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 위기가 존재한다. 바로 이 공백 기간이야말로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출현하는 때다."
- 안토니오 그람시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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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여성을 착취하며 확보한 시야로 여성이 착취당하는 것에 분노하고, 이따금 착취당한 여성을 그 분노로 몰아세우는 딸. 못돼먹고, 강압적이고,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딸,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면서 머릿속으로 엄마에게 폭력을 가하는 딸. 이따금 폭력은 상상만으로도상처를 낸다. 증발되고 새어 나가 듣는 이를 밀어내고 다치게 한다. 나 역시 끊었던 만큼 화상을 입는다. 내상은 삶에 치명적이다.
모르는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을 더 견디지 못할 것만 같다고 쓴다. 항상 그런 문장에 마음이 쓰인다. 왜 나는 안희정보다 미경에게 상처를 받는가. 나의 페미니즘은 왜 엄마를 밀어내는가. 페미니스트이길 바라게 되는 얼굴,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든 얼굴…. 가장 이해받고 싶은 사람과 가장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자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 면면에 다림질을 하듯 공들여 기대를 걸다가도 그 얼굴들을 어떤식으로든 구겨 버리고 싶던 밤마다 잠을 설친다. 세상의 도덕적 쓸모를 자처하려는 내 마음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느린 누군가에 대한미움이 알알이 박혀 있다. 인내 없이 타인을 내려다보던 내 눈길이 내가 진저리치던 무엇과 많이 담아 있을 때면, 마음과 미움의 획이 왜같은 숫자인지 알 것만 같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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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 생활은 넌더리 날 정도로 학을 뗐던 덕분에 행정고시 같은 시험류는 제 진로에서 배제를 했고, 일찍부터 취업 준비를 했어요. 이왕 취업 준비를 할 거면 회사가 매력적으로 느낄 만한 카드를 다 손에 쥐고 있자‘는 생각으로 되게 촘촘하게 준비했고요. 나는 성실한 시녀니까.
(웃음) - P17

동료나 선후배들은 괜찮았어요? 회사 생활 힘들게 하는 게 일이나 조직문화도 있지만, 사람이 힘들게 하면 그 고통이 배가되잖아요.
그 부분에도 사실 팟캐스트가 되게 도움이 됐는데, 제가 월 하면 조용히 하지 않고 동네방네 떠들면서 하거든요. 팟캐스트도 하다 보니까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회사에서 친해진 과장님, 차장님들한테 내가 이런 거 하고 있다. 근데 은근히 반응이 좋다‘ 그렸더니 그분들이 열심히 들어주시더라고요. 거의 1호 퇴사러 팬이랄까? 그때 느꼈던 것 같아요. 겉으로 봤을 때는 이 사람들이 되게 무뚝뚝하고 똑같은 정장에 독같은 넥타이 메고 회사 생활하는 사람들인데, 한꺼풀 벗겨놓고 보니까 사실은 나랑 같은 고민을 하고 있고 나랑 비슷한 지점에서 고통받고아파하는 인간인 거예요. 일로 묶였을 때는 사실 되게 피곤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지만, 회사 밖의 다른 이슈로 얘기를 꺼내니까 생각보다 인간적으로 잘 통하는 거죠. 그러면서 갈등이 해소된 경우도 있었던 것 같아요. - P26

365일 동안 했던 일들이 주는 성취감과 회사에서 느꼈던 성취감이 어떻게 질적으로 다르게 느껴졌는지도 궁금하네요.
우리는 돈에 얼굴이 없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근데 저는 돈에도 얼굴이 있는 것 같아요. 회사에 소속되어 한 달 동안 일하고 번 300만 원과, 내가 회사 밖에서 삽질하고 고군분투해서 번 돈 150만 원, 이 둘을 비교하면 숫자적으로는 당연히 회사에서 번 돈이 많지만, 저는 후자의 방법으로 번 150만 원이라는 돈이 더 밀도 있고, 단단하고, 튼튼한 돈인 것 같아요. ‘근육질의 돈‘이랄까요? 앞으로 저는 그런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어요. - P38

그게 결국 특별히 못된 사람이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이 그만큼 일반적이고 뿌리 깊다는 뜻인 것 같아요.
또 힘들었던 게,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자리였어요. "저 청소 일 해요."라고 하면 "네?" 이래요. 그럼 또 설명을 해야 돼요. 이 일을 왜 하게됐는지부터.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사실 누가 처음 만나서 ‘저 회사 다녀요. 이러면 "어?" 이러지 않잖아요. 저 사람이 왜 멈칫하는지 저는 아니까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초조해지고, 안 그러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그런 부분이 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딱 정해진,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삶이 아니라서 더 설명하기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요. - P54

어릴 때 ‘꿈이 뭐야?‘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의사, 대통령, 선생님 이런 거 얘기하잖아요. 근데 제가 오래전에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봤는데, 외국에서는 꿈이 뭐냐고 했을 때 직업을 얘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삶을 살지를 꿈이라고 얘기한대요. ‘직업 꿈‘으로 얘기하는 게 우리나라나,
우리 사회와 비슷한 곳에서 주로 그렇다더라고요. 예지 님은 지금 다시 꿈이 뭐야?‘라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할 거예요? - P62

‘덕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이유는 뭔가요?
제가 회사를 다닐 때 택배로 물건 시킨 걸 보고 사람들이 되게 덕후 같다‘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왜 나한테 자꾸 덕후라고 하는 거지?‘ 기분이 별로 안 좋았죠.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오타쿠, 덕후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너무 안 좋았어요. 덕후라고 하면 돌아이, 히키코모리, 사회 부적응자 같은 느낌이었고, ‘어우 덕후 냄새 나~‘처럼 쓰일 정도로 비하하는 문화가 있었거든요.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였던 거죠. 근데그게 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도 어떻게 보면 원가를 그냥 좋아하는 것뿐이잖아요. 애니메이션 좋아하고, 게임 좋아하고, 좋아하는 걸 가지고 왜 그렇게 비난을 할까? 누구나 좋아하는 게 하나씩은 있지 않나? 미드라든가, 맛집이라든가, 자기도 평소 관심 있는 게 있고, 취미가 있을 텐데 그걸 좋아한다고 누가 욕하면 화가 나지 않을까? 그래서 생각한 거죠. ‘아, 이걸로 잡지를 만들어야겠다.‘ 사회적으로비웃는 덕후의 습성들을 각 호의 주제로 하는 잡지를 만들어서, 이걸 다섯 개 사면 덕후의 습성을 다섯 개 가졌으니까 ‘오덕후‘, 열 개를 사면
‘십덕후‘가 되는 거죠. 어떻게 보면 저를 비웃는 사람들을 반대로 비웃기 위한 책인 거예요. "너도 덕후야." 이렇게 얘기를 하려고. (웃음) - P72

그동안은 잼 자체에 너무 매몰되어 있었다면, 이제는 ‘잼있는인생‘이 사람들에게 주고 싶었던 그 재미라는 가치를 다시 재정립해 보려고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게 오히려 확장되더라고요. 인생이 재미없어지는 이유가 되게 다양하잖아요. 최근에는 그걸 진단해볼 수있는 ‘종합 노잼 검진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어요. 또 ‘잼있는인생‘이 선물용으로 많이 팔렸다고 했잖아요. 그러면서 선물 시장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예를 들어 회사에서 선물을 검색하는 건 막내고 받는 사람은 나이가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죠. 젊은 세대인 막내가 잼있는인생‘이재밌으니까 추천을 하면, 어른들은 잼은 설탕이 많아서 건강에 안 좋다고 컷을 한대요. 그걸 보고 좀 다양한 타깃을 공략할 수 있는 선물이뭐가 있을까 찾아보다가 생각한 게 ‘즙‘이에요. 이름도 정했어요. ‘내마련‘. (웃음) 우리가 내 집 마련하느라 건강을 잃었잖아요. 내 건강을위해 즙을 마련하라는 메시지로 즙 담보 건강 대출‘ 해서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있어요.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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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 지고 밤이 스며드는 시간에 지하철로 한강을 건너는 게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새삼 깨닫는다. 이 열차를 놓치고 다음열차를 탔다면, 그다음 열차가 고작 몇 분 뒤에 이어지는 거라고 해도 나를 흘린 이 풍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밤이 우리를찾아오는 속도는 차근한 것 같으면서도 순간이라서 언제 오렌지빛 등불의 조도가 바뀔지 언제 해가 조금 더 멀어질지 언제 도로 위 흐름이 바뀔지 알 수 없다. - P104

그러나 11월, 도로의 절반쯤을 낙엽이 차지하게 되는 계절에는 반드시 귀를 열어두고 자전거를 타야 한다. 귀에 다른 소리가 들어갈 기회를 노래로 틀어막아서는 안 된다. 이 시기에 자전거는 정말 재미있는 소리를 선물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낙엽을 자전거 바퀴로 누르면서 지나가면 스낵류. 특히 감자칩을 먹을 때의 바삭한 소리가 난다. 경쾌하고 고소한 소리다. 그 소리를 듣게 되면 지하철 환풍구 위로 떨어진 은행잎들조차 다르게 보인다. 모양새조차 노란 감자칩이 아닌가! 자연스레 지하철환풍구는 감자칩을 만드는 건조기나 에어프라이어가 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그렇게 온몸으로 가을칩을 만나면서 이동하는 것이다. 사가가가가각, 사가가가각. 아, 진짜 이 소리 최고다. - P113

빈자리가 많은 열차에서 하필 내 앞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는 "내가 바닥에 앉겠다는데 뭐가 문제냐!" 고 소리친 사람도 있었다. 기차와 다르게 지하철에서는 옆자리 승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일어나 자리를 옮길 수 있다. 그렇지만 가끔 나도 자리를 포기하기 싫을 때가 있어서 기 싸움이 벌어진다. 물론 옆자리에서 온기를 느낄 때도 있다. 울다가 지하철에 올라탄 적이 있는데 그때 내 옆자리 할머니가 동그랗고 작은 귤 하나를 내게 툭 내밀었다. 거의 이십 년 전 풍경인데 그 귤의 색감과 크기와 표정까지도 떠올릴 수 있다. 귤이 나에게 울지 말라고 하고 있었다. - P119

Z의 여행담은 꽤 냉담한 편이다. 그렇기에 Z를 감동시킨 여행지는 더 위대해지는 것이다. Z의 여행담을 통해 적당히 차분해진 나는 예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기도 하니 이런 방식도 나쁘지 않다. 확실히 기대와 감동이 늘 비례하는 건 아니다. 무구한 기대와 촘촘한 계획이 나를 흡족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그 반대 경우도 적지 않다. 어떤 여행을 부추길 만큼 강렬했던 사진 한 장이나 소문이 막상 여행을 시작하고 보면 미끼 정도였음을 확인할 때도 있다. 진짜는 따로 있는 것이다. - P139

29인치의 녹색 가방이 집에 도착했다. 가방이 도착했지만 나는 한동안 이 가방을 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군가가여행을 준비할 때, 몸은 맨 마지막에 마치 덤처럼 따라가는 것이니까. 몸이 닿기 전에 마음의 세포 하나하나가 먼저 수천 번의여행을 떠나는 거니까. 그렇게 따지면 지금 나는 그 수천 번의 여행을 매일 떠나는 증인지도 모르겠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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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에 수형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건가. 관성이란 집요한 것이어서항상 함께였던 이가 없을 때 느끼는 허전함이 때때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이러려고 나온 것이니까. - P69

그런데 이게 화상이 아니라구요? 엄청 뜨거웠는데,
이건 동상. 뭐, 증상은 비슷한데.
되게 뜨거웠는데, 불에 덴 것처럼.
그게, 너무 차가워서 뜨겁다고 느끼는 겁니다. - P73

고마워요. 그런데, 이런 비싼 속옷은 좀 아깝다.
나이 들수록 기분 전환이 쉽지 않잖아. 돈 좀 써야지뭐. 이쁘지? 어머니는 속옷을 꺼내 들어 보였다. 난 아직도 이런 게 좋더라. - P82

그리고 위수정 작가님에게 ‘아무도‘라는 말의 색깔은 ‘고독‘ 인지 ‘안도 인지 궁금합니다.

위수정
재게 아무도‘라는 말은 안도보다는 고독에 가깝지만 체념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안도 역시 포함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더 이상 어떤 희망도 갖지 않게 되는 순간 마음은잠잠해질 테니까요. - P100

마취 상태로 의료진에게 둘러싸인 내 몸은 낯설었다.
잠든 모습 같지도 않았고 기걸한 모습 같지도 않았다. 물론 잠든 내 모습이나 기절한 내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정확한 비교는 아니다. 저건 뭐랄까. 쓸모를 유예당한 빈 자루 같달까. - P109

그때 내 입에서 생각지도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제 아버지는 언제쯤 돈을 벌기 시작할까요? 내가 말해놓고 내가 놀랐다. 아버지에 관해서라면 나 역시 엄마처럼 완전히 포기한 줄 알았는데, 무당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나를 빤히 보며 혀를 찼다. 언니도참 딱하네. 나만큼 딱해. 고작 스무 살짜리가 참 무겁네. 이고 졌네, 이고 졌어. 나는 그 말을 아버지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최종 선언으로 이해했다. - P119

이주혜 : 번역도 소설 쓰기도 ‘세계를 읽는 행위에서 출발합니다. 세계를(텍스트를) 읽고 쓰는(옮겨 쓰는) 행위라는 점에서번역과 소설 쓰기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속도가 다르고 골몰할 때 욱신거리는 두통의 부위가 다르기는 합니다. 가장 큰 차이라면 소설을 쓰고 있을 때는 한없이 외로워지는데(제가 아니면 이 소설을 끝내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번역을 하고 있을 때는 저자와 원서라는 길잡이가 있어서꽤 든든하단 점이라고 할까요? 심지어 모르는 단어를 알려주는사전과 검색 엔진까지 있으니 번역은 장비를 잘 갖추고 높은 산에 오르는 심정인 데 반해 소설은 허술한 차림으로 동네 뒷산에올랐다가 갑작스레 소나기를 만나거나 길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막막함을 안겨줍니다. 번역을 할 때는 힘들다! 그렇지만
‘재밌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고 소설을 쓸 때는 고통스럽다!‘ 그래서 내가 밉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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