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말로 하자. 그 말은 너무 못생겼어. 말의 뉘앙스와 심미적 특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눈점은 못생긴말 모텔을 도서관으로 바꾸었다. 콘돔은 책, 섹스는 독서로 하자고 했다. 가령 ‘도서관 가서 책 읽을까?‘라는 말은 ‘모텔에 가서콘돔을 끼고 성행위를 즐기자‘라는 뜻이었다. - P57
책갈피였던 시절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노래가 흘러나온다. 내 삶에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나를 주인공으로 노래를 만들고영화를 찍으면 좋겠다. 나는 더 소비되고 싶고 더 관심받고 싶다. 세상 사람들이 내 재능과 인기에 고개 숙였으면 좋겠다. 그래야더는 무시당하지 않을 테니까. 오랜 세월, 난 억눌려 살았다. 내가받아야 할 응당한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한 채 나는 두 여자의 먹고사는 일에 밀려 숨죽여 살아야 했다. . - P62
환풍기가 돌아가는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살아오며 겪었던 온갖 폭력이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폭력을 견디며 살아가는 걸까. 어떻게 그 끔찍한모멸감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걸까. 왜 나는 남들처럼 무뎌지고 담담해지지 않는 걸까. 눈점은 남보다 더 넘어지고 아파하는자신이 미웠다. - P65
밤이 되면 내 머리를 짓누르는 참기름 냄새가 더 고소해졌다. 아직 볶음밥에 뿌려져 기름지게 할 수 있다는 듯 상자 안에서 냄새를 풍겼다.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어쩌다 이렇게 소비재를 낭비하게 된 거지. 어쩌다 여자들이 이토록 섹스를 업신여기게 된 걸까. 섹스 없인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들이, 섹스 없인존재하지도 못했을 것들이, 섹스에 등돌리고 섹스의 상징이자 육체의 중심인 나를 버리겠다니. 나는 두 여자가 미웠다. 날 이렇게만든 너희, 너희 두 여자. 죽을 때까지 함께 살기로 한 여자들. 질좋은 음식을 요리해 먹고 안전하고 깨끗한 집에서 잘 살아보겠다. 는 너희 여자들! - P74
냄비에 밥과 물을 넣고 뭉근한 불에 휘저으며 먹점은 팀장에게 연차 사유를 다르게 말하는 걸 상상했다. 가족이 아파요, 애인이 몸살 났어요, 아내가 감기 기운이 있네요. 그런 말을 떠올리며 자신이 보호하고 보살펴야 할 가족은 눈점인데, 눈점이 아플 때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에 가슴이 저렸다. 지난달, 고양이를 키우는 동료가 고양이가 아파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며 조퇴를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고양이도 식구고 가족이라며 잘 다녀오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나와 눈점이는? 우리는 반려동물과반려인의 관계도 못 되는 걸까. 나와 지현이는 언제까지 먹점, 눈점이어야 할까. - P81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밝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으면 합니다. 눈은 작아도 웃는 입은 크게 그리는 눈점의 마음처럼요. - P94
마지막 장면에서 모모는 거울에 비친 안마기이자 도깨비방망이로서의 자기 모습을 보며 더이상 쓰레기차가 오는 일몰 때를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지, 동시에 "이름에 갇히고 쓸모에 묶이면 내 선언은 어떻게 되는" (91쪽) 것인지 자문한다. 이 물음은 중 중 의적이다. 새롭게 부여받은 이름에 구속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지만 사실 이는 모모 그 자신을 구속해온 ‘선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모모가 이름에 갇히고 쓸모에 묶이게 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름과 쓸모를 얻게 된 것이라면 어떨까. 물론 모모는 여전히 쓰레기차 오는 소리를 두려워하고, 해는 저물고 말 것이다. 다만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두 여자들이 모모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모모의 존재론이 다시 쓰일 거라는 사실, 그렇게 계속해서 다른 이야기와 역사가 쓰이게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 P103
근데 이건 테라스가 아니고 베란다예요. 네? 아까 테라스라고 하셨잖아요. 테라스는 일층에서 확장된 공간을 말하거든요. 여기는 사층이고 또 천장이 없으니 테라스가 아니라 베란다인 거죠. 베란다는 위층과 아래층 면적이 달라 생기는 공간이거든요. 또하나 헷갈리는 게 발코니인데, 그건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돌출 공간이고요. 사람들이 이 셋이 엄연히 다른이 건데도 자꾸 퉁쳐서 말하죠 - P114
그날 주호씨는 저한테 끝까지 거짓말을 했어요. 아니, 절반의거짓말이랄까. 윤범씨를 잘 만났다고, 같이 연극을 보고 산책을하고 서점 구경을 하고 커피를 마셨다고요. 저는 한동안 의문에잠겼어요. 그 사람이 왜 그러는 건지, 왜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만난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새벽에 무슨나쁜 꿈이라도 꾼 건지 제 팔을 꼭 끌어안은 채로 잠들어 있는 주호씨를 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이 사람은윤범씨를 만난 게 아닐까. 그날 이 사람이 만난 건 언제라도 연락해 만날 수 있는 윤범씨가 아니라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는 윤범씨가 아닐까. 이 사람은 윤범씨에 대한 마음을 처분하거나 무효화하지 않고 끝내 간직해보려는 게 아닐까. - P127
내가 써낸 그 모든 실패들 속에서도 인주씨는 한결같이 나를보며 말한다.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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