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SF를 쓰려는 사람들에게 ‘SF란 무엇인가‘의 미로 속에서 한번 길을 잃어보는 것이 가치 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그 시간은 가치 있었다. 미로를헤매며 SF 세계의 복잡하고 종잡을 수 없는 특성을 직접 몸으로 체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탐험할 드넓은 세계의약도를 대략적으로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 P56

소재를 정했다고 이야기가 바로 떠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엇을 쓰기로 결심하면 그에 대한 자료를 계속 찾아본다. 아무리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아도 관련된 책을 열권정도 읽으면 그 사이에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가급적 이전에는 잘 모르던 것들, 낯설고 새로운 개념을 알려주는 책일수록 좋다. - P57

과학책을 읽을 때 나는 무조건 연필과 플래그를 지참한다. - P65

가끔은 소설 쓰기를 낯선 여행지의 가이드가 되는 일에 비유한다. 나에게는 이 세계를 먼저 탐험하고 이곳이 지닌 매력을 독자들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다. 출발지점에서, 낯선 여행지는 아직 내게도 안개로 덮인 듯 뿌옇게 보인다. 그렇지만안갯속에서 초고를 쓰고, 많은 자료를 읽고 공부하고 가져와길목 구석구석을 점차 구체화하고, 또다시 쓰고 고치다보면안개가 걷히기 시작한다. 공기의 냄새가 느껴지고 사각사각밟히는 나뭇잎 소리가 들려온다. 시야가 점차 맑아지고 풍경이 선명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그 여행지의 풍경속에 정말로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비로소 나는 이소설을 쓸 준비가 된 것이다. - P71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소설과 논픽션은 어떻게 다를까? 나에게는 둘의 차이가 ‘세계의 안개‘가 있냐 없냐의 차이 같다. - P86

하지만 작가는 개별독자가 아닌 전체 독자를 생각해야 한다. 개별 독자는 부분적인 지도만을 갖지만, 이 책을 읽을 잠정적 독자들의 부분적지도를 다 합쳐보면 그것은 거의 세계 전체에 근접할지도 모른다. 현실에 대해 틀리게 쓰면, 어떤 부분이 왜곡되어 있거나구멍이 나 있으면 반드시 누군가는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책을 읽은 수천수만 명의 사람 중 단 한 명에 불과하더라도 - P89

모호함을 부정하지 않고, 정답 없음을 직면하되, 잠정적 결론을 내리기를 무작정 유예하지는 않는 단호함.
나에게는 이 시기 읽은 책들이 이런 태도를 지닌 것처럼 느껴졌다. - P92

작업실로 출퇴근하기 시작하면서 여행은 금세 일상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면 오픈 시간에 맞춰작업실로 달려가 자리를 잡고, 두 시간쯤 일을 하다가 간단한점심을 먹고, 또 저녁까지 일을 하고, 저녁을 먹고 다시 돌아와보면....… 어느새 같은 공간을 쓰던 사람들은 모두 퇴근하고 나만 남아 있었다. 그런 날이 몇 번 반복되자 한 가지 깨달음을 얻고 말았다. 실은 그동안 부정해왔을 뿐 나도 너무나K-일중독자 근성이 뼈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 P95

여기까지는 사례를 모으기가 수월했지만 그다음이 어려웠다. 나는 비판뿐만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고 싶었다. 장애를단지 과학기술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바라보는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점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장애 당사자들의 삶에 이전보다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다면 장애인을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기술과 장애인을 실제로 돕는 기술이 따로 있는 것일까? 글쎄,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선이 애초에 존재하기는 할까? 만약 기술에 대한 비현실적 낙관도비관도 아닌 그 사이의 어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대안은 없을까? 대립 혹은수용만이 있는 것일까?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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