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를 종종 쓰곤 했었다. 진심이 온전히 담긴, 둘만이 공유하는 은밀한 연서다 보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글들이었다. 하지만 결국 인연의 끈은 끊어지기 마련이고,
끝에는 이별을 했다. 그중에는 아직도 그 편지를 버리지 않는 친구도 있다. 반면에 내게 남은 것은 손가락의 굳은살 정도다. - P135

쓰지 않은 글은아직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다. - P77

매일 매주 서점에서 게시되는 판매 순위를 보며 희비에젖던 순간들, 저게 팔려야 부모님의 세끼 밥상을 차리고 계울에 보일러라도 때 드릴 것인데 하는 내 조바심을 놀리기라도 하듯 곤두박질치던 성적, 판매 순위 따위가 나를 상징할 수는 없는데. 그런 게 내 글을 대표할 수는 없는 건데, 확인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 하는 날들에 절망하면서, 어느새 책을 냈다는 기쁨도 잠시 나는 그렇게 내가 평생 가장 사랑하던 공간을 잃어갔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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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죽기 전에 딱 두 편만 더 찍자. 단 내가 좋아하는 걸로만, 난 작으니까 조금만 찍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소박한 계획일 수 있지만, 그 누구보다 큰야망이라 벌써부터 두근댄다.
이런 마음으로 살다 보면 오늘 같은 날이 좀 더 자주 와 주지 않을까. 어두운 글 속에서 내가 빛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날이.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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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말로 하자. 그 말은 너무 못생겼어.
말의 뉘앙스와 심미적 특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눈점은 못생긴말 모텔을 도서관으로 바꾸었다. 콘돔은 책, 섹스는 독서로 하자고 했다. 가령 ‘도서관 가서 책 읽을까?‘라는 말은 ‘모텔에 가서콘돔을 끼고 성행위를 즐기자‘라는 뜻이었다. - P57

책갈피였던 시절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노래가 흘러나온다.
내 삶에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나를 주인공으로 노래를 만들고영화를 찍으면 좋겠다. 나는 더 소비되고 싶고 더 관심받고 싶다.
세상 사람들이 내 재능과 인기에 고개 숙였으면 좋겠다. 그래야더는 무시당하지 않을 테니까. 오랜 세월, 난 억눌려 살았다. 내가받아야 할 응당한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한 채 나는 두 여자의 먹고사는 일에 밀려 숨죽여 살아야 했다. . - P62

환풍기가 돌아가는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살아오며 겪었던 온갖 폭력이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폭력을 견디며 살아가는 걸까. 어떻게 그 끔찍한모멸감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걸까. 왜 나는 남들처럼 무뎌지고 담담해지지 않는 걸까. 눈점은 남보다 더 넘어지고 아파하는자신이 미웠다. - P65

밤이 되면 내 머리를 짓누르는 참기름 냄새가 더 고소해졌다.
아직 볶음밥에 뿌려져 기름지게 할 수 있다는 듯 상자 안에서 냄새를 풍겼다.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어쩌다 이렇게 소비재를 낭비하게 된 거지. 어쩌다 여자들이 이토록 섹스를 업신여기게 된 걸까. 섹스 없인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들이, 섹스 없인존재하지도 못했을 것들이, 섹스에 등돌리고 섹스의 상징이자 육체의 중심인 나를 버리겠다니. 나는 두 여자가 미웠다. 날 이렇게만든 너희, 너희 두 여자. 죽을 때까지 함께 살기로 한 여자들. 질좋은 음식을 요리해 먹고 안전하고 깨끗한 집에서 잘 살아보겠다.
는 너희 여자들! - P74

냄비에 밥과 물을 넣고 뭉근한 불에 휘저으며 먹점은 팀장에게 연차 사유를 다르게 말하는 걸 상상했다. 가족이 아파요,
애인이 몸살 났어요, 아내가 감기 기운이 있네요. 그런 말을 떠올리며 자신이 보호하고 보살펴야 할 가족은 눈점인데, 눈점이 아플 때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에 가슴이 저렸다. 지난달, 고양이를 키우는 동료가 고양이가 아파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며 조퇴를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고양이도 식구고 가족이라며 잘 다녀오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나와 눈점이는? 우리는 반려동물과반려인의 관계도 못 되는 걸까. 나와 지현이는 언제까지 먹점, 눈점이어야 할까. - P81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밝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으면 합니다. 눈은 작아도 웃는 입은 크게 그리는 눈점의 마음처럼요. - P94

마지막 장면에서 모모는 거울에 비친 안마기이자 도깨비방망이로서의 자기 모습을 보며 더이상 쓰레기차가 오는 일몰 때를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지, 동시에 "이름에 갇히고 쓸모에 묶이면 내 선언은 어떻게 되는" (91쪽) 것인지 자문한다. 이 물음은 중 중
의적이다. 새롭게 부여받은 이름에 구속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지만 사실 이는 모모 그 자신을 구속해온 ‘선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모모가 이름에 갇히고 쓸모에 묶이게 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름과 쓸모를 얻게 된 것이라면 어떨까. 물론 모모는 여전히 쓰레기차 오는 소리를 두려워하고, 해는 저물고 말 것이다. 다만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두 여자들이 모모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모모의 존재론이 다시 쓰일 거라는 사실, 그렇게 계속해서 다른 이야기와 역사가 쓰이게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 P103

근데 이건 테라스가 아니고 베란다예요.
네?
아까 테라스라고 하셨잖아요. 테라스는 일층에서 확장된 공간을 말하거든요. 여기는 사층이고 또 천장이 없으니 테라스가 아니라 베란다인 거죠. 베란다는 위층과 아래층 면적이 달라 생기는 공간이거든요. 또하나 헷갈리는 게 발코니인데, 그건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돌출 공간이고요. 사람들이 이 셋이 엄연히 다른이
건데도 자꾸 퉁쳐서 말하죠 - P114

그날 주호씨는 저한테 끝까지 거짓말을 했어요. 아니, 절반의거짓말이랄까. 윤범씨를 잘 만났다고, 같이 연극을 보고 산책을하고 서점 구경을 하고 커피를 마셨다고요. 저는 한동안 의문에잠겼어요. 그 사람이 왜 그러는 건지, 왜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만난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새벽에 무슨나쁜 꿈이라도 꾼 건지 제 팔을 꼭 끌어안은 채로 잠들어 있는 주호씨를 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이 사람은윤범씨를 만난 게 아닐까. 그날 이 사람이 만난 건 언제라도 연락해 만날 수 있는 윤범씨가 아니라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는 윤범씨가 아닐까. 이 사람은 윤범씨에 대한 마음을 처분하거나 무효화하지 않고 끝내 간직해보려는 게 아닐까. - P127

내가 써낸 그 모든 실패들 속에서도 인주씨는 한결같이 나를보며 말한다.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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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양가족과 부채 없이 안정된 직업을 가진 여자가 남자와 같이 사는 일은 어느 모로 보나 합리적이지 못했고 내목표인 조기 은퇴와 화가로서의 삶을 생각해봐도 그 모습이선뜻 그려지지는 않았다. 책 표지를 펼쳐 차례만 훑고 덮어버리는 것과 다름없던 당시의 내 연애 패턴을 고려해보아도 그랬다. 김한서와의 만남은 무척 예외적이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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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록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면 쉽게 내 앞을 가로막는 생각인 동시에나의 소중한 친구들의 입에서도 꼭 한 번은 흘러나오는 말,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같은지? 그렇다면 우리, 조금만 시간을 내서 스스로가 아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씩 떠올려보자.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아리송한 내 모습은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이렇다‘ 하고확실히 말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 P216

프리랜서로 사는 나를 아침에 일어나도록 만드는 건, 번뜩 떠오른 멋진 글감도, 당장 그리고 싶은 한 장의 그림도, 발등에 떨어진불같은 마감도, 새 문서 같은 새 하루를 맞이했다는 설렘도 아니다. 일단 오늘 아침에 마주할 오늘자 테이블이다. - P218

"어떤 맛이 나는가 하면, 눈썹 하나가 반쯤 내려오며 묘하게 찡그리게 되는 맛이 난다."
2019년에 출간한 여행 에세이에서 계란 튀김 덮밥에 대한 맛을설명하며 썼던 문장이다. 그리고 이 문장에 공감하며 사진을찍어 올리는 독자들을 보았다. 찡그리게 된다는 문장을 읽고 왜찡그려?‘라는 의문보다는 ‘그 기분 뭔지 알지!‘ 하는 공감이 더해진다. 짜증 낼 때만 찡그리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살면서 몇 번씩겪었다. 그리고 맛있다‘라는 기분은 얼마나 다양한지도 말이다. - P221

어느 맛은 한 방이 아니라 너무 놀라워서, 나도 모르게 제일 단순한 표현을 써버리기도 한다. 이 말은 생각할 것도 없이 최고의맛표현이다.
"이거 진짜 맛있다. 먹어 봐."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이 순간은 또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 P225

○튜브 영상을 보기 전에 불리기 시작한 미역과 냉장고에 몇개 안 남아 있던 토마토, 원래는 냉면에 올려 먹으려고 샀던 오이를 썰어 한 그릇에 가지런히 모아둔다. 그 위에 간장, 식초, 참기름, 참깨를 섞은 간단 소스를 부어주면 끝. ‘간식,참,참‘ 소스는 짧은 밤에 곁들이는 안주 맛으로 아주 탁월하다. 토마토와 이 소스가 안 어울릴 것 같지만, 먹어보면 고개를 양쪽으로 번갈아 기울이며 음미하고 싶어진다. 토마토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 들어 안는 맛이랄까. - P228

하지만 나라는 손님을 대충 모시기란 얼마나 쉬운가. - P229

여느 때처럼 아빠와 외식을 한 뒤 빵집에 들러 밤식빵을 사서돌아가던 날, 언니와 나는 손에 밤식빵을 든 채 걸어가는 아빠의뒷모습을 보며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우리 큰일 났다. 우리 늙어서도 밤식빵만 보면 아빠 생각나서 울겠다." - P250

르뱅쿠키를 꺼냈다. 목이 마른 상태였으나 물도 없었고 허리와 다.
리가 아팠다. 여행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집에 가고 싶었던 그때씹었던 쫀득쫀득한 르뱅쿠키. 입이 말라 퍽퍽했지만 그저 맛있기만 했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해 질 녘의 센트럴파크에서 하나를 다 먹었던 그 쿠키. 첫맛은 달콤하지만 씹을수록 견과류가 고소하게 퍼졌던 그 르뱅쿠키를 먹으며 내가 다시 뉴욕에 온 이유를상기했다. 모든 것이 다 용서되는 맛이었다. 힘든 것도, 아픈 것도,
길을 잃어서 조금 서러운 것도, 그 쿠키가 위로해준 거였다. - P258

작가가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으면, 유아적이다. 한데, 에세이는자기 이야기를 하는 장르이다. 아울러, 김윤식 문학평론가는 두 부류의 소설이 있다고 했다. 자전소설이라 밝히는 소설과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소설, 소설 역시 넓게 보면 다 자기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줄곧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하는 뻔뻔한 존재인데, 그럴수록 유아적이라 하니 뭔가 회춘하는 느낌이다. ‘응애~‘
여러분은 그저 ‘우쭈쭈‘ 하면서 읽어주시면 된다. 한 번 해보자. "우쭈쭈."
자, 그럼 시작. - P266

요컨대, 독일식 핫도그는 재료의 질이 맛의 9할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내가 핫도그를 먹었을 때는 대개 글을 쓰다가 막 나왔을 때였다. 입으로는 핫도그를 우물거렸지만, 머릿속에는 글감의 잔열이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핫도그를 먹으면서도 글을 생각했다. 적어도 재료가 훌륭하다면, ……그러니까 소설도 이야기가,
훌륭하면 수사가 화려할 필요는 없잖아.‘ 이 깨달음이 한낮에만비춰 소중했던 햇빛처럼, 수사에 서툰 나를 안아줬다. 그 후론 수사에 딱히 매달리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건 핫도그의 소시지처럼 글의 재료인 이야기니까. - P276

나올 때의 형태 그대로 한 젓가락씩 떠먹는 사람, 전부 쓱쓱 비벼 먹는 사람, 날달걀을 툭 터트려 비벼 먹는 사람, 노른자만 떠서부은 뒤 비벼 먹는 사람, 밥 가운데를 분화구처럼 구멍 내서 노른자와 낫또를 넣은 뒤 비벼 먹는 사람, 시치미와 간장을 넣어 비벼먹는 사람, 김치까지 넣어 먹는 사람 등 일일이 언급하자면, 우리집 바닥을 지면 삼아 쓴대도 모자란다(네, 저희 집 좁다는 말이죠. 잉?). - P278

모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뻘짓을 한다. 결과가 나오지 않는 노력은 쉽게 뻘짓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뻘짓 없는 세상은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 즐겁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예측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내 뻘짓이 뭘 캐낼지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갑자기 하고 싶은 뻘짓이 많아졌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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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흠이 숨겼던 『라이파이는 만화가 김산호가 1959년부터 10년간 연재한 SF물로, 당대에는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만화의 존재를 영우가 알게 된 것은 불과 보름 전이었다. 치솟은 보증금 때문에 전셋집에서 나와야 했던 영우는 조한흠의 집에 임시로 머물고 있었다. 야간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영우가 점심 무렵 일어나 소파에서 쉬고 있을 때, 조한흠이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현관문에서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늙으셨네….."
.
영우가 중얼거리며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자 조한흠이 환한 웃음을 띤 채 문밖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양쪽 입가가 찢어질 만큼 신이 난 표정이었는데 그런 표정을 아버지의 얼굴에서 본 것은 난생처음이라 영우는 무척 당황했지만 정말 당혹스러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라이파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내 눈으로 봤어!" - P75

"저기로 가자."
영우는 고개를 저었다. 정 어딘가로 가고 싶으면 저런 이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제일가까운 초원이 어디냐고 조한흠이 물었다. 골똘히 생각하던영우가 말했다.
"저긴데요?"
99
"그래? 그럼, 저기로 가자." - P78

10번져가는 얼룩을 멀거니 지켜보던 영우는고개를 돌려 조한흠의 얼굴을 바라봤다. 딱딱하게 굳었던 아버지의 얼굴에는 힘이 풀려 있었다. 조한흠은 미소인지 울음.
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영우도 그의 시선을 따라 먹먹히 그곳을 올려다봤다.
단 한 번의 돌려차기.
긴 어둠 끝에 나타난 라이파이를 영우가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P102

그와 함께한 첫 봄이 될 무렵에는 벌써 인이 박일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어떤 때보다도 그가 자기애로 충만해지는 순간은고향 이야기를 할 때였다.
부산과 울산 중간쯤 되는 곳.
부태복은 함경북도 청진시를 그렇게 표현했다. 제철업의요충지였던 그곳을 김일성이 ‘북방의 대야금도시‘라 칭했다.
는 것도, 여름이면 피서객으로 해변이 인산인해였다는 것도그가 자주 고향을 수식하는 말이었다. - P108

모든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환자의 서약서를 받아오라고 했다. 서약서는 어렵지 않게 받았을 것이다. 중환자일수록의사의 말은 신탁처럼 들리니까. - P118

삼엄한 간호 속에 회복한 그가 1인실에서 관사로 잠자리를옮긴 밤. 그는 관사 책상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 관자놀이에총구를 댔다. 공이만 쳤는데 두개골이 울렸다. 탄약을 챙긴그는 권총을 뒤춤에 찔러 넣었다. 캄캄한 계단을 따라 진료실로 내려온 그는 진료실 뒷벽에 걸려 있던 액자에서 종잇장을빼냈다. 군의관 증명서를 꼬깃꼬깃 접어 전투야상 속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야음 속으로 뛰어들었다. 허리춤에는 죽음을,
가슴에는 생존을 예비한 그가 별빛이 흔들리는 검은 강을 향해 아래로, 아래로 무작정 뛰었다. - P129

"만지지 마!"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의료진이 벙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삽시간에 얼어붙은 중환자실 한편에서 윙, 하고 모터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소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혈액샘플 수거함을 옆구리에 낀 아르바이트생이 제 할 일을 하러중환자실을 나서고 있었다. 그의 궤적을 따라 이중문이 차례로 열리자 복도 너머의 수술실 정문에서 희뿌연 빛이 비쳐들었다. - P139

텅 빈 복도에 홀로 남을 때면 사물함과 사물함 사이의작은 공간으로 들어가 낯선 풍경이 익숙해질 때까지 멍하니밖을 내다봤는데, 나는 이러한 사정을 아버지에게 말해본 적이 없다. 밤늦게 사택으로 돌아와도 제 방에 틀어박혀 책상에머물던 그는 내게 곁을 주지 않았고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돌아올 대답은 뻔했다.
불어를 더 열심히 공부하면 될 일 아니냐. - P145

그가 일을 끝내고 곁에 누워 이후의 삶을 읊는 것도 지겨웠다. 아이는 두 명만 낳자. 우리 사이에 아기가 나오면 누굴 닮아도 똑똑하겠지? 자기가 그림도 잘 그리고 예술에 조예가깊으니까 아이한테 정서적으로도 좋을 거야. 결혼하면 서울로 돌아가자. 신혼집은 목동에서 시작하고 나중에 한강이 보이는 곳으로 옮기면 되지 않을까? 못해도 광장이나 화우는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책임질게..
내 인생은 말이야.
어느 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내가 말했다.
내가 책임져.
깍지 낀 손을 베고 누운 그가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너, 남의 침대에 기어올라올 때는 좀 씻어, 네 냄새, 되게 좋같아, 라고 말한 나는 혼자 서울로 돌아와 지금의 법무법인에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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