이 세계를 먼저 탐험하고 이곳이 지닌 매력을 독자들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다. 출발지점에서, 낯선 여행지는 아직 내게도 안개로 덮인 듯 뿌옇게 보인다. 그렇지만안갯속에서 초고를 쓰고, 많은 자료를 읽고 공부하고 가져와길목 구석구석을 점차 구체화하고, 또다시 쓰고 고치다보면안개가 걷히기 시작한다. 공기의 냄새가 느껴지고 사각사각밟히는 나뭇잎 소리가 들려온다. 시야가 점차 맑아지고 풍경이 선명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그 여행지의 풍경속에 정말로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비로소 나는 이소설을 쓸 준비가 된 것이다. - P71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소설과 논픽션은 어떻게 다를까? 나에게는 둘의 차이가 ‘세계의 안개‘가 있냐 없냐의 차이 같다. - P86

하지만 작가는 개별독자가 아닌 전체 독자를 생각해야 한다. 개별 독자는 부분적인 지도만을 갖지만, 이 책을 읽을 잠정적 독자들의 부분적지도를 다 합쳐보면 그것은 거의 세계 전체에 근접할지도 모른다. 현실에 대해 틀리게 쓰면, 어떤 부분이 왜곡되어 있거나구멍이 나 있으면 반드시 누군가는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책을 읽은 수천수만 명의 사람 중 단 한 명에 불과하더라도 - P89

모호함을 부정하지 않고, 정답 없음을 직면하되, 잠정적 결론을 내리기를 무작정 유예하지는 않는 단호함.
나에게는 이 시기 읽은 책들이 이런 태도를 지닌 것처럼 느껴졌다. - P92

작업실로 출퇴근하기 시작하면서 여행은 금세 일상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면 오픈 시간에 맞춰작업실로 달려가 자리를 잡고, 두 시간쯤 일을 하다가 간단한점심을 먹고, 또 저녁까지 일을 하고, 저녁을 먹고 다시 돌아와보면....… 어느새 같은 공간을 쓰던 사람들은 모두 퇴근하고 나만 남아 있었다. 그런 날이 몇 번 반복되자 한 가지 깨달음을 얻고 말았다. 실은 그동안 부정해왔을 뿐 나도 너무나K-일중독자 근성이 뼈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 P95

여기까지는 사례를 모으기가 수월했지만 그다음이 어려웠다. 나는 비판뿐만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고 싶었다. 장애를단지 과학기술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바라보는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점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장애 당사자들의 삶에 이전보다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다면 장애인을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기술과 장애인을 실제로 돕는 기술이 따로 있는 것일까? 글쎄,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선이 애초에 존재하기는 할까? 만약 기술에 대한 비현실적 낙관도비관도 아닌 그 사이의 어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대안은 없을까? 대립 혹은수용만이 있는 것일까?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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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목씨와 말을 섞을 수 있었던 건 갑작스럽게 울린 화재경보 때문이었다. 칠 년이 지났지만 경은 그때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상영관 안에 화재경보가 울렸을 때, 경은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를 비비며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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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사람들 얼굴이 다 다르잖아요.
다 마음에 들어요.
다 다른 사람들이에요.
사람들 얼굴과 생김새가 다 다르니까,
계속 그림을 그려요.
다 예뻐요.

못난 사람은 없어요다 얼굴이 예쁜데,
왜 본인이 못생겼다, 얼굴을 깎아라 그래요?
자기더러 못생겼다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자신감에이 뭐, 저는 경쟁 같은 거 없어요.
저는 저이니까요.
•긴장이 없어요, 저는. 아예.
저는 잘하니까.
긴장 없이 뭐든 할 수 있는 자신감!
긴장할 게 뭐 있어요.
할 수 있는 만큼 해야죠.

내가 모은 은혜씨의 기록과 사진들은 참으로 많다. 그것을 뒤적이고 있노라면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지 않은데 침울해지기도 한다. 그와동시에 너무나 사랑스러운 애교가 뿜어져나와 웃음 짓기도 한다.

은혜씨는 세상에 태어나 축복이 아닌 근심의 존재로, ‘네가 무슨 쓸모가있을까‘ 싶은 하등한 인간에게 보내는 차가운 눈빛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며마음의 병을 앓았다. 성인이 되어서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자리할 데 없이 밀려나모든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완전히 무시당하는 잔인한 벌을 견뎠다. 그런은혜씨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묵묵히 그림 그리는행위를 통해 자기에게 숙명적으로 주어진 존재론적 장벽과 한계, 그에 기인한마음의 상처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를 치유하며 잔인한 형벌의 시간을 예술로승화시켰다. ‘나 같은 이는 왜 장애인으로 태어났을까‘ 자책하던 과거에서 "어머,
원래 예쁜데요 뭘~"이라며 이제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존재로거듭나고 있다

이제는 우리 가족의 부양의무자가 되어 꿈을 모두 이루었다고 자신 있게말하는 은혜씨는 지금도 양평의 작은 작업실에서 동료들과 그림 그리며 먼미래를 향한 부질없는 걱정 대신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은혜씨의 그림자 뒤에서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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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입니다. 이렇게 큰 눈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어렸을 때 보던 만화책에는 눈송이가 커다란 동그라미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지요. - P185

오늘 같은 날 반복 재생으로 듣는 음악이 있습니다. 레메디오스의「His smile」이라는 곡이에요. 겨울이면 생각나는 영화 「러브레터」의 사운드트랙 중 첫번째 곡입니다. 이 단순한 연주곡의 뒤편에 묵직하게 깔리는 배음은 가볍게 흩날리되 무겁게 고여드는눈의 속성을 은은하게 들려줍니다. - P187

눈이 녹지 않기를 바라며 저녁을 기다린 것은 이계절만의 특별한 즐거움인 ‘눈과 술의 양동이‘를 위해서입니다. 옥상에서 깨끗한 눈이 가장 풍성하게쌓인 곳을 골라 양동이에 가득 담아왔어요. - P189

완성된 결과물이 그간의 고통을 상쇄할 만큼 귀하고 드문 맛을 내는것도 중요한 점. 깊어가는 가을밤 마롱글라세 한알과 꼬냑혹은 레드와인 한잔은 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포기하기 어려운 조합이다. - P194

매일이 비슷한 것 같지만 어느 순간 깊어지고 무언가 추가되는……… 어디까지가 과정이고 어디서부터 완성일까. 시를 어디서 끝내야 하는 걸까. 잠들기깊은 밤과 일어나기 힘든 아침이 반복된다. - P200

지혈을 하고 밴드를 붙인 뒤 약간 잠겨버린 기분으로유자를 마저 썰고 청을 끓이기 시작했다. 껍질과 과육과 즙을 잘 섞고 꿀과 레몬즙을 더한다. 상처를 받는다‘는 말이새삼 이상하게 느껴졌다. 상처는 누가 갑작스럽게 맡겨두고 간 선물인가. 아니면 수신인이 불분명한 반송우편인가. - P209

잘 볶아서 숙성시킨 원두를 분쇄해 첫 물을 따르면 솟아오르는 짙은 밤색의 언덕. 여과지 끝이 조금씩 갈색으로물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팽창하며 끓어오르는 거품들. 이 장면은 드립커피를 내릴 때 만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자 나무와 씨앗이 걸어온 기나긴 여정의 최고조를 이룬다. - P215

가지를 떠났던 잎사귀가 오랜 시간을 마르고 젖고 으깨어져 다시 뿌리로 흡수되는 감각으로, 땅과 물과 불과 나무가 하나의 잔 속에서 비로소 뒤섞인다. - P216

음식을 내기 전 깨소금을 뿌리거나 지단 등의 고명을올리는 것은 접시를 받는 이에게 ‘당신이 처음‘임을 알리는의미라고 합니다. 선물에 리본을 묶어 직접 풀어보도록 하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 P217

이제 혼자 껴안고 있던 솥을 내려놓고 함께 마주할식탁을 향해 걸어온 것 같아요. 요리를 통해 조금 더 따듯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주어진 순간들을 공들여 매만져 하나의 최선을 만들어내는 기쁨으로. 그래서 저에게 그릇에 음식을 담는 행위와 종이에 글씨를 올리는 일은 때로구별되지 않습니다. 요리는 접시에 쓴 시, 시는 종이에 담아낸 요리 같습니다. - P219

좋아해요, 말하고 싶은 순간마다 요리를 했습니다. 당신을 이렇게 많이 생각합니다, 선언하는 마음으로 접시를놓았습니다. 식탁에 마주 앉은 소중한 사람들이 있어 매 순간 행복하게 요리할 수 있었어요. 옥탑에 머물렀던 계절과시간을 담아 보냅니다. 이 고백이 당신에게 무사히 가닿기를 바랍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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