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관은 나른한 얼굴로 누런 갱지에 조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입을 딱 벌리고 하품을 하는 그의 눈에 흥건한 눈물이맺혔다. 그 현금은 자흔의 공장에 물량이 밀려 지난 일요일에특근했던 수당을 하필 이날 받는 바람에 생긴 것이었다. 자흔에게는 소중한 돈이었지만 경찰관에게야 하잘것없는 것일 터였다. 지갑도 열쇠도 주민등록증도 모두 맥 빠지는 분실물들이라는 듯이 그는 권태로운 어조로 다시 한번 물었다. - P41

내 고향, 여수가 아닐지도 몰라요. 다만 그 기차가 여수발서울행 통일호였다고 하니까 어릴 때부터 그곳이 내 고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 지나가는 얘기라도여수, 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쩡 하고 울리곤 했어요. - P43

그때, 어째서 나는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자흔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던가. 무엇이 내 몸속에서 잠들어 있던 혈관 하나하나를 끄집어내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던가. - P45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위와 눈병과 콜레라보다도 나를 괴롭혔던 것은 자흔에게서 풍겨오기 시작한 여수의 냄새였다. - P47

저녁상을 물린 뒤 자흔은 엉금엉금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고, 방문을 소리 없이 닫고 나와 그릇을 씻던 나는 기어이물 묻은 접시를 내동댕이치며 세면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 P54

세면장 타일 벽 너머의 보이지 않는 먼 곳을 응시한 채, 자흔은 길고 습기찬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니까 어디로 가든, 난 그곳으로 가는 거예요…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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