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어요." 낸시는 아버지에게 그 말을 돌려주었다. "그냥 오는 대로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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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빨갛게 타고 타련다.
일곱 해의 첫해에도일곱 해의 마지막 해에도.
_백석, 석탄이 하는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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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 톡톡.
풀잎 끝에 맺힌 영롱한 이슬방울들이 하나둘 터집니다.
목을 축인 새끼 제비가 파란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는,
작은 두 발로 수면을 힘껏 박차 오릅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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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대한 작가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요? ‘나‘
를 발견하게 해주기 때문에 책은 중요합니다. ‘나‘를 읽게 하지 않는다면 책을 읽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니,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나‘를 읽게 하지 않는 책을 도대체 왜 읽는단 말입니까? 책을 통해 ‘나‘를 읽을 때, 나는 ‘나‘를통해 타인과 세상을 같이 읽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타인과세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해 읽는 사람과세상만이 진실합니다. ‘나‘를 배제한 어떤 사람과 세상에 대한이해도 진짜가 아닙니다. 자기에 대한 의심과 돌아봄이 없는이해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읽기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를, 사람을, 세상을 정말 잘 읽어야 합니다. - P7

그의 세상은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세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세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그러나 그는 ‘세상의 끝‘에 있다. 장소가 아니라 어떤 상태라는 건 그런 뜻이다.
끝은 그렇게 온다. 개별적으로, 세상과 상관없이. 말하자면 실존적으로, - P17

행여라도 사람은 기꺼이 자기를 찾는다고 말하지 말라.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자기 자신을 찾지 않으려고 회피한다. 어쩔 수 없이 마주할 때까지 외면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마침내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달아난다. 자기 자신이 가장 멀리있다. 끝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다. - P19

내 뒤에서 내 뒷사람이 되어 걸어보아야 한다. 그러면 네가 얼마나 빨리 나를 미워하게 되는지 보게 될 것이다. - P19

내부, 즉 ‘나‘를 보는 눈은, 그러니까 내 눈이 아니다. 내 눈으로는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다. - P25

는 부차적이다. 고백의 내용이 아니라 고백한 사실이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 P31

폐허가 되지 않은 신전이라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신전이 아닌 폐허도 역시 이 사람을 끌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람은 꿈꾸는 사람이고, 그런 곳에서만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이다. - P37

꿈이야 더 그렇지 않겠는가.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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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은 나른한 얼굴로 누런 갱지에 조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입을 딱 벌리고 하품을 하는 그의 눈에 흥건한 눈물이맺혔다. 그 현금은 자흔의 공장에 물량이 밀려 지난 일요일에특근했던 수당을 하필 이날 받는 바람에 생긴 것이었다. 자흔에게는 소중한 돈이었지만 경찰관에게야 하잘것없는 것일 터였다. 지갑도 열쇠도 주민등록증도 모두 맥 빠지는 분실물들이라는 듯이 그는 권태로운 어조로 다시 한번 물었다. - P41

내 고향, 여수가 아닐지도 몰라요. 다만 그 기차가 여수발서울행 통일호였다고 하니까 어릴 때부터 그곳이 내 고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 지나가는 얘기라도여수, 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쩡 하고 울리곤 했어요. - P43

그때, 어째서 나는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자흔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던가. 무엇이 내 몸속에서 잠들어 있던 혈관 하나하나를 끄집어내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던가. - P45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위와 눈병과 콜레라보다도 나를 괴롭혔던 것은 자흔에게서 풍겨오기 시작한 여수의 냄새였다. - P47

저녁상을 물린 뒤 자흔은 엉금엉금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고, 방문을 소리 없이 닫고 나와 그릇을 씻던 나는 기어이물 묻은 접시를 내동댕이치며 세면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 P54

세면장 타일 벽 너머의 보이지 않는 먼 곳을 응시한 채, 자흔은 길고 습기찬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니까 어디로 가든, 난 그곳으로 가는 거예요…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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