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종종 콧수염 뒤로 숨곤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콧수염이 자신을 지켜 준다고 생각했다. 그에 대해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아마 열에 아홉은 콧수염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었다. 양팔을 벌린 모양의 풍성하고 잘정리된 콧수염을. 그러나 콧수염 이외의 다른 특징을 물어보면 아홉 중 일곱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 P9

집으로 돌아간 콧수염 남자는 면도기를 손에 쥐고 거울을바라보았다.
콧수염은 아무도 해치지 않아. - P13

콧수염 남자는 술에 취한 사람에게 항상 서니사이드업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주었다. 기포 하나 없이 맨들맨들하고 보름달을 닮은 노란 노른자가 중앙에 자리 잡은 아주잘생긴 계란 프라이를. - P19

콧수염 남자는 가본 적 없는 곳의 먼 과거를 떠올렸다. 이집트를 침략한 페르시아 군대가 고양이를 앞장세우고 품에는 고양이를 한 마리씩 안고서 고양이를 그려 넣은 방패를 높이 들고 진격하는 모습을. 고양이를 신성한 존재로 여기는 이집트의 군대는 차마 공격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고 전해지는 역사를. - P23

어른이 꾸는 꿈은 쓸데없이 현실적이고 좀 시시한 구석이있단 말이지.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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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 P137

(살아 있으므로)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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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 사람은 이제 내가 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말할 때, 사랑이라는 그 텅 비고 공허한 말을 채우는 세부적인 것들을 나는 떠올리고 있다. - P155

문득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과장님은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신가요?
살아 있다면 여든은 훌쩍 넘은 나이겠지. 겨우 그 정도의말로 뭐가 바뀔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금방 알아챈다. - P159

마침내 찾은 것은 찢어지고 더러워진 두 장의 표창장이다.
다행히 작은 공로패 하나도 찾아낸다. 공로패의 꼭대기 부분이 부서져 있다. 모두 젠이 아끼던 물건들이다. 나는 그것들을휴지 조각으로 대충 닦아 낸 뒤 가방 한쪽에 담는다. - P162

나는 그 이야기도 듣는다. 듣고, 또 듣고 계속 듣는다. 얼마나 들어야 나도 비로소 어떤 말인가를 시작할 수 있을까. - P169

훌륭한 삶요? 존경받는 인생요? 그런 건, 삶이 아주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에요. 봐요. 삶은 징그럽도록 길어요. 살다 보면 다 똑같아져요. 죽는 날만 기다리게 된다고요. 사무실에 가서 물어보세요. - P173

직원에게 이틀이라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킬 마음은 없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젠을 보살필 준비가 된 것도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내가 각오하고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을 준다면얼마나 좋을까. - P177

아니요. 저희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어요. 이분은 요양원에서 제가 보살피던 분이세요. - P180

딸애가 내 손을 잡는다. 결국 울음이 새어 나온다. 나는 딸애의 품에 안긴 채, 그러나 젠이 누워 있는 침대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어린아이처럼 운다. 그렇게 울 때에 나를쾅쾅 때리며 지나가는 수많은 감정을 나는 끝내 딸애에게 다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 P189

그래도 정하셔야 해요. 대표로 이름도 올려야 하고, 저희도따로 기록하는 데가 있어서요.
제가 할게요. 그럼.
딸애가 나선다.
상주는 보통 남자분이 하시는데요. 남자분은 안 계세요? - P191

이렇게 있어줘서 고맙구나.
나는 간신히 입을 연다. 그 애는 다시 앉아야 할지,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다. 나는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 누군가 내게 너에 대해서 물을 때, 너와 내 딸에 대해서 물을 때, 여전히 무슨 말을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다. 아니다. 알고 있지만,
알게 됐지만, 여전히 그 말을 할 수 없다는 의미다. - P194

지난해 여름 이 소설을 썼다.
소설을 쓰는 동안엔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해라는 말 속엔 늘 실패로 끝나는 시도만 있다고 생각한 기억도 난다. 그럼에도 내가 아닌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소설도 끈질기게 지속되는그런 수많은 노력 중 하나가 아니었는지. - P199

가족 계획의 구호처럼, 아들이 없는 어머니는 내심 ‘열아들 부럽지 않은 딸‘을 기대한다. 그 딸이 공부를 잘한다면 더욱 그렇다. 아들이 부럽지 않을 만큼 사회적으로 성공한 딸,
그래서 여성으로서 결혼에도 성공한 딸을, 딸의 어머니는 바란다. 어머니에게 하나 있는 딸은 아들과 딸에 대한 기대를동시에 충족시켜야 하는 ‘남근적 딸‘이다. - P206

그래서 그 어머니가 아직은 레즈비언으로서의 딸을 이해하는 것을 "떳떳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내 딸의 삶을 내가놓아 버리는 것"으로 여긴다고 할지라도 조금 더 기다려 볼필요는 있지 않을까. "상관도 없는 남"이란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서로의 과거, 현재, 미래일 수 있다는 것을 안 어머니는 하루하루의 일을 무사히 마무리해 온육체의 힘으로 "기적과도 같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
무엇보다 어머니는 그 무엇과도 상관없이 각자 자신이 잘할수 있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만한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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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꿈을 꾸지 않는다. 허나 꿈을 꿀 때면, 땀에 흠뻑 젖고는 놀라서 깬다. 이럴 때는 곧장 다시금 잠을 청하지 않고 마음이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밤의 무방비한 마력에 대해 곰곰이생각해보곤 한다. 어렸을 때나 젊었을 때는 길몽도 흉몽도 꾸지 않았으나, 나이가 들어서는 지난 퇴적층으로부터 굳게 다져진 공포가계속해서 나를 휘감았다. 그 꿈은 내가 겪어봤을 법한 것보다 훨씬비극적인, 더 잘 짜여진 구성을 하고 있기에 더욱 공포스럽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그 꿈속의 일이 실제로 나에게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P7

에메렌츠를 죽인 것은 나였다.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는 말도, 여기서는 그 사실 관계를바꿀 수 없다. - P10

손님들이 방문할 거라고 알리거나, 예기치 않게 누군가가 방문할때면 그녀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왔다. 그럴 때 나는 주로그녀의 호의를 정중히 사양했다. 바로 나의 집에서, 내가 이름도 없이 지낸다는 것을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메렌츠에게는 내 남편에 대한 호칭만 있었을 뿐, 그녀에게 나는 여성작가도, 부인도 아니었다. 그녀의 삶에 마침내 내가 자리매김하기 전까지, 그녀의 관계망 속에서 내가 누구이며, 나에게 적합한 호칭은 어떤 것인지 그녀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그 기간 동안, 나에대해서는 그 어떤 호칭도 없었다. 물론 어떤 류의 성격을 가진 사람인가에 대한 파악 없이는 그 어떤 정의도 내릴 수 없기에, 이 경우에도 그녀가 옳았다. - P19

이때를 시작으로 우리는 그녀가 정신적으로 조금은 이상하고, 독특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앞으로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이 해프닝은 우리 삶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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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전해 주세요. 정말로요. 늘 궁금했다고요. 꼭 한번 찾아간다고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마디 더 한다.
만난 적이 없어요. 한 번도요. - P73

오셨어요.
그 애다.
그린은 아직 안 왔어요. 늦는대요. - P75

나는 계단 한쪽에 쪼그리고 앉는다. 충고를 해야 할까. 당부를 해야 할까. 타박을 해야 할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좋을까. 나는 아침 일찍 잠깐 들르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는다. 그런 후에는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잠들지 못하고 내내 뒤척거린다. - P85

이런 순간 삶이라는 게 얼마나 혹독한지 비로소 알 것 같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나타나고 또 다음 산이 나타나고, 어떤 기대감에 산을 넘고 마침내는 체념하면서산을 넘고, 그럼에도 삶은 결코 너그러워지는 법이 없다. 관용이나 아량을 기대할 수 없는 상대. 그러니까 결국은 지게 될싸움. 져야만 끝이 나는 싸움. - P91

왜 우리 때만 해도 안 그랬잖아요. 안 되면 안 되는 줄 알고 되면 고마워하고 그럴 줄 알았잖아요. 법 없이도 살았죠.
근데 요즘 사람들은 떼쓰고 억지 부릴 줄만 알아요. 저 아까운 시간을 저렇게 길에 다 내버리고 있다고요. - P95

지금도 안 늦었어. 적당한 사람과 결혼해라. 애도 낳고. 젊었을 땐 누구나 한 번씩 실수를 하잖니. 지금이라도 바로잡으면 그뿐이야. 나는 네 엄마야. 내가 아니면 누가 너에게 이런말을 해. 네가 어떻게 살든 남들은 아무 관심도 없고 상관도안 한다. - P103

나는 젠의 엉덩이에 욕창이 생겼다고 말한다. 상한 과일처럼 온통 짓무르고 주먹 하나를 밀어 넣을 정도로 크다고 말한다. 그래서 도저히 기저귀를 재사용할 수 없다는 말도 한다. 간호사는 세탁기를 정지하고 물을 뺀 다음 조그마한 창을 반쯤 연다. 그런 다음 분명히 선을 긋는다. - P111

저흰 7년이나 만났어요. 7년이 얼마나 긴 줄 아세요? 그런데도 왜 저와 그린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건지모르겠어요.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런 다음에는 남은 빵이 담긴 접시와 컵 두 개를 치우고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 P125

나는 고개를 젓는다.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로 보내질지도모르고 누워 있는 저 여자가 왜 나로 여겨지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무나도 분명한 그런 예감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기댈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게 저 여자의 탓일까. 이런생각을 하게 된 나는 이제 딸애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고 단념해 버린 걸까. 어쩌면 나도, 딸애도 저 여자처럼 길고긴 삶의 끝에 처박히다시피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벌을 받게될까. 어떻게든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은 걸까. - P129

근데요. 여사님. 전 속이 다 시원했어요. 아까 하신 말씀요.
답을 찾지 못한저 ㅇ그냥 그랬어요. 먹고살기 바빠서 잊어버리고 잊어버리고 그랬는데 사실 다 맞는 말이잖아요. - P135

적의와 혐오, 멸시와 폭력, 분노와 무자비, 바로 그 한가운데에 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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