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에 수형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건가. 관성이란 집요한 것이어서항상 함께였던 이가 없을 때 느끼는 허전함이 때때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이러려고 나온 것이니까. - P69
그런데 이게 화상이 아니라구요? 엄청 뜨거웠는데, 이건 동상. 뭐, 증상은 비슷한데. 되게 뜨거웠는데, 불에 덴 것처럼. 그게, 너무 차가워서 뜨겁다고 느끼는 겁니다. - P73
고마워요. 그런데, 이런 비싼 속옷은 좀 아깝다. 나이 들수록 기분 전환이 쉽지 않잖아. 돈 좀 써야지뭐. 이쁘지? 어머니는 속옷을 꺼내 들어 보였다. 난 아직도 이런 게 좋더라. - P82
그리고 위수정 작가님에게 ‘아무도‘라는 말의 색깔은 ‘고독‘ 인지 ‘안도 인지 궁금합니다.
위수정 재게 아무도‘라는 말은 안도보다는 고독에 가깝지만 체념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안도 역시 포함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더 이상 어떤 희망도 갖지 않게 되는 순간 마음은잠잠해질 테니까요. - P100
마취 상태로 의료진에게 둘러싸인 내 몸은 낯설었다. 잠든 모습 같지도 않았고 기걸한 모습 같지도 않았다. 물론 잠든 내 모습이나 기절한 내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정확한 비교는 아니다. 저건 뭐랄까. 쓸모를 유예당한 빈 자루 같달까. - P109
그때 내 입에서 생각지도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제 아버지는 언제쯤 돈을 벌기 시작할까요? 내가 말해놓고 내가 놀랐다. 아버지에 관해서라면 나 역시 엄마처럼 완전히 포기한 줄 알았는데, 무당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나를 빤히 보며 혀를 찼다. 언니도참 딱하네. 나만큼 딱해. 고작 스무 살짜리가 참 무겁네. 이고 졌네, 이고 졌어. 나는 그 말을 아버지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최종 선언으로 이해했다. - P119
이주혜 : 번역도 소설 쓰기도 ‘세계를 읽는 행위에서 출발합니다. 세계를(텍스트를) 읽고 쓰는(옮겨 쓰는) 행위라는 점에서번역과 소설 쓰기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속도가 다르고 골몰할 때 욱신거리는 두통의 부위가 다르기는 합니다. 가장 큰 차이라면 소설을 쓰고 있을 때는 한없이 외로워지는데(제가 아니면 이 소설을 끝내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번역을 하고 있을 때는 저자와 원서라는 길잡이가 있어서꽤 든든하단 점이라고 할까요? 심지어 모르는 단어를 알려주는사전과 검색 엔진까지 있으니 번역은 장비를 잘 갖추고 높은 산에 오르는 심정인 데 반해 소설은 허술한 차림으로 동네 뒷산에올랐다가 갑작스레 소나기를 만나거나 길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막막함을 안겨줍니다. 번역을 할 때는 힘들다! 그렇지만 ‘재밌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고 소설을 쓸 때는 고통스럽다!‘ 그래서 내가 밉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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