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흠이 숨겼던 『라이파이는 만화가 김산호가 1959년부터 10년간 연재한 SF물로, 당대에는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만화의 존재를 영우가 알게 된 것은 불과 보름 전이었다. 치솟은 보증금 때문에 전셋집에서 나와야 했던 영우는 조한흠의 집에 임시로 머물고 있었다. 야간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영우가 점심 무렵 일어나 소파에서 쉬고 있을 때, 조한흠이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현관문에서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늙으셨네….."
.
영우가 중얼거리며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자 조한흠이 환한 웃음을 띤 채 문밖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양쪽 입가가 찢어질 만큼 신이 난 표정이었는데 그런 표정을 아버지의 얼굴에서 본 것은 난생처음이라 영우는 무척 당황했지만 정말 당혹스러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라이파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내 눈으로 봤어!" - P75

"저기로 가자."
영우는 고개를 저었다. 정 어딘가로 가고 싶으면 저런 이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제일가까운 초원이 어디냐고 조한흠이 물었다. 골똘히 생각하던영우가 말했다.
"저긴데요?"
99
"그래? 그럼, 저기로 가자." - P78

10번져가는 얼룩을 멀거니 지켜보던 영우는고개를 돌려 조한흠의 얼굴을 바라봤다. 딱딱하게 굳었던 아버지의 얼굴에는 힘이 풀려 있었다. 조한흠은 미소인지 울음.
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영우도 그의 시선을 따라 먹먹히 그곳을 올려다봤다.
단 한 번의 돌려차기.
긴 어둠 끝에 나타난 라이파이를 영우가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P102

그와 함께한 첫 봄이 될 무렵에는 벌써 인이 박일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어떤 때보다도 그가 자기애로 충만해지는 순간은고향 이야기를 할 때였다.
부산과 울산 중간쯤 되는 곳.
부태복은 함경북도 청진시를 그렇게 표현했다. 제철업의요충지였던 그곳을 김일성이 ‘북방의 대야금도시‘라 칭했다.
는 것도, 여름이면 피서객으로 해변이 인산인해였다는 것도그가 자주 고향을 수식하는 말이었다. - P108

모든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환자의 서약서를 받아오라고 했다. 서약서는 어렵지 않게 받았을 것이다. 중환자일수록의사의 말은 신탁처럼 들리니까. - P118

삼엄한 간호 속에 회복한 그가 1인실에서 관사로 잠자리를옮긴 밤. 그는 관사 책상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 관자놀이에총구를 댔다. 공이만 쳤는데 두개골이 울렸다. 탄약을 챙긴그는 권총을 뒤춤에 찔러 넣었다. 캄캄한 계단을 따라 진료실로 내려온 그는 진료실 뒷벽에 걸려 있던 액자에서 종잇장을빼냈다. 군의관 증명서를 꼬깃꼬깃 접어 전투야상 속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야음 속으로 뛰어들었다. 허리춤에는 죽음을,
가슴에는 생존을 예비한 그가 별빛이 흔들리는 검은 강을 향해 아래로, 아래로 무작정 뛰었다. - P129

"만지지 마!"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의료진이 벙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삽시간에 얼어붙은 중환자실 한편에서 윙, 하고 모터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소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혈액샘플 수거함을 옆구리에 낀 아르바이트생이 제 할 일을 하러중환자실을 나서고 있었다. 그의 궤적을 따라 이중문이 차례로 열리자 복도 너머의 수술실 정문에서 희뿌연 빛이 비쳐들었다. - P139

텅 빈 복도에 홀로 남을 때면 사물함과 사물함 사이의작은 공간으로 들어가 낯선 풍경이 익숙해질 때까지 멍하니밖을 내다봤는데, 나는 이러한 사정을 아버지에게 말해본 적이 없다. 밤늦게 사택으로 돌아와도 제 방에 틀어박혀 책상에머물던 그는 내게 곁을 주지 않았고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돌아올 대답은 뻔했다.
불어를 더 열심히 공부하면 될 일 아니냐. - P145

그가 일을 끝내고 곁에 누워 이후의 삶을 읊는 것도 지겨웠다. 아이는 두 명만 낳자. 우리 사이에 아기가 나오면 누굴 닮아도 똑똑하겠지? 자기가 그림도 잘 그리고 예술에 조예가깊으니까 아이한테 정서적으로도 좋을 거야. 결혼하면 서울로 돌아가자. 신혼집은 목동에서 시작하고 나중에 한강이 보이는 곳으로 옮기면 되지 않을까? 못해도 광장이나 화우는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책임질게..
내 인생은 말이야.
어느 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내가 말했다.
내가 책임져.
깍지 낀 손을 베고 누운 그가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너, 남의 침대에 기어올라올 때는 좀 씻어, 네 냄새, 되게 좋같아, 라고 말한 나는 혼자 서울로 돌아와 지금의 법무법인에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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