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요. 나랑 같이 나가.
할머니가 한번 더 소리쳤다. 그제야 경은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상영관을 빠져나갔다. 문을 열자 빛이 쏟아졌고 경은 눈을 찌푸렸다. - P58

결말까지 보고 싶지 않아서요.
왜요? - P59

영화의 결말은 생각보다 밝았다. 경은 할머니의 입가를 바라보았다. 웃지 않아도 웃는 것 같은 얼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 P60

각자의 지정석에 앉아 영화를 감상하던 두 사람이 같은 열에 앉게 된 건 그 이후부터였다. 이목씨는 경을 동등한 존재로 대했다.
경어를 썼고, 경이 모르는 부분이 있다 해서 면박을 주거나 모멸을 느끼게 하지 않았다. - P69

그날 경이 한 말의 일부는 이목씨와 함께 본 어느 영화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아버지의 표정이 점차 굳어가고 뒤틀리는 것을 지켜보며, 차오르는 공포와 불안을 견디며 경은 영화에서 본 대사들을 짜깁기해 더듬더듬 뱉었다. 초연을 올리는 배우처럼 서툴지만,
담대하게. 비록 지금은 영화 속 대사를 차용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대사만으로 충분할 날도 올 거라 여기며. - P85

경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 P88

나는 이제 살아내지 않고, 살아가고 싶어요. 견디지 않고 받아들이면서경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이목씨의 질문에 대한 답을경은 여전히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내린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그 답을 전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빈번히 만났으면서도 서로 연락처 하나 주고받지 않았으니까. 우습게도 그랬다. 한동안 화양극장 주변을 서성이다 경은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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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은 낡은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 그냥 대충 타면된다고 했다 두려운 게 없으면 함부로 대한다 망해가는 유원지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 배를 하늘 끝까지 밀어올렸다 - P63

그런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잘 익을 것이다 - P64

빛나는 여자, 선 채로 눈감은 슬픈 저 여자대성은 지장보살을 가리키면서 이곳의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 P67

손 내밀면 확고한 형태로 있을 거예요수천 년을 건너온 은행나무처럼 - P69

나는 너의 등에 귀를 대고서일본식 소책자라도 읽는 것처럼왼편의 풍경이 오른쪽 어깨로 넘어가는 걸가만히 지켜만 보는 것인데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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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불안일지라도 비참해져도이탈을 모른 채너에게 정직한 땀을 뻘뻘 흘리며네 턱에 닿는 눈빛만으로 여름이 열리고 있었다 - P62

날아가는 기러기의 등을 보면서 실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너를 보면서 눈 밑에서 해가 타는 것을 느꼈다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았다 - P63

베란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펼쳐둔 금귤을 보는 게 좋다귤 말고 금귤의 덩치가 좋다금관악기에 매달리는 빛의 손자국이 좋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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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뻔했던 사람이 그렇듯 나는 도착한 공항에서 언제나 은은한 희열에 차 있다. 밀려 있는 일도, 추레한 몰골도그저 감사하다. 피곤함도 달고 맛있기만 하다. - P82

<Man on the Moon>을 보고나서 내가 소소하게 고집을부리며 따라 해보는 일이 있다. - P95

그렇게 원래 가진 모양과는 다른 새로운 것으로 이름은 우리 각각의 선두에 서는 것이다. ‘기녀‘라는글자와 어머니의 이름 ‘기녀‘는 같지 않다. 내 이름 ‘수진‘과
‘수진‘이라는 글자도, 그리고 물론 당신의 이름과 그 이름의 글자도 그럴 것이다. - P55

잡초는 눈에 띄는 대로 뽑고, 고추들은 올겨울에 뽑는다는 이 밭의 질서가 세워졌다. 생명의 질서에 따라붙는 슬픈 기운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이것도 어쩐지 잡초 같은 감정 같아 얼른 싹 뽑아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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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희 뭐 하세요?
사무실 입구에 문소희가 어느새 서 있다.
이정은 자신도 모르게 열쇠고리를 주머니에 넣는다. - P45

도어벨과 함께 이정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수경이 흠칫 놀라더니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한다. - P39

테이블에 잡동사니 몇 개가 늘어져 있다. 휴대폰이 테이블을 가로지른다. 사방으로 잡동사니들이 밀려난다. - P27

종열이 수경의 귓볼을 쓰다듬자 수경은 종열의 손에 볼을 댄다.
그렇게 기분에 빠져들려는데종열이 손을 빼고 지나가는 택시를 세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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