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입니다. 이렇게 큰 눈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어렸을 때 보던 만화책에는 눈송이가 커다란 동그라미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지요. - P185

오늘 같은 날 반복 재생으로 듣는 음악이 있습니다. 레메디오스의「His smile」이라는 곡이에요. 겨울이면 생각나는 영화 「러브레터」의 사운드트랙 중 첫번째 곡입니다. 이 단순한 연주곡의 뒤편에 묵직하게 깔리는 배음은 가볍게 흩날리되 무겁게 고여드는눈의 속성을 은은하게 들려줍니다. - P187

눈이 녹지 않기를 바라며 저녁을 기다린 것은 이계절만의 특별한 즐거움인 ‘눈과 술의 양동이‘를 위해서입니다. 옥상에서 깨끗한 눈이 가장 풍성하게쌓인 곳을 골라 양동이에 가득 담아왔어요. - P189

완성된 결과물이 그간의 고통을 상쇄할 만큼 귀하고 드문 맛을 내는것도 중요한 점. 깊어가는 가을밤 마롱글라세 한알과 꼬냑혹은 레드와인 한잔은 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포기하기 어려운 조합이다. - P194

매일이 비슷한 것 같지만 어느 순간 깊어지고 무언가 추가되는……… 어디까지가 과정이고 어디서부터 완성일까. 시를 어디서 끝내야 하는 걸까. 잠들기깊은 밤과 일어나기 힘든 아침이 반복된다. - P200

지혈을 하고 밴드를 붙인 뒤 약간 잠겨버린 기분으로유자를 마저 썰고 청을 끓이기 시작했다. 껍질과 과육과 즙을 잘 섞고 꿀과 레몬즙을 더한다. 상처를 받는다‘는 말이새삼 이상하게 느껴졌다. 상처는 누가 갑작스럽게 맡겨두고 간 선물인가. 아니면 수신인이 불분명한 반송우편인가. - P209

잘 볶아서 숙성시킨 원두를 분쇄해 첫 물을 따르면 솟아오르는 짙은 밤색의 언덕. 여과지 끝이 조금씩 갈색으로물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팽창하며 끓어오르는 거품들. 이 장면은 드립커피를 내릴 때 만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자 나무와 씨앗이 걸어온 기나긴 여정의 최고조를 이룬다. - P215

가지를 떠났던 잎사귀가 오랜 시간을 마르고 젖고 으깨어져 다시 뿌리로 흡수되는 감각으로, 땅과 물과 불과 나무가 하나의 잔 속에서 비로소 뒤섞인다. - P216

음식을 내기 전 깨소금을 뿌리거나 지단 등의 고명을올리는 것은 접시를 받는 이에게 ‘당신이 처음‘임을 알리는의미라고 합니다. 선물에 리본을 묶어 직접 풀어보도록 하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 P217

이제 혼자 껴안고 있던 솥을 내려놓고 함께 마주할식탁을 향해 걸어온 것 같아요. 요리를 통해 조금 더 따듯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주어진 순간들을 공들여 매만져 하나의 최선을 만들어내는 기쁨으로. 그래서 저에게 그릇에 음식을 담는 행위와 종이에 글씨를 올리는 일은 때로구별되지 않습니다. 요리는 접시에 쓴 시, 시는 종이에 담아낸 요리 같습니다. - P219

좋아해요, 말하고 싶은 순간마다 요리를 했습니다. 당신을 이렇게 많이 생각합니다, 선언하는 마음으로 접시를놓았습니다. 식탁에 마주 앉은 소중한 사람들이 있어 매 순간 행복하게 요리할 수 있었어요. 옥탑에 머물렀던 계절과시간을 담아 보냅니다. 이 고백이 당신에게 무사히 가닿기를 바랍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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