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이 지고 밤이 스며드는 시간에 지하철로 한강을 건너는 게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새삼 깨닫는다. 이 열차를 놓치고 다음열차를 탔다면, 그다음 열차가 고작 몇 분 뒤에 이어지는 거라고 해도 나를 흘린 이 풍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밤이 우리를찾아오는 속도는 차근한 것 같으면서도 순간이라서 언제 오렌지빛 등불의 조도가 바뀔지 언제 해가 조금 더 멀어질지 언제 도로 위 흐름이 바뀔지 알 수 없다. - P104

그러나 11월, 도로의 절반쯤을 낙엽이 차지하게 되는 계절에는 반드시 귀를 열어두고 자전거를 타야 한다. 귀에 다른 소리가 들어갈 기회를 노래로 틀어막아서는 안 된다. 이 시기에 자전거는 정말 재미있는 소리를 선물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낙엽을 자전거 바퀴로 누르면서 지나가면 스낵류. 특히 감자칩을 먹을 때의 바삭한 소리가 난다. 경쾌하고 고소한 소리다. 그 소리를 듣게 되면 지하철 환풍구 위로 떨어진 은행잎들조차 다르게 보인다. 모양새조차 노란 감자칩이 아닌가! 자연스레 지하철환풍구는 감자칩을 만드는 건조기나 에어프라이어가 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그렇게 온몸으로 가을칩을 만나면서 이동하는 것이다. 사가가가가각, 사가가가각. 아, 진짜 이 소리 최고다. - P113

빈자리가 많은 열차에서 하필 내 앞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는 "내가 바닥에 앉겠다는데 뭐가 문제냐!" 고 소리친 사람도 있었다. 기차와 다르게 지하철에서는 옆자리 승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일어나 자리를 옮길 수 있다. 그렇지만 가끔 나도 자리를 포기하기 싫을 때가 있어서 기 싸움이 벌어진다. 물론 옆자리에서 온기를 느낄 때도 있다. 울다가 지하철에 올라탄 적이 있는데 그때 내 옆자리 할머니가 동그랗고 작은 귤 하나를 내게 툭 내밀었다. 거의 이십 년 전 풍경인데 그 귤의 색감과 크기와 표정까지도 떠올릴 수 있다. 귤이 나에게 울지 말라고 하고 있었다. - P119

Z의 여행담은 꽤 냉담한 편이다. 그렇기에 Z를 감동시킨 여행지는 더 위대해지는 것이다. Z의 여행담을 통해 적당히 차분해진 나는 예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기도 하니 이런 방식도 나쁘지 않다. 확실히 기대와 감동이 늘 비례하는 건 아니다. 무구한 기대와 촘촘한 계획이 나를 흡족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그 반대 경우도 적지 않다. 어떤 여행을 부추길 만큼 강렬했던 사진 한 장이나 소문이 막상 여행을 시작하고 보면 미끼 정도였음을 확인할 때도 있다. 진짜는 따로 있는 것이다. - P139

29인치의 녹색 가방이 집에 도착했다. 가방이 도착했지만 나는 한동안 이 가방을 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군가가여행을 준비할 때, 몸은 맨 마지막에 마치 덤처럼 따라가는 것이니까. 몸이 닿기 전에 마음의 세포 하나하나가 먼저 수천 번의여행을 떠나는 거니까. 그렇게 따지면 지금 나는 그 수천 번의 여행을 매일 떠나는 증인지도 모르겠다. - P1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