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빌어도소용이없어요.
남편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번들거리는 얼굴의붉은 기운이 어둠 속에서도 뚜렷했다. 보혜는 말을 골랐다. 준비해 두었던 그럴싸한 말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착하고 이쁜 아가씨가 어쩌다 마귀 사단의올무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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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감정이 격해지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선숙은 커피를 들라는 시늉을 했고, 그녀는 머그잔을 입에가져가 입술만 축인 뒤 말을 이어갔다.

평소 같았으면 선숙은 거침없이 생각을 털어놓았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신중해야 했다.

"부끄럽군요."
……………뭐가요?"
"갑자기 온 딸을 보고 선뜻 용기가 나지않았습니다."

"따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가 봐요.
오죽하면 저한테 커피에 케이크까지 대접하며 아빠에 대해 물었겠어요. 그러니까 아는척하고, 얘기 들어주고, 여기 편의점 삼각김밥이든 캔 커피든 건네줘요. 그건 달아놔요.
내가 쏘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

"그러면, 가불을 할까요? 제가 일하게 되면 나중에 월급 주실 때 2천원 빼고 주시면됩니다."
"아니 지금 댁을 고용할지 말지도 모르는데 가불이 웬 말이에요? 경우가 없으시네!"
참다못한 선숙이 쏘아붙였다. 사내가 큰덩치를 굽실거렸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숙은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사내를 향해 현금 만 2천 원을 달라고 했다. 그제야 사내가 입을 쩍 벌리고는 냉큼 현금을 건넸다.
그녀는 그걸로 남은 복합 결제를 진행했다.
"대박! 솔로몬의 재판처럼 진짜 명쾌한 답이네요. 아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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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과 둘이서 기절 놀이를 했다. 재미있었다. 한 사람 뒤에또 한 사람이 서서 두 팔로앞사람을 안고 가슴을 최대한 세게 누르는 동안, 앞사람은 숨을 내쉬어 허파를 비운다. 한 번, 두 번, 세번, 온 힘을 다해 눌러 가슴속에 공기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면 귀에선 윙윙 소리가 나고, 머리가 빙빙 돌고, 기절해버리는 것이다.
그 느낌은 감미롭다. 어디론가 떠나는 듯한 느낌이야, 에티엔은 말했다. 그렇다, 아니면 거꾸로 뒤집힌 듯한 느낌, 혹은 물에 빠진 듯한 느낌……… 아무튼 정말 묘한 쾌감이다! - P38

맙소사, 바깥에선 비올레트 아줌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 보러나왔다가 틈을 내서 날 데리러 온 것이었다. 우리 도련님, 뭔 걱정거리라도 있어? 얼굴에 다 씌어 있는데! 내 얼굴에? 오리 알처럼하얘졌잖아. 무슨 소리야? 맞아! - P43

찜질, 가글, 목에 바르는 약, 휴식, 다 좋다. 하지만 최고의 치료는 아줌마 냄새를 맡으면서 잠드는 것이다. 아줌마는 내 집이다.
아줌마에게선 왁스, 채소, 장작불, 까만 비누, 표백제, 오래된 포도주, 담배 그리고 사과 냄새가 난다. 아줌마가 날 품 안에 안고 숄로덮어줄 때, 난 내 집으로 들어간다. 숄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아줌마의 말소리가 웅얼웅얼 들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난 잠이 든다.
깨어 보면 아줌마는 없지만 숄은 여전히 날 덮고 있다. 우리 도련님이 꿈속에서 길 잃을까 봐 덮어준 거야. 길 잃은 개들도 사냥꾼의 옷 냄새를 맡고 돌아오거든!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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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려는 노력이 축적될수록이해하고 사랑할수밖에 없어요."
_최재천

말씀드린 대로 이 책은 제가 참으로 오래전부터 꼭쓰고 싶었던 책입니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종종거리던 제 앞에 어느 날 탁월한 저널리스트 안희경 작가가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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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에게 향을 피워 바쳤다. 손을 모으고 눈을감고 고개를 숙이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할아버님, 편안하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힘주어 기도했다.
멀리서도 하마를 사랑해주세요. 마르지 않는 용기를 주세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눈을 떴다. 하마가 나를보고 있었다.

응.
싫지 않았어?
하마가 대답했다.
한 번도 안 싫었어.
내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몇 초 뒤 하마가 짐짓화난 척을 하며 물었다.

화장터에서 하마는 말했다.
삶을 구석구석 살고 싶어.
이렇게도 덧붙였다.
대충 살지 않고 창틀까지 닦듯이 살고 싶어.
허전하고 쓸쓸한 날에 그렇게 다짐하는 하마를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 곁에서 다져지는 생의 의지를알아볼 수 있었다. 그와 함께 구석구석 사는 벗이 되고 싶었다.

젊은 청년의 걸음을 글로 옮길 때는왠지 낡은 붓조차 경쾌하게 돌아간다그해 나는 나를 많이 아껴 부자가 되었지대신 애꿎은 우리 집 창고만 꽉 차게 되었네노인이 지게를 지고 뒷산을 올라간다노인이 지게를 지고 뒷산을 올라간다O

그는 나랑 너무 닮은 미지의 타인이다. 모르면서도 너무 애틋한 타인이다.

한참 만에 아름다운 팔이 내 몸을 감쌌다. 내 정수리 위로 단단한 턱과 따뜻한 숨이 닿았다. 그 순간나는 내가 여기 있으려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광이나는 공항 바닥에 영영 뿌리내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좋은 시간이 무한정 계속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알 정도로는 삶을 살아보았다.

어디서 들은 조언인데, 사는 동안 최대한 많은곳에 가서 똥을 싸랬어.
누가 그래?
내가 묻자 현희진은 턱끝을 고상하게 세우고 대답했다.
요조가 그랬던가.
이훤과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현희진은 목을 가다듬고 계속 말했다.

A그의 진짜 모부는 이렇게 좋은 곳에 얘를 한 번도 안 데려왔다. 모든 가족은 크고 작게 불행하지만대부분의 불행한 가족도 으레 하는 일들이 있다. 여름휴가철에 물가에 가는 일이랄지. 아이에게 수영복을사주는 일이랄지. 그리 대단할 것은 없지만 다들 하는그런 일들을 어떤 아이는 한 번도 못 해본 채로 어른이 된다. 나는 발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서 헤엄을 멈추고 현희진과 함께 둥둥 떠 있었다. 바다는 따뜻했고우리는 말이 없었다.

태초에 노래를 가르쳐준 어른들이 있었다. 노래와 그들을 번갈아 보며 세상을 배웠다. 그들은 내게노래를 들려주었고 나 역시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이제는 내 노래를 가장 먼저 듣는 사람이 나라는 걸 안다. 나는 내가 듣고 싶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노래한다. 부르면 부를수록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지고 미안하다고 말하고싶어진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그게 내가먼저 노래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노래가 나를 사랑할때까지 나는 노래를 짝사랑할 것이다. 이 사랑을 계속하면서 점점 더 오래된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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