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는 사람은 이제 내가 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말할 때, 사랑이라는 그 텅 비고 공허한 말을 채우는 세부적인 것들을 나는 떠올리고 있다. - P155
문득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과장님은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신가요? 살아 있다면 여든은 훌쩍 넘은 나이겠지. 겨우 그 정도의말로 뭐가 바뀔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금방 알아챈다. - P159
마침내 찾은 것은 찢어지고 더러워진 두 장의 표창장이다. 다행히 작은 공로패 하나도 찾아낸다. 공로패의 꼭대기 부분이 부서져 있다. 모두 젠이 아끼던 물건들이다. 나는 그것들을휴지 조각으로 대충 닦아 낸 뒤 가방 한쪽에 담는다. - P162
나는 그 이야기도 듣는다. 듣고, 또 듣고 계속 듣는다. 얼마나 들어야 나도 비로소 어떤 말인가를 시작할 수 있을까. - P169
훌륭한 삶요? 존경받는 인생요? 그런 건, 삶이 아주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에요. 봐요. 삶은 징그럽도록 길어요. 살다 보면 다 똑같아져요. 죽는 날만 기다리게 된다고요. 사무실에 가서 물어보세요. - P173
직원에게 이틀이라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킬 마음은 없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젠을 보살필 준비가 된 것도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내가 각오하고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을 준다면얼마나 좋을까. - P177
아니요. 저희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어요. 이분은 요양원에서 제가 보살피던 분이세요. - P180
딸애가 내 손을 잡는다. 결국 울음이 새어 나온다. 나는 딸애의 품에 안긴 채, 그러나 젠이 누워 있는 침대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어린아이처럼 운다. 그렇게 울 때에 나를쾅쾅 때리며 지나가는 수많은 감정을 나는 끝내 딸애에게 다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 P189
그래도 정하셔야 해요. 대표로 이름도 올려야 하고, 저희도따로 기록하는 데가 있어서요. 제가 할게요. 그럼. 딸애가 나선다. 상주는 보통 남자분이 하시는데요. 남자분은 안 계세요? - P191
이렇게 있어줘서 고맙구나. 나는 간신히 입을 연다. 그 애는 다시 앉아야 할지,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다. 나는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 누군가 내게 너에 대해서 물을 때, 너와 내 딸에 대해서 물을 때, 여전히 무슨 말을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다. 아니다. 알고 있지만, 알게 됐지만, 여전히 그 말을 할 수 없다는 의미다. - P194
지난해 여름 이 소설을 썼다. 소설을 쓰는 동안엔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해라는 말 속엔 늘 실패로 끝나는 시도만 있다고 생각한 기억도 난다. 그럼에도 내가 아닌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소설도 끈질기게 지속되는그런 수많은 노력 중 하나가 아니었는지. - P199
가족 계획의 구호처럼, 아들이 없는 어머니는 내심 ‘열아들 부럽지 않은 딸‘을 기대한다. 그 딸이 공부를 잘한다면 더욱 그렇다. 아들이 부럽지 않을 만큼 사회적으로 성공한 딸, 그래서 여성으로서 결혼에도 성공한 딸을, 딸의 어머니는 바란다. 어머니에게 하나 있는 딸은 아들과 딸에 대한 기대를동시에 충족시켜야 하는 ‘남근적 딸‘이다. - P206
그래서 그 어머니가 아직은 레즈비언으로서의 딸을 이해하는 것을 "떳떳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내 딸의 삶을 내가놓아 버리는 것"으로 여긴다고 할지라도 조금 더 기다려 볼필요는 있지 않을까. "상관도 없는 남"이란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서로의 과거, 현재, 미래일 수 있다는 것을 안 어머니는 하루하루의 일을 무사히 마무리해 온육체의 힘으로 "기적과도 같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 무엇보다 어머니는 그 무엇과도 상관없이 각자 자신이 잘할수 있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만한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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