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아파트는 다른 세계였다. 실버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그냥 노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산다는 것 이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예습이 필요한 일이었다. - P19

난 아무런 준비도 생각도 없이 덜컥 실버의 세계로 들어와 버렸다. 그렇게 좌충우돌, 고군분투의 삶은 시작되었다. 매우 조용히. - P19

하지만 실버아파트를 떠난다고 해서 노년이라는 미래와 현재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나는 ‘실버기‘의 문앞에 선 초보 노인이었다. 3장은 나의 실버기 입문기다. - P11

‘이곳은 실버아파트라 언제 비상사태가 생길지 모르므로 소방차 구역에 주차를 하는 것은 불법이나 이미 사다리를 장착했으니 신속하게 이사하시고……… - P21

할머니는 뒷짐을 진 채 방과 방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매우 즐거워했다. 물론 난 할머니가 왜 즐거운지 그 이유를아직은 알지 못했다. - P23

언제부터인지 오래되고 낯설어진 문장.
우리집에 놀러 와. - P25

"낮잠 시간이라 다들 벨 소리를 못 들으셨나 봐."
"아, 시에스타, 낭만적이네. 스페인 같잖아."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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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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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지만 매섭고 부드럽지만 또렷하다. 더 단단해진 최은영의 작심과 작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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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자꾸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새벽에 엄마는 할아버지를 깨웠다. 아빠, 너무 이상한 느낌이 들어.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고냄새가 나. 무슨 냄새가 난단 말이니? 냄새가 나 - P170

할머니들은 측량에 대한 감각이 없다. 할머니들은 무한이다.
열려진 존재다. 사랑이 그렇다. 무한정 퍼고 무한정 무치고 아이에게 설악산만한 고봉밥을 내밀고, 할머니 정말 나, 배가 찢어지겠어! 그런데 요즘은 엄마가 그렇게 음식을 퍼준다. - P172

그래서 윤이 나는 것들은 평안해 보인다.
엉덩이 덕에 반들거리는 뒷마루처럼 - P175

아무튼 윤은 시간을 먹고 드러나는 빛, 만질수록 넓게 퍼지는 공평의 빛. 우리의손엔 빛의 입자라도 박혀 있는가. 접촉하면 빛이 난대. 그래서 연인은 계속해서 서로의 얼굴을 쓸게 되는가. 어떤 강아지는 호박보다 반들거리고 어떤 아이들은 보름달보다 이마가 환하고 어떤옹기는 하늘의 별보다 밝게 빛난다. 우리의 눈은 윤기로 반들거린다. - P176

‘아니 씨, 내 인생이 아무리 험해도 여태껏 살면서 엄마 밥 한끼 못 사줘? 어떻게 인생이 이래? 우리 엄마한테도 어쩌다가 밥한끼 못 사주는 인생이 됐어?‘ 약간의 분노와 억울한 감정이 밀려오더라. 그래서 바로 그랬지. 그래 엄마! 오늘 거하게 살게 앞치마 걷고, 가게 문 닫고, 늙은 엄마 손을 잡고, 그 자리에서 차를 몰고 밥 먹으러 갔지. 그런데 가는 길에 이상하게 속이 시원하더라.
이유 없이 자꾸 눈물이 날 것 같더라. - P183

별, 시, 눈, 꽃, 귀, 손, 개, 국, 볼, 종, 빛, 빵.
나는 시 쓰고 동생은 빵을 굽는다. 우리의 직업은 한 글자라서사랑이라네. - P189

갓 구운 빵을 꺼내 슬쩍 쥐어보면아주 뜨거운 사람의 손을 잡은 것 같다. - P193

그렇게 빵과 시는 활기차게 열린 자유다.
눈이 오면 신나게 달리는 강아지처럼.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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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에 관한 책을 한 권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럭저럭 10년 이상이나 지난 일이지만, 지금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하면서, 손도 대지 못한 채 헛되이 세월을 보냈다. ‘달리기‘ 라고 한마디로 말해서는 테마가 너무나 막연해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생각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 P9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 P19

그래서 미리 일주일에 하루쯤은 ‘쉬는 날‘을 정해놓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60킬로, 한 달에 대충 260킬로라는 숫자가,
나에게는 ‘착실하게 달린다‘ 고 하는 일단의 기준으로 정할 수있다. - P21

똑같은 경우를 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소설가라는 직업에 적어도 나의 경우라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지만 이기고지고 하는 일이란 없다. 판매 부수나, 문학상이나, 비평을 잘 받거나 못 받거나 하는 일은 뭔가를 이룩했는가의 하나의 기준이될는지는 모르지만, 본질적인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이 쓴작품이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했는가 못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변명으로 간단하게 통하는 일이 아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뭐라고 적당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 P26

보스턴 마라톤의 개최지라는 점도 있겠지만, 케임브리지는 바라톤 인구가 많은 곳이다. 찰스 강을 따라서 끝없이 조정은 도가 이어져 있어, 마음만 먹으면 이 길에서도 몇 시간이고 달릴수 있다. - P32

나는 손때가 묻은 MD 쪽을 좋아한다. 아이팟에 비하면 다소 기계가 크고 정보 용량은 확연히 적지만 내게는 그만하면 충분히 잘 쓸 수 있다. 현재로선 아직 나는 음악과 컴퓨터를 혼동하고 싶지 않다. 우정이나 일과 섹스를 혼동하지 않는 것처럼. - P33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가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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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머리를 뒤로 묶은 오동통한 몸매의 공인중개사는 첫느낌이 매우 부드러웠다. 남편은 이 공인중개사를 택하길다행이라고 했다. 집을 구하러 왔는지 공인중개사를 만나러왔는지 헷갈리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계약서에 도장을찍고 싶어 하는 남편과 달리 계속 망설이는 내가 신경 쓰였을 그녀는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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