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는 소파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남은 일이라곤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어제도 손님을 기다리다 하루가 다 갔다. - P95
-잠깐 들어왔다가. 석주는 재경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재경이 사람들 사이에 잠시 서 있다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모습은 변했어도 걸음걸이는 여전했다. 소파에 기대어 앉는 재경을 자세히보니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화장을 안 한 얼굴이 창백했다. - P99
-먹는 거 좋아하던 애가 왜 이렇게 못 먹냐. -그동안 너무 많이 먹어서 벌받나봐. - P103
그건 흑진주고 이건 라벤더야. 세희는 그것이 얼마나 세심하게 고민한 선물인지 강조했다. - P105
전등이 이렇게 쉽게 고장나는 건지 몰랐어. -가서 한번 보자. - P111
하나의 계절이 지났을 뿐인데 재경은 예전의 모습을 외투처럼벗어버렸다. 노인같이 마른 몸으로 앉아 있던 모습을 떠올리면 재경이 외투를 벗은 게 아니라 재경을 이루던 것들이 다 빠져나가고 외투만 남은 것 같기도 했다. - P112
멀거나 가까운 죽음을 겪으면서 인생에 대한 계산을 그만두고 계산기의 전원을 꺼버렸다. 숫자를 입력하고 빼고 더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런 마음에 도달하기까지 한참걸렸다. 이제 막 마흔 살이 된 세희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아직 계산기를 끌 때가 아니니까. 석주는 그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버거웠다. - P113
-하루하루가 다르다. 재경은 맞은편 벽에 기대앉았다. 커피에서 올라온 뜨거운김이 재경의 야윈 얼굴을 감쌌다. 석주도 뜨겁고 쓴 커피를 한모금 삼켰다. - P117
석주와 재경은 지나가버린 시간과 흘러가고 있는 시간과 인생에서 잘못 끼운 단추들에 대해 얘기했다. 앞날에 대해서는말을 아꼈다. - P119
-이렇게 지내는 데 익숙해졌어. 석주는 문을 열려다 뒤를 돌아보았다. -지나가다 또 들러. 같이 점심이나 먹자. - P120
그런데 이제는 무료함이나 갑갑함과 상관없이, 마음의 상태나 희망의 유무와 무관하게 잠잠히 기다려야 하는날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P122
사무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자 진주 귀걸이가 든 쇼핑백을전해주지 못했다는 게 떠올랐다. 석주는 문밖으로 나가 거리를 살폈다. 꽃잎이 다 떨어지고 난 뒤 가로수들의 잎사귀는 온통 초록빛이었다. 석주는 재경이 지나간 방향으로 뛰었다. 재경이 다시 한번 들르기를 기다리기에는 인생이 그리 길지 않은 것 같았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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