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목경이 카페에서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나 만나곤 한다. 누가 듣거나 말거나 목청껏 말하는 무신경한 사람이 아니라 카페의 모든 사람이 자기 말을 들어야 한다는 듯 심하게 거들먹대는 사람을 - P275

"물론......‘
물론 ‘물론‘이겠지, 목경은 생각했다. - P276

"저는 ‘한 방‘을 못 치기도 하지만 안 치고 싶기도 해요." - P277

"못해서 못하니까 좋은 거예요. 무능해서 귀한 거예요. 잘하는데억지로 안 하는 사람은 반드시 흔적을 남겨요. 자기 절제라는 고귀한 희생에는 어쩔 수 없는 인위가 묻어난달까요? 하하하. 세상이그렇게 공평하답니다!" - P278

"돌겠네."
동생의 머리가 뚝 떨어졌다. - P279

틈 없는 정신과 틈뿐인 몸의 간극을 메운 것은 무수한 규칙이었다. 천 가방을 챙기지 않았다면 맨손으로 모든 물건을 옮겨야 한다. 유리 용기가 없다면 생고기든굴이든 가지고 있는 것으로 싸야한다-올드 셀린, 언니가 갈색 핏물이 밴 스카프를 펼치며 말했다. 그래야 버릇을 고칠 수 있다. - P279

"도와주세요. 물건을 저에게 올려주세요."
사람들은 골칫덩이를 치우기 위해 그녀의 팔에 물건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만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애들의 생떼에서 시작해 어른들의 쾌락으로 끝나는 젠가놀이처럼. - P280

목경이 상중이라고 해서 대단한 상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고모가 죽었고 그마저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 P281

어릴 적 목경은 고모를 ‘결혼 안 한 고모‘라고 불렀다. 다른 별명으로는 ‘모래 고모‘가 있었다. 그것은 고모 자신의 농담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모는 자기 형제의 출생순서와 가치를 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목경아, 쌀보리 놀이 알지? 쌀에 손을 닫고 보리에 가만있는 놀이. 쌀만 환영하는 놀이. 그걸 우리 형제에 대보면 이리된다. 큰오빠 쌀 큰언니 보리. 작은오빠 쌀. 아들 둘에 딸 하나. 딱 좋았는데, 내가 기어이 나오고 말았어. 그러니 나는 보리에도 못 미치는 모래 아니겠니?" - P282

한번은 거실에서 아이 목소리를 흉내내는 오싹한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엄마가 어둑한 식탁에 앉아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속 꼬마의 대사를 외고 있었다. "택시 기사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가리키며 꼬마 조나에게 물었습니다. ‘올라가서 뭘 할 거니? 꼭대기에서침을 뱉을 거니?" 조나가 말했습니다. ‘No, I‘m gonna meet mynew mother." - P284

면서 언니는 점점 현실에서 멀어져 어딘가로 흘러간 게 아닐까. 수십년 뒤 햄스터를 두 마리에서 백 마리로 늘리는 사람으로, 밥솥에 밥을 짓고 일 년 후에 열어보는 사람으로, 고모에 이은 집안의두번째 사고뭉치로. - P287

"고모가 꿩 잡아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 P289

어쨌든 고모는 사냥하러 가고 언니는 책만 봤다. 목경은 심심했고 세 명의 사람을 만났다. 무덤에서 만난 세 사람은 다음과 같았다. 첫번째 사람은 앞뒤로 박수 치며 뒤로 걷는 사람이었다. 앞뒤로 박수 치며 뒤로 걷는 사람답게 그는 곁눈으로 자매를 끝까지보면서도 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 P290

"난 여기 있을래요."
무경이 말했다.
"안 돼. 위험해. 같이 있어야 해."
고모가 말했다. - P293

"안녕, 삼촌 해봐, 삼촌." - P295

"예쁘긴 예쁜데 또 개년은 개념인지라."
끄덕끄덕. - P297

고모가 그 여성분이기라도 한 듯 빨간 남방이 고모에게 입을 삐주대며 말했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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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는 백인에게 인종 문제를 참을성 있게가르치기란 정말 고되고 피곤하다. 내가 가진 설득의 능력을있는 대로 끌어모아야 한다. 인종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히수다로 끝날 수가 없다. 그것은 존재론적이다. 그것은 남에게내가 왜 존재하는지, 내가 왜 아픔을 느끼는지, 나의 현실이그들의 현실과 왜 별개인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아니, 실상은그보다도 훨씬 더 까다롭다. 왜냐하면 서구의 역사, 정치, 문학,
대중문화가 죄다 저들의 것이고, 그것들이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 P37

1917년 미국 정부는 이민 금지를아시아 전역으로 확대 적용했으며, 필리핀은 한때 미국의식민지였는데도 필리핀 사람들의 이민마저 제한했다. - P42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잘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때문에 우리 자신을 잘 믿지 못한다. 그래서 목소리를 너무 크게낸다고, 자존심이 너무 세다고, 혹은 야심이 너무 과한 게 아닐까자책한다. 샤마는 그 시에서 자기 가족의 자존심을 이카로스에비유한다. "보라, 우리가 하늘에 너무 가깝게 솟아올랐다가어떻게 추락했는지. 추락이 우리를 끝장내지 못할 것을 우리는어떻게 알았을까. 여기 떨어지고, 저기 떨어지고, 비명을 지르며.
오 허세부리지, 너희 생각만큼 나쁠리는 없으니." - P47

남아시아 청년이 승무원에게 또박또박 "승무원님", "부탁합니다",
"고맙습니다" 해가며 엄청나게 상냥하게 대했다. 원래부터늘 이런 태도일까 아니면 조심하는 것일까? 비행기가 착륙한뒤 내가 머리 위 짐칸에서 기내용 여행 가방을 꺼내느라 애를쓰는데, 미시간 대학교 미식축구팀 셔츠를 입은 목이 굵은백인 남자가 무례한 어조로 "실례 좀 하죠" 하더니 나를 밀치고지나갔다. 그 사람은 그냥 무례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내가아시아인이어서 그렇게 행동했을까? - P51

"시를 읽어주기를 바랐습니다." 엄격한 말투였다.
"치유하려면 시가 필요해요."
"저는 아직 치유할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이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을 존중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자리에서떠났다. - P52

말씨가 세련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고 그가 얼마나여러 해 동안 공들였을까. - P55

프라이어를 보며 나는 비슷한 깨달음을얻었다. 내가 지금 씨발 뭐 하는 거지? 내가 지금 누굴 위해 글을쓰는 거지? - P65

인증했다. 존 키츠에 따르면 시인은 "정체성이 없다- 시인은끊임없이 어떤 다른 사람을 대신하고 그 사람의 역할을 한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문학은 모든 주체가 피해 가는 그 중립자,
그 합성물, 그 모호성이며, 글을 쓰는 사람의 정체성을 비롯하여모든 정체성이 실종되는 덫이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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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참으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나요화장실 옆 정수기의 고독처럼 - P14

벽을 두드리면 남아 있던 밤이 뒤척였습니다 - P15

기다리는 것입니다왜라는 말끝의 물기를 붙들고조용히 물러서 있는 것입니다 - P20

사랑하는 헛것들. 빛의 자격을 얻어 잠시의 굴절을 겪을 때, 반짝인다는 말은 그저 각도와 연관된 믿음에불과해집니다. 우리는 같은 비밀을 향해 취한 눈을 부비며 나아갈 수 있을 테지요. 두 눈이 마주치면 생겨나는 무한의 통로 속으로. 이미 깊숙해져 있는 생각의 소용돌이를찾아 떠올린다는 말에 들어 있는 일렁임을 다해서. - P38

깊숙이 흐려져본 사람만이아름다운 입체를 가질 수 있다고잠겨드는 페이지를 걸으며처음 보는 무늬를 짐작하는서로의 눈 속을 걷던 시간이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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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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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무르고 물리지 않는, 무를 수 없는 마음에 대하여. 꼼꼼하고 단단한 소설들. 박혜진 평론가의 글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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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마도 한달음에 쓰인 뒤 영원히 잠가져 오로지 나 외엔열람이 불가능한 사적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혹은, 그 반대도 가능하다. 이것은 내 정체화에 대한 공적 기록이 될지도 모르겠다. - P185

놀랄 일이 아니었다. 나보다 더 아픈 사람들, 아프다는 현상에 나보다 더 예민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나는 종종 건강한 사람으로 여겨졌고 덜 예민한 무던한 사람으로 통했다. 고통은 절대적인 동시에 상대적이었다. - P187

그렇게 말하는 은주는 약해 보였다. - P189

저는 아무도 상처주지 않아도 알아서 상처를 받는 능력이 있어요. 그리고 그 상처를 무시하거나 덮어놓지 않고 내내 뚫어져라바라보는 습관도 있고요. 아주 최악이죠? - P192

애인의 긴 답장. 그건 마치 잘못 보내진 편지 같다고 은주는 생각했다. 이걸 봐야 할 사람이 있다면 자신도 애인의 친구도 아니고, 애인의 전 여자친구인 혜인인 것 같다고. 이 절절한 사랑 고백. 문득 자신은 생에서 한 번도 이런 사랑과 인정과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인에게서조차. - P195

은주씨, 저도 그런 적 있어요. 유구하고 보편적인 문제예요.
그 말에 은주는 너그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사람.
나는 은주에 대해 단정적으로 생각했다.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내가 좋아할 만한 사람일 거라고, 은주는 대답 대신 이런 말을 건넸다. - P203

죄다 무덤에 넣을 보물들인 것 같아서요. - P206

그리고 은주는 여행을 선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에게만 선언했다. 이미 함께 살게 된 집에서 각자의 공간은 없었다. 그일 때문에 내내 함께 눕던 침대에서 자기를 거부한다면 관계는 가시적으로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영지에게는 정책포럼 때문에 가게 된 독일 출장 기간을 두 달이라고 속였다. 영지와 함께하는 공간에서 자신이 바꿀 수 있는 자리는 그런 것뿐이었다고. - P210

호크룩스? 그게 뭐예요? 내가 모르는・・・・・・ 신조어인가.
시무룩하게 뱉은 내 말에 은주는 멋쩍게 웃었다.
아, 그게 그러니까 <해리 포터>에 나오는 죽음의 마법이에요.
영혼을 쪼개는 거예요. 영혼을 몇 개로 찢어서 그걸 각기 다른 데에 붙이면 원래 몸이 죽어도 영원히 산다고요. - P212

나는 대답 대신 이름을 부르고는 차가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럴까봐서요,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까끌까끌한 입술의 느낌이그대로 와 닿았다. 이것은 살아 있는 몸. 잔인하고 정확한 말을 하던 은주의 목소리가 통과한 출구, 은주에게 영원히 타인일 나의입술이 닿는 입구. 서로 다른 것이 들고 난 이 자리는 무슨 의미를지니는지 생각해보려다가 실패하며, 체온을 덥히지도 체액을 나누지도 않는 이 행위는 무엇을 주고받고 싶은 건가 생각해보려다가 또다시 실패하며, 이제는 정말로 봄인데도 겨울의 한복판에 얼어붙은 것처럼 나를 피하지도 밀어내지도 않는 은주를, 그 마음을생각하며 한동안 입을 맞췄다. - P214

야, 나 레즈비언이야.화가 나서였다. 그즈음 나는 누구든 건드리면 물어뜯겠다는 마음으로 어깨를 굽히고 혼자 걸어다니는 애였다. 너 따위가 뭘 아냐, 뭘 안다고 만지냐 하는 마음으로 물어뜯은 그애. 웃을 때 덧니가 드러나던 그애가 뭐라고 했더라.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빼고는 미안하다고 했던가. - P225

변명 같지만 현정이 멀어 보였던 이유를 하나 더 덧붙여보자면,
그애가 누가 봐도, 당연히, 너무나 이성애자였기 때문이다. 이성애자의 친구로 남는 일은 너무 쉬웠다. 마음껏 품을 수 있는 가장쉬운 마음. 짝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그건 내가 살면서 내내 해온 일이었다. - P231

언니.
응? (얘가 지금 날 언니라고 부른 거야?)저 언니 진짜 좋아해요.
고맙네.
몰랐죠.
응. 몰랐어. - P241

현정은 거의 속삭이고 있었다. 즉석식품이지만 꽤 생생한 옥수수 알갱이를 이로 뭉개며 나는 대답했다. 나는 현정이 준 거라면편의점 콘 수프도 금덩이처럼 받는구나, 도대체가. 그런 생각을하면서도 묵묵히 수프를 떠먹었다. - P245

우리는 우리가숨고 싶을 때 숨을 수 있고 나타나기를 원할 때 나타날 수 있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든 사랑을 할 수 있다. 참 쉽고, 그 쉬운 것이이토록 어렵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 P248

소수는 외롭지만 그렇기 때문에 외롭지 않을걸요. 반대로 그 외롭지 않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외로워지기도 하고요.
정말로 다 알아요, 하는 표정이었다. - P257

지은은 내 어미새 같았다. 어미새보다 나았다. 내가 머저리처럼굴어도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둥지에서 밀어 떨어뜨리지않는다는 점에서 그랬다. 지은 이전에 나는 곧잘 둥지에서 밀려추락했다. - P265

내 남편은 나를 질투해. 그런 감정을 내놓는 사람하곤 못살아. - P270

· 지영아, 자기가 하는 짓, 떠벌리는 말, 그게 다 질투라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사람은 없어. - P271

그런 애도 작가고 그딴 거 쓰는 애한테 굽신거려야 하는 내 팔자좆같다 같은 말을 남기는 상상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일 뿐이다. 그런 걸 더 할 필요는 없겠지………… - P284

‘타인의 마음‘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장소다. 이곳은 때로 천국이고 자주 지옥이다. 가고 싶어서 안달나게 만드는 곳일 때도있고, 끔찍하게 벗어나고 싶은 곳일 때도 있으며, 그보다 더 많은경우에는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는 미지로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이 타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학습되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고, 학습되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라는데이터가 사실인지 아닌지 파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타인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타인의 마음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걸까. 우리는 어떻게 인공지능은 할 수 없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 P292

이다. 쉬운 마음에 방향이 있다면 정체하는 마음에는 아직 방향이없기 때문이다. 멈춰 있는 마음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많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 P300

-. 짝사랑의 천재는 사랑을 매듭짓지 않는다 - P306

물론 그런 말들을 현실의 내가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엉망진창일 때마다 참아준 여러분 정말 고마워). 나는 흠을 드러내면서도 흠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그것이 나의 가장별로인 점이라는 것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현실에서도 은근슬쩍 티를 내는데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아 소설로도 쓴다. 비뚤어지고 이상한 속마음,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마음, 치고받고 싸워도 용서받고 싶은 마음을 쓴다. - P308

그런데 이렇게 오게 되었다. 책을 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는편집자로 일하는 내내 그것만을 믿었다. 책을 내는 기회는 소중하고, 그것은 쉽게 오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 아니다. 나는 내게 소중하고 또 당연하지 않은 기회가 왔다는 것에 놀라 좋은 일이 다가오는데도 애써 담담한 척했다. 호들갑 떨고 싶지 않아서. 그러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그러나 실은 소설집을 내게 되시러게 기뻐도 되나 싶을 정도로.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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