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의자에 앉은 게 언제더라.
최상의 작업환경을 만들겠다며 중요한 책과노트, 편지 등을 각 잡아서 배치하고 좋아하는 글귀는 직접 써서 눈에 닿는 벽마다 잔뜩붙여두었는데,
그 모습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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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은 글을 쓴 글보다사랑하기는 쉽다. 쓰지 않은 글은 아직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구원 콤플렉스가 너무 심했던 나로서는 아주 큰 결정이었다. 그동안은 누구한 사람이라도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영원히 사랑해 주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런사람을 만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연인이나친구를 사귀어도 그 마음은 충족되지 않았고,
언젠가 이별이 찾아온다는 게 너무 가슴 아팠다.

이 글은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었던 내가 쓰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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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는 순간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싶어서, 그러니까 캠핑은 무엇이고 말벡은 무엇이며 와인 선물은 또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주춤했으나, 일단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기지 않으면 안 될 것같은 강렬한 예감에 그 모든 얘기가 낯설지 않은 것처럼 양쪽 입꼬리를 느릿하게 끌어올렸다. - P113

영원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이름으로 선택한 엄마의 마음은 좋아했다. - P41

"또 봐도 재밌어."
"이미 본 거였어?"
"응, 매일 보고 싶은데 일주일에 한 번만 방영하잖아."
"볼 때마다 울어?" - P21

-음악 틀까?
눈점이 말했다. 구- 빗소리 커서 괜찮지 않아? 그 - 너무 커서 무서워.

게이 정체성에서가 아니라 예술에서 비롯되었음을믿기 위해. 그렇게 ‘나‘는 "게이 정체성에 천착"(130쪽)하는 일을소설쓰기와 동일시한다. 다시 말해 ‘나‘의 삶이 곧 예술이 된다.
내 삶이 곧 예술이므로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예술의 질료라는생각의 위험은 사소설적 경향을 띠는 동시대 소설이 당면한 문제가 아닌가. - P144

비당사자를 당사자로 개입하도록 하는 이 요청은 당사자를 사건의 직접적 경험자로만 한정하는 배타적인 당사자성과 부딪힐때 곤혹스러울 수 있다. 본래 법률 용어인 ‘당사자‘는 사건의 이해에 직접적으로 개입된 자를 일컫는 말인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가 연대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고 발화 가능성과 폭을 넓히기 위한 개념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당사자의 경험만을 절대시하면 오히려 비당사자를 생산하게 되기도 한다. - P146

기영의 집에 가는 길이었다. 밤 아홉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서로 일이 바빠 보름 만에 만나는 것이었으므로 이번 주말은기영의 집에서 함께 보내기로 약속을 해두었었다. 퇴근 후 나는언제나처럼 필라테스 학원에 가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했다. 조금지쳤고 동시에 조금 기운이 났다. 사물함에서 옷을 꺼내기 전에휴대폰부터 확인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샀다는 기영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기다리지 못하고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폈으니까 서두르라고, 물론 아이스크림은 아직 냉동고에 있을 것이고 기영의 말은 그저 나를 빨리 보고 싶다는 표현을 에둘러 한 것이라는 걸 나는 잘 알았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면 당연히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많아져서 상대가 헛소리를 해도다 알아먹을 수 있으니까. - P151

그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기영이 보고 싶어 죽겠으면서도 혼자서 공원에 앉아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는 사이 공원은 이제 이 도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 P153

사람들이 나를 남자로 착각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나는 백칠십오 센티미터의 키에 머리가 짧고 화장도 하지 않는데다 몸매가드러나지 않는 옷을 주로 입었다. 길을 가는데 총각이나 아저씨,
하고 나를 부르며 길을 묻는다든가, 찜질방에서 파란색 옷을 주며 남자 탈의실로 안내를 한다든가 하는 일들이 있었다. 언젠가인도로 여행을 갔을 때 함께 간 친구는 예외 없이 madam‘으로불렸지만 나는 때때로 ‘sir‘로 불렸다. 한참이나 내게 호객행위를하던 릭샤꾼이 포기하고 돌아서며 근데 너 남자야, 여자야? 하고대놓고 묻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 익숙했다. 남자로 오해당하면기분 나쁘지 않으냐고 누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오해당하는 건괜찮았다. 때로는 안전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성가신 건 내가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였다. - P155

사전에는 개가 개를 낳지‘ 라는말도 있었다. 그건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은 유전된다는 뜻이어야했는데, 못난 아버지 밑에서 못난 자식이 난다는 뜻이었다. 나는 개에 관련된 단어들을 더 검색해보다가 지쳐버렸다. - P163

사람들은 이 공공의 장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리하게 셔틀콕을 주고받고 있는 것 같았다. 목격자를 찾습니다.
라고 쓰여 있는 현수막이 아직 버젓이 붙어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 불운한 일은 자신들에게 일어날 리가 없다.
는 것처럼,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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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행기를 타는 것은 우리 자신의 해체를 앞둔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가장 잘 보내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곤 한다."
바로 그런 순간에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애쓴다. - P168

비행기와 극장은 여러 면에서 닮았다.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할 수 없다는 것, 한가운데 좌석이 부담스럽다는 것도 닮았고음식 냄새가 공유된다는 점도 그렇다. 가장 닮은 건 내가 두려워하는 공간이면서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바로 그런 공통점들 때문에 나는 비행기에서 영화를 자주 본다. 시급한 마감 원고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체로 영화 보기를 선택한다. 기내에서 영화를 보면 두 가지 두려움을 하나로 합칠 수 있으니까 효율적인 건지도 모른다. 1+1=2가 아니고 2in 1인 셈이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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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통 바슐라르는 「촛불」이란 아름다운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방빌은 카몽이스가 촛불이 꺼지자 자기 고양이의 눈빛에 기대어 시 쓰기를 계속한다고 적고 있다. 자기 고양이의 눈빛에 기대다니! 그런 부드럽고 섬세한 빛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곧 모든 시시한 빛 ‘저 너머‘에 있는 빛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지금은 없지만, 촛불은 있었다. 그것은 밤샘을 시작했었고, 그러는 동안 시인이 시작을 시작했다. 촛불은 영감 받은 시인과 함께, 영감을 주고받는 삶, 공동의 삶을 영위했다. 촛불 아래에서, 영감의 불 속에서, 시인은 한 행 한 행, 자기 자신의 삶을, 자신의 불타는 삶을 펼쳤다. 책상 위의 대상들에겐 모두 자기만의 희미한 후광이 있었다. 고양이가 거기, 시인의 책상 위에 앉아, 새하얀 꼬리를 온통 문갑에 대고 있었다.
* 가스통 바슐라르, 「촛불」, 다음의 숲 - P39

꺼지지 않는 촛불. 누군가 들여다볼 때 야위는 심지. 순간 맹렬히 일어서는 고양이의 눈, 그 속에 깃든 생의 비밀. 시를 쓰는 사람의 일이란 아직 촛불을 켜는 사람, 밤의 비밀을 지키려는 사람의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홀로 기대고 있는 ‘빛‘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 P40

시를 대하는 태도에는 정답도 오답도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시는 ‘이해받고 싶어 하는 장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시를 앞에 두고 이해하고 싶어 하거나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면, 아예 처음부터 다르게 접근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시‘라는 집의 입구를 다른 쪽에서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 P42

이 시에서 ‘VOU‘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고 싶으신가요? 이런 시 앞에선 이해나 의미가 무색해진답니다. 그보다 시가 시로서내는 소리, 뉘앙스,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맛보세요. 소리내어 읽어보세요. - P44

섬세하고 자상한 남자를 만나는 일은 좋다. 옆모습이 아름다운 여자를 보는 일은 좋다. 튼튼하고 견고한 물건을 만지작거리는일은 좋다. 흰 옷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멀리서 걸어올 때 좋다. 질이 좋은 스웨터를 입고, 비 오는 카페에 앉아있는 일은 좋다. - P83

좋은 눈이란 그게 시의 시작이자 전부일 수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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