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 P77

목소리가 다정히, 최소한의 공간으로 흘러나와 번졌다.
입술에 악물린 자국이 없었다.
눈에 핏물이 고여 있지 않았다. - P76

상상할 수 있겠니.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침묵을 본 건 처음이었어.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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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고타마에게.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제 묻히고 싶어했던 도시 제네바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 P9

젊지도,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은 여자다. 총명한 눈빛을 가졌지만, 자꾸만 눈꺼풀이 경련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보기 어렵다.
마치 세상으로부터 검은 옷 속으로 피신하려는 듯 어깨와 등은 비스듬히 굽었고, 손톱들은 지독할 만큼 바싹 깎여 있다. 왼쪽 손목에는 머리칼을 묶는 흑자주색 벨벳 밴드가 둘러져 있는데, 여자의몸에 걸쳐진 것들 중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것이다. - P12

공포는 아직 희미했다. 고통은 침묵의 뱃속에서 뜨거운 회로를드러내기 전에 망설이고 있었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있었다. - P20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어 구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입술을 뗄수 있는 언어. - P24

말하자면, 플라톤이 구사한 희랍어는 마치 막 떨어지려 하는 단단한 열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세대 이후 고대 희랍어는 급격하게 저물어갑니다. 언어와 함께 희랍 국가들 역시 쇠망을 맞게되지요.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언어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의 석양 앞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 P33

나를 용서하겠습니까.
용서할 수 없다면, 내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겠습니까. - P41

동기가 어떻든, 희랍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얼마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걸음걸이와 말의 속력이 대체로 느리고, 감정을잘 드러내지 않습니다(아마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일 테지요). - P42

문득 눈이 시어 눈물이 흐를 때가 있는데, 단순히 생리적이었던 눈물이 어째서인지 멈추지 않을때면 조용히 차도를 등지고 서서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 P45

당신의 목소리는 아마 그 생나무들의 감촉과 냄새를 닮은 어떤것일 거라고, 막연히 그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 P51

멈추시오.
TaDE.
멈추지 마시오.
μὴ παῦε나에게 물어보시오.
아무것도 나에게 묻지 마시오.
αἴτει με.
μὴαἴτει μηδέν με.
다른 방법으로 하시오. 결코 다른 방법으로 하지 마시오.
μὴ αἴτει οὐδὲν αὐτόνἄλλως ποιήσης.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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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집 주변을 산책하다가 목줄을 한 채로 혼자돌아다니는 개를 본 적이 있다. 개는 사람을 피하지도않고, 그렇다고 따라가지도 않으면서 제 갈 길이 있다는 것마냥 알아서 다녔다. - P9

일단 그런 사람을 만나면 내장에서부터 진동이 느껴져. - P11

진짜 신기해. 새벽에 일하는 사람들은 다 말랐어. - P16

어쨌거나 한 반년 동안은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처음에는 집 주변만 걷다가 나중에는 먼 곳까지 나가보기도 했다. 걷다 보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로 시작한 고민은 80세 노인이 된 미래까지 갔다가 결국에는 다시 오늘 저녁에뭐 먹지, 하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돌아올즈음에는 기력이 떨어져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 P25

치킨집 그날 이후로 나는 태수 형을 만나지 않았다.
내 잘못인가. 난 여전히 그의 그 말이 괘씸하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해 누가 누구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 말인가.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잘못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내 잘못인가. 그렇게 질문이돌고 돌다 보면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왜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나, 하는 마음이 든다. - P33

권희진 "모든 이해가 모종의 오해이고 모든 오해가 일종의 이해"라는 말이 와닿습니다. 세 사람을 그리면서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이 ‘이해‘와 ‘오해‘였거든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안다고생각하지만 실제로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평생의 과제일 수도 있겠네요. - P45

자기혐오라는 아늑한 둥지에서조차 오래 뭉개지 못했다. 한마디로 나는 집요함이 심각히 결여된 바람에 본의 아니게 속 편히 사는 스타일이었다. - P57

화면에서는 아내가 남편의 눈을 찌르려고 대못을 들고 설치고, 작은 화면에서는 목걸이로 우울증을 극복・여자가 팔뚝만 한 바늘을 휘휘 돌리며 펜싱의 찌르기 동작을 흉내 내는데, 그런 일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n&n‘s는 남의 휴대폰을 차마 함부로 끌수는 없어서 대신 베란다에 두고 옴으로써, 천지를 울리듯 노골적으로 들려오는 계시를 모른 체할 수 있지? - P65

결혼 생활 내내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아내가 명하면 남편이 받들었다. 아내가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면 남편은 이미 거기가 있었다. 아내가 꿈을 품으면남편이 그 꿈을 거의 낚아채듯 잽싸게 이뤘다. n&n‘s의입술에서는 새로운 소망, 새로운 목표, 새로운 삶의비전이 끝없이 터졌고, 지난 것이 성취되기가 무섭게 새로 돋아나는 그 꿈들을 남편이 미식축구 선수처럼 옆구리에 끼고 세상을 싸돌아다니며 깡그리 이뤘다. - P71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포기했기 때문에 집에서 구더기가 나오는 줄 안다. 하지만 의외로 구더기는 의욕이 바닥났을 때가 아니라 다시 막 샘솟을 때 나오기도한다. - P87

‘아가씨!!
이 아줌마야, ‘아가씨‘는 내가 나를 부를 때는 쓸 수있지만 당신이 나를 부를 때는 쓰면 안 되는 호칭이야,
나는 속으로 말했다.
‘선물이야. 진짜 보석은 하나도 없지만………… 시집갈때, 예물로 써!‘ - P91

그리고 글을 써나가며 막연했던 화자의이미지가 점점 잡히고, 그에 따라서 이전에 썼던 분량을 계속 수정하는 편입니다. 제가 생각한화자의 이미지가 있기는 하지만 작가가 직접 ‘캐해‘(캐릭터 해석)해버리면, 그 캐릭터는 소설을읽는 명이 만들어낼 n개의 색채를 아깝게 잃는것이므로 말을 아끼고 싶습니다. 단, 제 마음속화자는 태평하고 씩씩한 사람이었습니다. - P95

몰두의 영역과 그 몰두가 낳은 괴로운 결과가 있으시겠지요. 좋아하는 것과 깊이 연결되면서도또한 현명하게 연결을 꿇으며 좋은 균형 감각을찾는 것이 저의 한결같은 목표입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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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쿠사에 가고, 오다이바에서 도라에몽이랑 사진도 찍고, 하코네 온천도 가자.
-그래, 그래.

규호와 내가 처음 만난 곳은 지금은 망하고 없는 이태원의 한 클럽.

탁음이 섞인 저음의 목소리. 귀여운 덧니를 덮고 있는, 왠지 건조해 보이는 입술. 몹시도 친절해 보이는 그 입술을 가만히 두는 건 범죄나 다름없는 것 같았고, 나도 모르게 너에게 키스를 해버리고 말았지. 눈빛만큼이나 따뜻했던 너의 혀와 두둑하게 살진 내 혀가 포개지는게 느껴졌고, 그렇게 사랑이 시작됐으면 좋겠지만, 실은 사랑의 사자도 시작되지 않은 상태. 나는 단지 미쳐 있을 뿐이었지. 너에게? 아니. 너무 많이 마셔버린 술에, 음악에, 정신없이 깜빡이는 조명에,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답답한 공기에,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의 불행에

-그만 웃어요.
-미안해요. 근데 정말 여기까지 왜 온 거예요?
-제발 잊어달라고 하니까 더 못 잊겠던데요?
-아.... 어제는 정말 죄송했어요. 커피라도 사드릴게요. 뭐 드실래요?
-커피는 아까 마셨고, 이거 받으세요.

그렇게 질색할 필요는 없잖아요. 방금 전까지 홍대에서 술을 마셨는데 한참 모자라서요. 해는 자꾸만 뜨려고 하고 술 생각은 계속 나는데, 여기 오고 싶더라고요. 여기가 술 하나는 세게 잘 말잖아요?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세번째 법칙을 지켰다. 비록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규호는 조용히 빼고 해도 돼?라고 반말로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규호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미안해요. 끼고 하면 자꾸 죽어서.
-(그거 발기부전 환자들의 흔한 변명이라던데.) 괜찮아요. 제가 할까요?
-그건 좀・・・・・・ 제가 잘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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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하자센터를 오기 위해서 타고다닌 60번 좌석버스는 김포공항을 지나 강서구를 통과해 영등포까지 이어지는 노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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