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알겠다! 이제 쓸 수 있을 것 같아.‘ - P98

그다음으로 이어진 발견의 기쁨은 나의 본업인 소설 쓰기와도 관련이 있었다. 내가 SF 소설가인 만큼, 장애와 관련된SF를 소개하는 ‘장애의 미래를 상상하기‘라는 챕터를 쓰자고계획했지만 사실 뚜렷한 확신은 없었다. SF에서 장애인 캐릭터나 장애-기술이 등장하는 일은 종종 있지만 다른 소수자문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다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일단 조사를 시작하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해외 SF까지범위를 넓히니, SF를 통해 장애를 진지하게 탐구해온 작가들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P99

"독자가 지적인 자극을 넘어 이야기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려면, 자신을 뒤흔드는 문제의식이나 끝내 해결되지 않는 고민 등 조금 더 자신을 내보이는 이야기가 담겨야 하지않을까 생각했어요. 여기서 소개하는 여러 논의의 중심에 당사자인 자신의 경험과 문제의식이 놓여 있으면 좋겠어요."
편집자님의 정확한 지적에 그동안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02

그 당사자성이 장애와 과학기술이라는 주제로 책을 쓰게 된 중요한 계기이기는 하지만, 글 전체를 보았을 때 그것이 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기를 바랐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당사자성이란 매우 다루기 어려운 공처럼 느껴진다. 어떤 주제를 다루기 위한 적절한 출발지점이자 현상을 해석하는 틀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 P104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써야 나를 적절히 드러내면서도 과한 느낌을 주지 않고,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중심에두되 더 넓은 곳으로 뻗어나가는 글을 쓸 수 있을까. - P106

그 많은 사람과 내가, 국적도장애 유형도 삶의 경험도 너무나 다른 우리가 ‘장애의 경험‘이라는 느슨한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 문득 좋았다. 그들이 억압에 맞서 싸운, 각자의 전선에서 세상을 바꿔온, 비장애중심 사회에 끊임없이균열을 내온 존재들이라는 것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 P109

그런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우리 각자의 삶이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도 오직 홀로만 탁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다행한 일인지를 생각한다. - P115

소설 잘 쓰는 사람이야 이미 세상에 너무 많으니까. 그렇지만 낭만적인 곡 제목에서 따온 멋진 이름이 있다는 것은적어도 나에게는 모임에 꾸준히 참여할 만한 좋은 동기가 되었다. 소설도 일단 멋진 제목을 붙여놓으면 쓰고 싶어지는 것아닌가. 게다가 누군가 자신의 글을 기다린다는 낯선 감각 때문인지 다들 열심히 매주 짧은 글을 써왔다. 나도 예전처럼도입부만 쓰다가 버리는 대신, 어설프더라도 한 편의 완결된글을 완성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나의 본격적인 습작여정의 시작이었다. - P121

그것은 내가 글을쓰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환기하는 물건이었다. 소설이 앞으로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지 몰랐고, 그저 취미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았으며, 부업 같지만실제로는 소설로 푼돈조차 벌어들이지 못하던 시기에, 나에게는 작법서처럼 손에 닿기도 하고 펼쳐지기도 하고 묵직한질감도 느껴지는, 형태를 지닌 결심이 필요했던 것이다. - P123

효과는 엄연히 실재하는 법. 나는 그 작법서들이 지난 글쓰기의 과정에서 소망이 깃든 토템처럼 작동했다는 생각을 떨칠수 없다. 내가 소설을 쓴다는 것을, 언젠가 소설가가 될지도모른다는 것을 나는 물론이고 세상 누구도 믿지 못하던 시절에도, 책상 위에 올려진 작법서는 내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는 했다. 일단 펼치기만 하면 아이디어의 사막에서도 어딘가 뿌리 내린 선인장 하나는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나에게 주고는 했다. - P130

단편 「스펙트럼」을 쓸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아이디어는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를 뒤집는 것, 그리고 수명 관계를역전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없었다. 나는 두 번째 아이디어를 더하라는 이책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고민 끝에 루이가 인간보다 뛰어난감각을 지님으로써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언어체계를 사용한다는 것, 그로 인해 희진과 루이의 관계에 아득한 소통의 지연이 유발된다는 발상을 덧붙였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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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대스타‘, 대스타 앞에 붙은 ‘우주‘라는 말의 천연덕스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무언가가 현실성을 초월할 때 되레시시하고 만만해지는 일에 대해서. 마치단골 슈퍼에서 물건을 살 때 천원짜리를 천만 원이라고 말하는 주인아저씨의 농담처럼, 우주라는 말도 실감나지 않아서 늘 사소하고, 가질 수 없으니 늘 장난이 되는 말 같았다. 그래서 나같은 중간 저자에게도 얼마든지 우주 대스타라는 찬사가전혀 어색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일 테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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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이라는 아이가 있었어.
지진에게서 태어나, 지진이 떠나고도 수천 일째 홀로 여진.
날마다 흔들린 탓에 아무도 아이를 안아주지 못했지.
깨진 물컵을 보고 이마를 짚으면 아이의 손바닥은 금이 가.
그 수문에는 온갖 길흉이 빠져 죽었단다. - P18

눈앞이 부옇고나무가 소리 없이 고꾸라지고나비가 비명 없이 피를 흘리고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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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 말들은 가끔 범상치 않은 힘을 보여주기도한다.
이를테면 이런 말. "나 사실은 너 좀 좋아해."
이때 좀은 좀이 아니다. - P49

"작은아버지가 엄청난 강수지 팬이셨거든요. 그래서 강수지의 <시간의 향기〉라는 노래 제목을 한자화해본 거래요" - P51

"기본적으로 ‘그리움‘이라는 뜻을 품고 있기는 한데 그뉘앙스가 참 복잡해요. 슬프지만 동시에 행복하고, 돌아가고 싶을 만큼 그립지만 그렇다고 그때로 정말 돌아가고싶은 건 또 아니고…………. 영원히 감을 못 잡을 수도 있을 것같아요, 제가 그 나라 사람이 아니니까." - P67

사전에서 누락된 ‘여자 노예‘라는 단어는 오랜 우정과 신뢰의 시간을 거쳐 리지의 입을 통해 더 위대한 정의를 획득한다. - P71

"단어들은 너를 위한 거란다." - P73

말 한마디의 위력은 경험할 때마다 기가 찰 만큼 놀랍다.
고작 이 한마디 하기가 그렇게나 어려운 순간이 많다는 사실이 허탈하기도 하고, - P77

세상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남들은 안 되는 게 되는 사람들이 많다. 매운 음식을 아무리 좋아해도 매운맛에 취약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매운 음식을 먹어도매운 줄 모르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 P81

교훈은 다음과 같다.
커플 모임은 하는 게 아니다. - P85

미련한 행동은 삶의 성취감을 격상시킨다. 자기를 다그치며 몰아붙이는 데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도 유혹적이고말이다. ‘미라클 모닝‘처럼 이름과 형식을 조금 바꾼 채로자주 유행이 되기도 하는 미련한 행동에 나는 삼계절 휘둘린다. 그러나 여름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다짐한다. - P87

"우리는 보통 마음이 몸에게 말하잖아요. 몸이 마음을따라야 하고요. 그런데 달릴 때는 마음이 몸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 같아요. 반대죠."
언젠가 인터뷰 중 촬영을 도와주시던, 나처럼 달리기를좋아한다는 사진작가님께서 툭 던지듯 하신 말이다. - P87

역시 책이라는 물성에 내가 각인되는 일은 영광이다. 아무리 부끄러운 글이더라도, 누가 비웃더라도, 읽어주지 않아도, 바로 잊히게 되더라도.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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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SF를 쓰려는 사람들에게 ‘SF란 무엇인가‘의 미로 속에서 한번 길을 잃어보는 것이 가치 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그 시간은 가치 있었다. 미로를헤매며 SF 세계의 복잡하고 종잡을 수 없는 특성을 직접 몸으로 체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탐험할 드넓은 세계의약도를 대략적으로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 P56

소재를 정했다고 이야기가 바로 떠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엇을 쓰기로 결심하면 그에 대한 자료를 계속 찾아본다. 아무리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아도 관련된 책을 열권정도 읽으면 그 사이에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가급적 이전에는 잘 모르던 것들, 낯설고 새로운 개념을 알려주는 책일수록 좋다. - P57

과학책을 읽을 때 나는 무조건 연필과 플래그를 지참한다. - P65

가끔은 소설 쓰기를 낯선 여행지의 가이드가 되는 일에 비유한다. 나에게는 이 세계를 먼저 탐험하고 이곳이 지닌 매력을 독자들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다. 출발지점에서, 낯선 여행지는 아직 내게도 안개로 덮인 듯 뿌옇게 보인다. 그렇지만안갯속에서 초고를 쓰고, 많은 자료를 읽고 공부하고 가져와길목 구석구석을 점차 구체화하고, 또다시 쓰고 고치다보면안개가 걷히기 시작한다. 공기의 냄새가 느껴지고 사각사각밟히는 나뭇잎 소리가 들려온다. 시야가 점차 맑아지고 풍경이 선명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그 여행지의 풍경속에 정말로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비로소 나는 이소설을 쓸 준비가 된 것이다. - P71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소설과 논픽션은 어떻게 다를까? 나에게는 둘의 차이가 ‘세계의 안개‘가 있냐 없냐의 차이 같다. - P86

하지만 작가는 개별독자가 아닌 전체 독자를 생각해야 한다. 개별 독자는 부분적인 지도만을 갖지만, 이 책을 읽을 잠정적 독자들의 부분적지도를 다 합쳐보면 그것은 거의 세계 전체에 근접할지도 모른다. 현실에 대해 틀리게 쓰면, 어떤 부분이 왜곡되어 있거나구멍이 나 있으면 반드시 누군가는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책을 읽은 수천수만 명의 사람 중 단 한 명에 불과하더라도 - P89

모호함을 부정하지 않고, 정답 없음을 직면하되, 잠정적 결론을 내리기를 무작정 유예하지는 않는 단호함.
나에게는 이 시기 읽은 책들이 이런 태도를 지닌 것처럼 느껴졌다. - P92

작업실로 출퇴근하기 시작하면서 여행은 금세 일상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면 오픈 시간에 맞춰작업실로 달려가 자리를 잡고, 두 시간쯤 일을 하다가 간단한점심을 먹고, 또 저녁까지 일을 하고, 저녁을 먹고 다시 돌아와보면....… 어느새 같은 공간을 쓰던 사람들은 모두 퇴근하고 나만 남아 있었다. 그런 날이 몇 번 반복되자 한 가지 깨달음을 얻고 말았다. 실은 그동안 부정해왔을 뿐 나도 너무나K-일중독자 근성이 뼈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 P95

여기까지는 사례를 모으기가 수월했지만 그다음이 어려웠다. 나는 비판뿐만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고 싶었다. 장애를단지 과학기술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바라보는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점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장애 당사자들의 삶에 이전보다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다면 장애인을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기술과 장애인을 실제로 돕는 기술이 따로 있는 것일까? 글쎄,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선이 애초에 존재하기는 할까? 만약 기술에 대한 비현실적 낙관도비관도 아닌 그 사이의 어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대안은 없을까? 대립 혹은수용만이 있는 것일까?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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