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고 세살이 되던 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헤어 지고, 내가 열여섯이 되던 해, 아버지가 물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가슴속에 항아리를 품고, 이집 저집 떠도는 신세가 되고, 열일곱엔 이런 일도 있었는데요, 이팝나무 군락을 홀로 거닐던 봄밤. 크게 바람이 한번 불고, 우연히눈을 준 이팝나무 한그루 잔잔하게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뛰어내린 듯 미미한 진동, 바로 거기서 내 첫 고양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맨다리 위에 살짝 쿵, 머리를 박고 뭉그대던 파란 고양이, 달빛 닮은 노란 눈동자 빛내며 나를 오래 기다렸다고 말해주었을 때, 일순, 바람이 멈추고.
내 첫 고양이는 사랑을 쟁취하려다 한쪽 눈을 잃고, 잃어버린 한쪽 눈으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고양이였어요.
아직도 나는 지난 사랑을 생각할 때면 조용히, 내 첫 고양이를 떠올립니다. - P141
백번의 사랑을 잃고 백두번째 사랑에 빠져 걷고 있는 이 밤. 지금 여기. 저 멀리 쫑긋 세운 하얗고 작은 두 귀, 멍한 두 눈이 보입니다. 내가 잃어버린 흰 개.
나는 힘껏 달려봅니다. 안아봅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품고너무 오래 헤맨 나의 하얀 개. 따듯한 목욕. 옛날이야기. 담요위의 잠. 부드럽고 깨끗한 음식. 작고 허름한 내 방 안에서 순한 숨을 내쉬는 작은 개. 내게 이렇게 해보라는 듯이. 나는 하얀 개를 따라 누워봅니다. 눈을 감아봅니다. 어수선한 몽상의이미지를 하나하나 거두어봅니다. 하얗게 지워지는 머릿속.
순하고 느린 숨, 흰빛. 끝으로 나의 두 눈동자를 지워봅니다.
한없이 아름답고 가벼운 여름밤 내 가슴 위를 지나갑니다. - P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