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지고 싶었는데………… 깊어진다는 게 커다란 공터를 만드는 일인 줄 몰랐습니다. 넓어지는 공터에 저 혼자 앉아 있는 일인 줄 몰랐습니다. 순식간에 발이 빠지는 일이라는 걸.
옆은 비워둘까요. 꽉 찬 말은 들어본 적 없으니까요. 주머니는 꽉 차 있어서 터지는 게 아닙니다. 터진 곳이 있어서 흘러내리는 겁니다. - P70

안내받지 못하며 자란 사람은스스로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고 - P75

산책을 하다보면 알게 된다세상에 얼마나 많은 새가 우는지흩어지는 얼굴로 나무가 흔들리고그림자가 어떻게 닮아가는지 - P77

꽝꽝 얼려두었던흠결 없는 하루를 주고 싶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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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더러운 것들을 눈앞에서 치워버린다. 땅속으로 감춰진 채우리 발밑에서 계속 흐르는 이 더러운 물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내보낸 배설물도 거기 섞여 있다. 그런데 맨홀을 열다 보면 희한하게 ‘향기‘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분명 더러운 물인데, 세제와 샴푸 향이악취마저 감추고 있는 건지. 이럴 때면 참 웃기다. 눈앞에서 사라진 폐기물이 이제는 냄새까지 잃어가고 있다. 오늘도 나는 악취인지 향기인지 모를 냄새를 맡으며 하수도를 점검했다. - P89

그런데 오늘처럼 비가 많이 내리고 난 다음 날은 감추어졌던 많은것들이 드러난다. 비 내리는 일은 인간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럴 때면 하수 맨홀에서는 악취가 진동한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마치 비가 가려진 눈과 막혔던 코를 뚫은 것처럼,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더러움이 불쑥 고개를 들이민다. 숱한 하수와 오수가 "나 여기 있다"고 외치는 것 같다. 나도 그때 비로소 도시의 문제, 삶의 모순 등을생각하게 됐다. 눈과 코를 씻고 하수 맨홀을 다시 본다. 그건 분명 내가배출한 것들이 맞다. - P90

우유 배달은 7개월만에 그만뒀다. 매주 월·수·금 눈이 오나 비가오나 아파트 단지를 돌았는데, 모두가 잠든 시간 홀로 나와 일하는 게쉽지만은 않았다. 불 꺼진 아파트 복도가 무섭게 느껴지는 날도 있었고, 배달을 다 마치고 보니 우유가 한 개 남아서 처음부터 일일이 다시확인한 적도 있었다. 새벽 3시에 경음기를 울리며 차를 빼달라는 사람때문에 15층에서 소리 내지 않고 뛰어 내려간 적도 있었다. 몸이 힘든것보다 마음이 조마조마한 일이 더 많았다. - P93

나는 대학 졸업 후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정직원으로 일하지 못했다. 계약직이라도 꾸준히 일하다 보면 경력이 되고 10년 뒤면 뭐라도되어 있을 줄 알았다. 억척같이 돈이라도 모아놨으면 이렇게 좌절했을까. 이제 와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다. 오늘도 모집자는 1명인데 지원자는 414명인 입사지원 페이지를 열고 기업의 열람일을 확인한다. 영원히 미열람으로 남을 것만 같다. - P100

. 그땐 호의라는게 더는 남아 있지 않았고, 결국 국가기관에 신고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말았어요. 그 말을 할 때 너무 화가 났는데, 그러자마자 처음 계약했던 전체 금액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래도 메인 피디님이 법은 무섭다고 느껴서 다행이었지 뭐예요. - P104

"앗, 뜨거!" 급히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다가 입천장을 데는 바람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새벽 6시 가장 분주한 시간이 끝난 뒤 잠시 숨통을 볼 수 있는 시간이다. 화장실 청소도구함에 숨겨놓은 보물상자를 찾듯이 믹스커피를 꺼내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던 참이었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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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누군가 나에게 공포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고 물으면 망설일 것도 없이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이야기한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영화에는 놀라게 하는 장면이 없다. - P116

〈유전〉을 본 날, 우산을 쓴 채 어두운 신촌을 뚫고간 곳은 뉴타운 펍이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뉴잉글랜드 스타일의 더블 IPA를 마셨을 것이다. 홉 향이 매우 화사한 것 같지만 조금만 들이키면 바로 취하는, 실로 음험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맥주다. - P121

이쯤에서 질문. 당신에게 등대란 어떤 이미지인가.
길을 잃은 자들에게 희망을 던지는 밝은 이미지인가. 정말 그러한가. 나에겐 그렇지 않다. - P124

등대란 아무도 없는 곳을 비추는 빛이지만, 그 누구도 제어하지 않는 혼자만의 기이한 힘으로 빛을 내는, 어둠을 밝히는 것이 아닌 어둠에 그만의 길을 만드는, 그러니까 암흑을 선도하며 칠흑 같은 종착지를 안내하는 그런 이미지로 나에게 각인되어 있다. - P125

게다가 우리 대부분은 지금 그 자리에 있기 위한 무언가를 이미 잘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이메일을 제법쓴다는 평을 듣는 것처럼,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 P136

"사랑은 가도 친절은 남는다." 커트 보네거트의 말이다. - P137

그러던 어떤 하루. 회사 일은 죄다 결론이 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의 판단을 기다리며, 그런데 나도 잘 모르겠는 것투성이고 알려면 한참을 들여다봐야 할 것 같은데, 모든 에러를 잡았다는 업체 메일을 본 직후 에러를 바로 발견했던 오늘 같은 날.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않으며 옆 부서 직원 O가 "벌써 세 시 반이야"를 외칠 때,
나는 "퇴근하고 싶다!"라고 외치고 싶었던 날. 내 친절함에 대한 진실이 위태로웠던 날. 나는 퇴근길 경의중앙선전철 안에서 내내 자 버렸다. - P141

주위의 많은 사람이 내가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하면, "아, 그 에일? 향기 나는 비싼 맥주 그런 거만 드시죠?"라며 조심스럽게 묻거나 그런 질문을 이미 가득 담고 있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 P156

맥주에는 일반적으로 4가지 재료가 들어간다. 물,
홉, 맥아, 효모. 여기서 물이 안 들어가는 맥주는 없을 테고 나머지 세 개 재료가 맥주의 맛과 풍미를 좌우하게되는데, 한마디로 인터내셔널 페일 라거는 그 캐릭터들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특징 아닌 특징이 있다. - P158

삶이 그렇다. 형태가 뭐가 되었든 내가 무엇을 내놓기위해서는 인풋이 필요하다. 새로운 사건, 인상적인 영화,
맛있는 맥주, 재미있는 생각, 새벽까지 읽은 책, 유머러스한 통찰, 사람과 보낸 시간 등등 한마디로 재료가 필요하다. 그러나 평범해 보이는 이런 것들은 생각만큼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 P163

그 ‘뭐라도’에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뭐라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봐도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평범한 일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럴 수 없다면 스스로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마인드 컨트롤을 하거나. 그것이 살아가는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 P178

어느 날 우리의 아틀리에에 누군가 초인종을 누른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가 당신의 조각을 보고 그리요란하진 않아도 적당한 경탄과 함께 당신의 등을 툭 쳐줄 때, 이건 기대하지 않았던 삶의 순간일 것이다. 당연히 벅찰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인생의 큰 보너스다. 대부분은 이런 보너스 없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채 아틀리에의 전원을 내린다. 그러나 그곳에는 무엇이 되었든 조각이 남아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인계될 수도 어쩌면 철거될 수도 있는 조각이지만 어두운 그곳에 홀로남은 조각은 틀림없이 그리 나쁘지 않은 작품일 것이다.
평범하고 무난해도 적어도 누군가의 수십 년 손때를 탄그것은 그렇게 나쁠 이유가 없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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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년이 되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정규직이었던 나는 회사의
‘비정규직화‘ 권고를 거부하다 2019년 12월 31일 해고되었다. 내가 채용면접을 보고 교육도 담당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성실함이 나의 일자리에 영향을 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회사는 순전히 인건비를 줄이려고 비정규직을 활용했는데, 내가 맡은 업무가 그들을 채용하고교육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나 또한 비정규직 전환 대상이 되었다는사측의 통보를 받은 것이다. - P73

점점 지쳐갔다. 그날그날의 수익으로 피곤을 이겨냈지만, 그것도한계에 온 것을 느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피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큰 빌딩들은 나를 화물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매스컴에서는 오토바이 난폭 운전이 연일 보도되었고, 플랫폼의 운영 행태를 문제 삼는 기사도 끊이지 않았다. - P75

오늘도 충분히 예열된 나의 민트색 100cc 오토바이는 달리고 있다.
비록 최고속도는 65킬로미터밖에 못 내지만, 희망을 위해 오늘도 신나게 달려본다. - P78

마트+
생산자로부터 물품을 대량 구매해 낮은 가격으로유통하고 판매하는 할인점. - P80

구정을 앞둔 마지막 대목장. 날이 아무리 추워도 사람이 많을 것을안다. 순영 언니와 나는 또 만두 50상자와 함께 시장에 내던져졌다. - P83

"그럼 오빠가 학비 줄 거야?"
"장학금 타면 되잖아!"
"생활비는?"
"아르바이트 하면 되잖아!" - P85

그런데 왜 자꾸 맘이 아프고 눈물이 날 것 같을까? 만두를 파는 언니의 고단함이 나는 속상하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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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지 못하고 산다영원히 치우지 못하고 살 수도 있다그렇게 매일 시계를 들여다본다 - P64

나는 그릇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 P66

나누지 않고 돌보지 않고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그런 이야기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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