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가 칼질한 것을 편집자가 또 칼질하면 그 작가의 문체가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러나 역자는 번역을 하는 사람이고, 편집자는 책을 만드는사람이다. 칼질을 하든 못질을 하든 편집자의 소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번역을 넘긴 뒤에는 전문가인 편집자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주의다. 물론 역자 교정을 볼 때, 문장을 잘못 이해하고 고친 부분이나 터무니없는 칼질과 못질은 바로잡는다. - P177

하루키는 유명한 소설가지만, 훌륭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하여 그의 소설은 도맡아 번역하고 있다. 번역을 하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많아도, 소설쓰다 번역하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거라며 은근 자화자찬하는 하루키. 요즘 우리나라에는 소설을 쓰다가 번역하는 분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 P180

탈고한 뒤에는 절대 자기 책을 돌아보지않기 때문에 어디가 빠졌는지 더해졌는지 잘 모른다고 한다. 탈고한 책을 다시 읽어보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이런 멋진 표현을 썼다. "그건 마치 벗어놓은 양말 냄새를맡는 것과 같아서." - P181

그러나 우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부품이 알고 보면 부품이 담긴 비닐봉지일때가 있다. 판매할 때는 부품을 담을 비닐봉지가 필요하지만, 조립할 때는 봉지가 필요 없다. 부품인지 비닐봉지인지 구분하는 안목은 아무래도 경험에서 나오겠으나, 되도록 깔끔한 번역을 위해서 군더더기가 될 것 같은 단어나 조사는 미련 없이 버리자. - P189

누구든 남의 번역을 보고 고치고 트집 잡는 건 참 쉬운데, 원문에 심취한 사람이 자기 번역의 문제점을 찾는 건쉽지 않다. 그래도 며칠 뒤에 다시 보면 약간은 객관적인시각으로 문장을 보게 된다. 아무리 그 작업이 "벗어놓은양말 냄새를 맡는 것"처럼 괴롭더라도 처음부터 자신의번역문을 자꾸자꾸 읽고 다듬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자. - P192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깨치는 총명함……… 이라고 자랑하고 싶지만, 번역한지 십 년도 넘은 뒤의 일이어서 부끄럽기 그지없다. - P195

"혹시 역자 후기를 읽으세요?"라고. 그랬더니 번역해주는사람이 없어서 읽지 못한다고 했다. 식사시간에 우리의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그날 나의 콘셉트는 과묵한 여자였다(……… 라고 하기에는 한국말이 통하는 주위 사람들과는 수다를많이 떨었구나). - P205

그런데 간절히 원했던 그 판권은 메일을 보내기 전에 이미 결론이 났었는지, 머잖아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다행히(?) 잘나가지 않았다(이거 무슨 놀부 마누라 심보람).
한국어만큼 자유롭게 일본어를 구사한다면 꼭 메일을쓰고 싶은 작가가 있긴 하다. 바로 『애도하는 사람』의 작가인 덴도 아라타 씨다. 이유는 잘생겼기 때문에(푸하하).
『애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나의 심금을 울렸는지 얘기하고 싶고, 인터뷰에서 보니 그 책의 한국 독자들 서평을 조금이라도 읽어보고 싶다고 하던데 그 서평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나 일본어를 한국어처럼 능숙하게 구사할 날이과연 오려나. - P216

"몇만원 되지도 않는 걸 달라고 하기도 그렇고, 몇 장안되지만 그거 쓰느라 며칠을 보낸 걸 생각하면 그냥 넘어가기도 아깝고 말이지." - P219

아사다 지로는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그의 글을 읽는 이들에게 살아볼 만한 세상이구나, 하는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교정지를 받아들고 "정하야, 연필 한자루 갖다줄래?" 했더니, 딸은 굴러다니는 연필들도 많은데, 굳이 자기가 아끼는 새 연필을 깎아주었습니다. 무언으로 엄마에게 보내는응원이었는지, 번역이란 작업에 대해 나름대로 갖는 경건함인지 알 수 없지만, 아사다 지로를 처음 읽던 날, 제 손바닥만큼 휴지를 뜯어서 눈물을 닦아주던 꼬맹이가 벌써 이렇게컸구나 하는 생각에 뜬금없이 아사다 지로 표의 감동이 솟구쳐올랐습니다.
-아사다 지로, 산다화』(문학동네, 2005) - P224

다른 번역가 선생님들의 고차원적인 후기를 볼 때면 ‘나 번역가 맞나?‘ 싶긴 하지만, 쉬운 내 후기를 좋아해주는 독자들도 많아서 앞으로도 꾸준히 내 스타일대로 쓰려고 한다. 쓰는 사람이 편한 글을 써야 읽는 사람도 편할 테니까. - P230

나는 가나다라만 알면 누구든 읽을 수 있는 쉬운책을 쓰고 싶다. 읽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읽히는 책, 책을싫어하는 사람도 읽고 싶어하는 책. 이를테면 태교를 위해책은 읽어야겠는데 학교 다닐 때부터 책하고는 만리장성을 쌓은 사람을 위한 책이라든가, 복잡하고 골치 아픈 것싫어하는 젊은 층을 위한 교양 책이라든가. 세상에는 나처럼 딱딱하고 어려운 책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고 많을터, 그들에게 맞는 쉬운 책을 기획해보고 싶다. - P233

솔직히 스크루지 영감보다 더한 구두쇠에다 욕심 많고이기적인 노인네여서 좋은 아버지라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할 수 없지만, 그 성실함만은 정말 금메달감이다. - P240

부모님은 무학이니 글을 쓸 리가 없고 형제들 중에도 글을 그리 잘 쓰는 사람이 없는데, 나만 유난히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은 막내여서 아버지의 얘기를 제일 오래,
제일 많이 듣고 자란 덕분이 아닌가 싶다. - P241

늘 작가에 가려진 역자의 자리 같지만, 작가의 생각과작가가 선택한 단어와 작가의 메시지를 얼마나 독자에게잘 전달하는가 하는 것은 역시 역자의 재주다. 소설가가자연분만으로 아기를 낳는 산모라면, 번역가는 제왕절개로 아기를 낳는 산모라 생각한다. 아픔의 차이는 크겠지만, 아프지 않고 태어나는 아기는 없으리라. - P243

"이 책 꼭 하세요. 정말 괜찮은 책이에요!"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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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번역료를 수락해주면 다른 출판사에서 일이 들어올 때도 그 번역료를 제시하고, 대부분올린 번역료를 받게 되면 그때쯤 기존에 작업하던 출판사에도 조심스럽게 인상을 부탁한다. 그러나 출판사마다 번역료의 마지노선이 있어서 계속 올리긴 힘들다. 특A급 번역가 몇 분 빼고는 잘나가는 번역가들 대부분 그 마지노선에 걸려 있다. 그러니 섣불리 올렸다가 ‘그분들도 그렇게받는데 이건 뭐야‘ 하고 욕먹을지도 모른다. 오나가나 분위기 파악을 잘해야 한다. - P169

"아아, 빨리 원고지 한 장에 3엔 이상 받는 소설을 쓰고싶다."
아아, 나도 빨리 원고지 한 장에 6000원 이상 받는 번역을하고 싶다. - P167

이 사례를 보면 굳이 내가 하나하나 짚어주지 않아도기획서가 통과돼 작업을 시작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힐 것이다. 이래서 실패한 사람에게서 배울 것이 많은가 보다. - P164

전화를 할 때마다 엄마의 첫마디는 "밥 먹었냐?"다. 그리고 잘 지내라는 끝인사 대신 "제발 밖에 나가서 걷기라도 좀 해라" 하고 신신당부하신다. 결혼한 뒤로 꼬박 들었으니 한 십칠 년째 변함없는 대사다.
게을러서 끼니도 잘 챙겨 먹지 않고, 좀처럼 집 밖에 나가지 않는 인간임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에 엄마는자나 깨나 밥과 운동 걱정이다. 얼마 전에는 밥과 운동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대화를 주고받았다. - P117

"번역은 장거리 경주예요. 마라톤이라고요. 그렇게100미터 달리기하듯이 전력 질주하면 지쳐서 오래 못 해요. 한두 해 번역하다 말 거 아니잖아요?" - P123

나는 편집자의 짧은 의뢰 전화나 메일에서 나와 파장이 맞는지 안 맞는지 여부를 재빨리 간파한다. 물론 편집자와의 파장 따위가 번역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없다. - P129

그리고 일한 결과물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게 아니라
‘책‘이 되어 남는 것도 큰 장점이다. 세월과 함께 책장에늘어나는 번역서를 보며 ‘저 책이 나오던 해에 무슨 일이있었지‘ 하고 과거 여행을 하는 사소한 재미도 이 직업의즐거움이다. - P135

착실히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든 기회가 온다. 관심있는 언어권의 출판 정보가 실린 매체를 늘 가까이하기 바란다. - P161

번역으로 성공하여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일본문학 번역가는 누구인지 끝내 수수께끼로 남고 말았다. - P108

원고지 30매쯤 번역하고 나면 슬슬 지루해진다. 그럴때 잠시 쉬면서 베란다 밖의 하늘을 보며 이런저런 잡념에 빠지기도 하고, 텔레비전을 틀기도, 블로그에 잠시 글을 끄적이기도 한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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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게 추락하는 것입니다얼어버린 바닥이 멈추라고 말할 때까지 - P21

온몸에 어둠을 구겨 넣고오래도록 바라봅니다 - P20

너는 곁에 없는 모든 것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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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키모를 만들다보면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조금 짐작된다. 내 간을 빼서 줄 수는 없으니 묵묵히 아귀 간이라도 손질할 수밖에. 사랑의 어쩔 수 없음은 그렇게 온다. 최상의 것을 해주고 싶으나 차선밖에는 주지 못할 때.
더 주지 못함을 미안해하는 애달픔에 세상의 모든 맛이 깃든다. - P124

소중한 것을 감추어 더욱 유일해지고 싶은 은밀과숨겨둔 것을 갈라 그 단면을 확인하려는 욕망이 교차한다. - P126

치장하는 동시에 감추고 싶기 때문이다. 빛나는 은빛돔을 열어보이듯, 한겹 감춰져 있던 포장을 풀어 안을 발견하는 기쁨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비프 웰링턴이 가진 미학의 팔할은 가림과 꾸밈에 있다. - P127

소중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 모습을 감추고 싶어지는이유 중 하나는 그에게 더욱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욕망이겠지. 뜻밖의 기쁨이 되어주고 싶은 사람은 즐거이스스로를 잠시 삭제한다. 부재를 선물하고 사라짐으로서 사랑받기 - P130

ㄴ수확한 바질을 깨끗하게 씻어 물을 털어낸 뒤 올리브오일, 잣, 마늘 몇알, 딱딱한 치즈 한조각을 믹서나 막자에넣고 갈면 예쁜 진초록의 페스토가 완성된다. 파스타에 버무리거나 스테이크의 소스로 써도 좋고, 빵에 잼 대신 얹어도 좋고 치즈와 토마토를 넣은 샐러드에 뿌리면 간편하게카프레제를 만들 수도 있다. - P141

꼭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기로 한 결정도 큰일을 해낸 것이다. 이별은 그런 걸지도 모르지. 단호히 꽃대를 잘라내듯 지속하지 않기로 결정하기. 그러고도 어쩔 수 없이 남아버린 잉여의 감정들을 모아 쥔다. 방부제를 넣지 않은 소스들이 그렇듯 페스토도 한순간이다.
가급적 만든 당일에 다 쓰거나 길어봤자 일주일. 가끔은 상해버려서 자신이 진짜임을 증명하는 것들이 있다. 뒤도 안돌아보지. 딱 한 시절 아름답기로 했던 사람처럼. 그래. 사시사철 영원할 수 있다면 그게 어디 마음이겠니.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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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송이 하나눈동자 하나. - P51

서로의 눈 속을 걷던 시간이었다 - P49

떠올리고떠올랐지 - P45

차이와간격에 대한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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