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이유로 누군가 나에게 공포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고 물으면 망설일 것도 없이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이야기한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영화에는 놀라게 하는 장면이 없다. - P116
〈유전〉을 본 날, 우산을 쓴 채 어두운 신촌을 뚫고간 곳은 뉴타운 펍이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뉴잉글랜드 스타일의 더블 IPA를 마셨을 것이다. 홉 향이 매우 화사한 것 같지만 조금만 들이키면 바로 취하는, 실로 음험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맥주다. - P121
이쯤에서 질문. 당신에게 등대란 어떤 이미지인가. 길을 잃은 자들에게 희망을 던지는 밝은 이미지인가. 정말 그러한가. 나에겐 그렇지 않다. - P124
등대란 아무도 없는 곳을 비추는 빛이지만, 그 누구도 제어하지 않는 혼자만의 기이한 힘으로 빛을 내는, 어둠을 밝히는 것이 아닌 어둠에 그만의 길을 만드는, 그러니까 암흑을 선도하며 칠흑 같은 종착지를 안내하는 그런 이미지로 나에게 각인되어 있다. - P125
게다가 우리 대부분은 지금 그 자리에 있기 위한 무언가를 이미 잘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이메일을 제법쓴다는 평을 듣는 것처럼,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 P136
"사랑은 가도 친절은 남는다." 커트 보네거트의 말이다. - P137
그러던 어떤 하루. 회사 일은 죄다 결론이 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의 판단을 기다리며, 그런데 나도 잘 모르겠는 것투성이고 알려면 한참을 들여다봐야 할 것 같은데, 모든 에러를 잡았다는 업체 메일을 본 직후 에러를 바로 발견했던 오늘 같은 날.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않으며 옆 부서 직원 O가 "벌써 세 시 반이야"를 외칠 때, 나는 "퇴근하고 싶다!"라고 외치고 싶었던 날. 내 친절함에 대한 진실이 위태로웠던 날. 나는 퇴근길 경의중앙선전철 안에서 내내 자 버렸다. - P141
주위의 많은 사람이 내가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하면, "아, 그 에일? 향기 나는 비싼 맥주 그런 거만 드시죠?"라며 조심스럽게 묻거나 그런 질문을 이미 가득 담고 있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 P156
맥주에는 일반적으로 4가지 재료가 들어간다. 물, 홉, 맥아, 효모. 여기서 물이 안 들어가는 맥주는 없을 테고 나머지 세 개 재료가 맥주의 맛과 풍미를 좌우하게되는데, 한마디로 인터내셔널 페일 라거는 그 캐릭터들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특징 아닌 특징이 있다. - P158
삶이 그렇다. 형태가 뭐가 되었든 내가 무엇을 내놓기위해서는 인풋이 필요하다. 새로운 사건, 인상적인 영화, 맛있는 맥주, 재미있는 생각, 새벽까지 읽은 책, 유머러스한 통찰, 사람과 보낸 시간 등등 한마디로 재료가 필요하다. 그러나 평범해 보이는 이런 것들은 생각만큼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 P163
그 ‘뭐라도’에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뭐라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봐도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평범한 일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럴 수 없다면 스스로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마인드 컨트롤을 하거나. 그것이 살아가는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 P178
어느 날 우리의 아틀리에에 누군가 초인종을 누른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가 당신의 조각을 보고 그리요란하진 않아도 적당한 경탄과 함께 당신의 등을 툭 쳐줄 때, 이건 기대하지 않았던 삶의 순간일 것이다. 당연히 벅찰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인생의 큰 보너스다. 대부분은 이런 보너스 없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채 아틀리에의 전원을 내린다. 그러나 그곳에는 무엇이 되었든 조각이 남아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인계될 수도 어쩌면 철거될 수도 있는 조각이지만 어두운 그곳에 홀로남은 조각은 틀림없이 그리 나쁘지 않은 작품일 것이다. 평범하고 무난해도 적어도 누군가의 수십 년 손때를 탄그것은 그렇게 나쁠 이유가 없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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