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을 위한 가치 수업
이석재 외 지음,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 가치 교과서 연구팀 기획 / 북하우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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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를 돌아보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이 책에 나온 나쁜 예처럼 극단적 이타주의에 빠진 적도 있었다. 상대방 입장을 생각하느라 정작 내 마음이 상하는 것, 내가 손해보는 것을 감수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주입식 윤리 교육은 정말 쓸데없다는 결론이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윤리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다음 세대에게 강요된 가치, 윤리가 아니라 공감대를 형성하는 가치, 윤리를 전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다. 이 책 역시 그런 시도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이 책의 기획 의도는 한창 가치관을 형성하는 나이인 중학생, 고등학생들에게 가치와 윤리에 관한 대화의 토대를 마련해주려는 것이다. 서울대 철학과 이석재 교수를 비롯한 석사, 박사과정 학생들로 구성된 연구팀이 공동 저자다. 이 책은 크게 가치의 본질, 자유와 도덕적 책임,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공리주의, 의무론, 덕 윤리 등 여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마다 세 편의 예화와 핵심 개념과 풀이, '더 얘기할 거리'가 나와 있다.


우리 경험을 통해 분명히 확인, 검증될 수 있는 사실을 기술하는 판단은 사실 판단, 평가적 요소를 포함하는 판단은 가치 판단인데, 가치 판단의 평가 기준 요소들인 좋음, 올바름, 아름다움 등이 가치에 해당한다. 이러한 가치를 더 뻗어가면,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도구적 가치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내재적 가치로 구분한다. 여기서 도구적 가치인 돈을 통해서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각자 자문해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가치 판단을 더 살펴보면, 객관적으로 진위 여부가 결정된다는 가치 객관주의, 주관적인 의견이나 감정에 의해 진위 여부가 결정된다는 가치 주관주의로 나눈다. 가령 동일한 예술 작품에 대해 사람마다 가치 판단이 다를 수 있기에, 아름다움의 영역에서는 가치 주관주의가 잘 어울린다. 반면 윤리의 영역에서는 객관적인 옳고 그름이 있기에, 가치 객관주의와 더 맞닿는다.


자신의 통제하에 있던 일에 도덕적 책임을 가지되 능력 밖의 일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가령 비가 와서 나가기 싫은 아이는 급한 일이 생겼다는 거짓말로 친구와의 약속을 깬다. 아이는 거짓말에 대해 책임을 진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그에 따른 책임도 없을 터이다. 논의를 더 뻗어가면, 대안가능성 원리, 양립가능론과 양립불가론에 대한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 이기적인 동기에서만 행동한다는 입장인 심리적 이기주의, 옳고 그름의 유일한 기준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여부라는 입장인 윤리적 이기주의를 소개한다. 타인의 안녕을 고려해 이타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인 이타주의도, 실상 나를 위한 행위일 때도 있고 자기 희생이 동반되지 않을 수도 있다.


행위 결과주의는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행위만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이고, 쾌락주의는 어떤 결과가 좋으면 즐거움을 주고 결과가 나쁘면 고통을 준다는 것이며, 공리주의는 이 둘을 결합한 의미로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모두가 겪을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공리주의의 어려움, 곧 해당 행위가 칭찬할 만하지만 설령 하지 않았다고 도덕적 비난을 받지는 않는 예들을 확인할 수 있다.


결과주의는 결과가 좋으면 그 행위도 올바르다고 보는 것이고, 의무론은 절대적인 도덕규범을 따르려는 순수한 동기와 의도를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의무론, 곧 결과와 무관하게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있다는 관념이 있다. 이 책에서는 절대적인 도덕규범과 관련해, 보편 법칙의 정식, 가언 명령, 정언 명령 등의 개념 이해로 연결시킨다.


덕 윤리 이론가들은 "내가 그 행위를 함으로써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면, 버스에서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했을 때 의무론이나 결과주의에 따라 마지못해 하는 경우와 그 사람을 염려하는 마음이 우러나와서 하는 경우는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 진정으로 인내심 있는 사람은 용기나 인내 자체를 목표로 삼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용기 있는 방식으로 또는 인내심 있는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191쪽)


덕 윤리의 입장에서는, 개인이 함양할 품성인 덕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가운데 요구되기에 자기 계발 논리와 다르다. 실천적 지혜라는 용어가 새롭게 다가왔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 존재의 전반적인 특성을 이해하고 특정 행동이 낳을 결과를 겪으면서 삶의 경험으로부터 얻게 된단다.


이 책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각 예화들이 중고등학생들의 눈높이로 구성되어 있고, 가치와 윤리에 관한 기본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며, 본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생각을 확장해볼 수 있는 질문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수업이란 가르치는 자의 일방적인 지식 주입이 아니기 때문에, 더구나 가치 수업만큼 화자와 청자의 상호 교감이 중요한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 책을 하나의 교과서 삼아 가치와 윤리에 관한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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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지도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1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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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면, 인문학 공부 혹은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식의 축적이나 자랑이 아니라 삶의 본질에 맞닿는 것. 우리는 실상 제대로 살기 위해, 가치 있는 한평생을 위해 고전과 역사를 돌아보고 오늘의 문학과 사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던가.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 1권으로, 선생님의 유작 <별의 지도>는 '별'을 뿌리 삼아 수많은 가지를 뻗어가는 이야기 나무와 같다.

1부 별을 바라보는 마음

저자는 윤동주의 <서시> 속에 동양적인 문맥의 (하늘) '천' 개념이 담겨 있다고 봤다. 나아가 동양의 사고는 서양의 그것과 달라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올바른 삶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한자로 임금 '왕'은 천지인의 석 '삼'을 수직으로 이은 글자다.

"아무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천, 하늘의 힘과 지, 땅의 힘, 거기에 인, 인간의 힘까지 아우를 수 있는 사람만이 왕이 되고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32쪽)

이 내용은 더 구체화된다. 임금 '왕'에서 하늘을 걷어내면 흙 '토'만 남는데 땅과 사람만 지배해서 리더가 된 자는 진정한 왕이 아니란다. 또한 저자는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전부인 줄 아는 우리에게 공자는 "떼라, 국가를 없애봐"라고 하고(인간주의), 노자는 그런 공자도 소인이라고 칭하면서 "그 사람도 빼라"고 한다는 것이다(무위자연).

한국인의 강한 '천인상관' 사상(인간이 스스로 천지에 종속되는 삶)에 대해, 저자는 비판적 시각을 가진다. "철학은 현실의 공포나 욕망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을 다루는 분야"(61쪽)라는 정의가 와닿았다. 주변의 변화에 휘둘리며 일희일비하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다. 철학적 인간이 되려면 불행에 좌절하지 않는 희망이 필요하고, 그 희망이란 '소유'가 아니라 '존재'다.

2부 별과 마주하는 마음

저자에 따르면, 서구 사상의 큰 물줄기는 플라톤의 관념론(하늘)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론(땅)이다. 서양의 이원론, 이항 대립사고는 동전 던지기에서 보듯 일직선의 사고인 반면, 동양에서는 가위바위보로 삼항 순환 사고다.

저항시인의 프레임을 거두고 시대상황을 배제한 채 윤동주의 <서시>를 읽어본다면? 이 시는 앞서 사람까지 빼라는 '노자'까지 나아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인은 한국인이든 아니든 죽음의 운명을 타고난 모든 인간을 사랑했고 자신의 운명 앞에 버티고 싸우는 게 아니라 하늘까지 올라가 땅이 아닌 별을 노래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맹세하고 소원했다. 그렇다면 어떤 부끄러움인가. 저자는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하늘이 나를 봤을 때의 부끄러움, 땅의 사람(법, 제도 등)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 그리고 꽃과 같은 자연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이 있어요."(102쪽)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서시>는 저항시(정치), 인간주의시(휴머니즘), 종교시의 층위로 읽히지만 전체적인 뜻은 천지인이다.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애, 인간애, 우주애라는 것이다. 시 속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란 정치인이나 종교인의 마음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이고, 마지막 구절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의미는 모든 것을 죽게 하는 바람인 시간이 별에 스치면 영원까지 간다는 것. 그렇게 별까지 가는 여정은 부끄러움이 없는 길이 된단다.

3부 별을 노래하는 마음

여기서는 앞서 언급한 "시인의 마음"이 구체화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이때 시인은 역사 속 영웅이 아니라 햄릿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시 속에서 끝없이 흔들리면서 죽음 앞에서 영원으로 가고, 현실 앞에서 이상으로 가고, 괴로움 앞에서 노래하고 사랑을 하는 존재이지요."(141쪽)

저자는 <서시>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시인의 마음"을 품자고 권면하는 듯하다. 그가 의미하는 시인이란 시집을 낸 문인이 아니라 이 책의 독자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 풀잎의 괴로움을 가지고 죽는 날까지 부끄러움 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모두 시인이다.

이 책의 제목 <별의 지도>는 미학자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첫 문장과 연관된 것이다. 저자 역시 지도가 없던 시대 유일한 지도인 별자리, 그렇게 별이 지도가 되던 시절에 인간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자문한다. 저자는 "별을 바라보며 꾸는 꿈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마력"(222쪽)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질문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당신 삶의 그릇(병 혹은 부대)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그저 좋아서 자주 암송하던 윤동주의 <서시>가 이토록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시였구나, 새삼 감탄하면서 읽었다. 이 책에는 주된 이야깃거리인 그 시뿐 아니라 시인의 다른 시들, 여러 작가의 작품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와 더불어 저자 특유의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별'을 뿌리 삼은 거대한 이야기 나무인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시인의 마음"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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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이뿌이 모루카 : 교통 체증의 이유는? 뿌이뿌이 모루카
미사토 도모키 지음, 고향옥 옮김 / 미운오리새끼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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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캐릭터가 등장하는 그림책이 나왔어요. 원래 일본인 감독이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만든 것으로, 넷플릭스와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다고 해요. 해당 영상을 본 적은 없고요, 오히려 이 그림책을 계기로 영상을 찾아보게 될 듯해요.

감독 및 각본을 담당한 작가의 말에 따르면, 모루카는 기니피그를 보고 떠올린 자동차 캐릭터입니다. 특이하게도 헝겊 인형이에요. 이번 이야기 속에는 용기 있는 포테토, 아프거나 다친 사람을 병원으로 데려다주는 구급 모루카, 음악을 좋아하는 DJ 모루카가 등장해요.

모루카들로 꽉 막힌 도로에 포테토도 서 있어요. 운전자 누나를 태우고서요. 길이 막힌 이유는 맨 앞에 서 있는 DJ 모루카 때문이에요. 운전자가 음악을 들으며 휴대폰을 들여다볼 뿐이에요.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모를 정도로요. 단지 뒤의 차들이 정체된 문제만 있는 게 아니라 응급 환자를 태운 구급 모루카도 길에서 꼼짝 못하게 된 거예요. 그때 포테토의 눈빛이 번쩍! 과연 어떤 방법으로 도로의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요?

폴리 시리즈와 깜찍한 인형, 작은 동물을 좋아하는 뽀야에게 딱 맞는 그림책이었어요. 한글을 모르는 영아부터 자동차와 인형 놀이를 즐기는 유아까지 두루 좋아할 책이 될 거예요. 은근히, 자연스럽게 교통 질서의 중요성도 알려주고 있어요. 단순한 스토리인데 계속 보고 싶어지는 매력이 있네요. 뽀야는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중이에요.

친절하게도 그림책 뒤표지에 큐알코드가 나와 있어요. 뿌이뿌이 모루카 1화를 볼 수 있는 유튜브로 연결되나 봐요. 아직 영상은 보지 않았지만 모루카들의 뿌이뿌이 소리를 들으러, 다음 시리즈가 궁금해서 찾아볼 것 같아요. 앙증맞은 그림책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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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너머 산속에
마리오 벨리니 지음, 마리안나 코포 그림, 신은아 옮김 / 베로니카이펙트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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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글동글 귀여운 아이와 동물들이 함께하는 책 표지 좀 보세요! 모두 사진을 찍듯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는 것 같네요. 찰칵!

집에서 산을 그리던 꼬마는, 여러 산을 그려보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요. 자신이 바라보던 산과 달라 보였고 어딘가 부족하게만 느껴졌어요. 산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길을 나선 꼬마는, 완벽한 산을 그리겠다는 마음으로 산만 보면서 걸어가지요.

가는 도중에 염소, 새들의 무리, 나뭇잎, 개울 등을 보게 되고 그 대상들을 자기 공책에 담아봅니다. 꼬마는 그렇게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집으로 돌아와요. 그리고 밤에 다시 산을 그리게 되는데요, 과연 어떤 모습이었는지, 또한 꼬마가 스스로 만족할 만했는지 그림책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글작가가 표현한 동물 외에도 많은 동물들이 그려져서, 아기자기한 그림만으로도 아이들이 흥미롭게 볼 수 있어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라면 꼬마의 그림 공책을 유심히 들여다 보겠지요. 부드럽고 정감 있는 그림체라 더욱 편안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거예요.

더 나아가, 이 그림책은 자유로운 상징을 펼치도록 이끌어줘요. 개인적으로 이런 상징성을 품은 그림책을 정말 좋아하는데요, 뽀야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던 메시지가 들어 있어서 더욱 유익했어요. 물론 독자마다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 부여는 다양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그림책 속 꼬마처럼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만 바라보면서 가는 여정 가운데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꿈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요? 적어도, 소중한 사람들도 함께 기뻐하는 자리였으면 좋겠어요.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도, 어쩌면 꿈 자체도 그들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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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지은 집 - 구십 동갑내기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주택 연대기
강인숙 지음 / 열림원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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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로한 분들이 쓴 에세이를 좋아한다. 글 속에서 개인의 역사뿐 아니라 시대상을 읽을 수 있고, 오랜 연륜에서 묻어나온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이 책을 선택했을 텐데, 이 책은 몇 가지 특별함을 더한다. 저자가 작년 초 작고하신 이어령 선생님의 배우자라는 사실, 그래서 그분에 관한 에피소드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이어진다. 결혼 이후 살게 된 집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이야기라는 구성도 흥미롭다.

솔직히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현재 영인문학관 관장님인 저자를 잘 몰랐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또 다른 특별함을 발견했다. 문학을 전공하고 글을 쓰는 여성이 결혼, 자녀 출산과 양육, 가정과 직장 일 가운데 어떻게 고군분투하면서 지속적으로 글을 써나갈 수 있었는지, 이 책에서 그 과정을 엿보았다고 할까.

이 책의 저자 강인숙 선생님이 머리말을 쓴 날짜는 2022년 12월, 책의 부제 "구십 동갑내기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주택 연대기"에 나와 있듯이 연세 구십 때다. 해를 넘긴 현재는 거기서 한 살이 더해진다. 책 말미에 실린 집필 목록을 보니, 저자는 1976년부터 2020년까지 스무 권이 넘는 논문집과 평론집, 에세이를 펴냈다. 이어령 선생님의 에세이를 볼 때도 느꼈지만, 강인숙 선생님의 이 책을 보면서도 동일하게 느꼈다. 오래전 일들을 참 세세하게 기억하고 세밀하게 기록하셨구나.

저자 부부가 바랐던 집은 글을 쓰기 위한 공간이었다. 원하는 집을 얻기까지 십육 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 세월은 "보다 나은 집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투쟁의 역정"(12쪽)이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부부는 함께 문학관을 짓겠다는 꿈을 키웠고 그 결과 현재 영인문학관이 만들어진다. 이 책에서, 저자가 그 건물을 "이어령 선생 한 사람이 '글로 지은 집'이다."(14쪽)라고 일컫는 배경도 확인할 수 있다.

성북동 골짜기의 단칸방부터 현재 거주하는 평창동 집까지, 이 책은 저자가 결혼 후 살게 된 여덟 집들을 소개한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 저자 부부를 비롯한 자녀, 가족의 변화, 당시 만나거나 왕래한 사람들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 속에는 김승옥 작가 등 여러 문인들의 에피소드도 포함한다. 저자는 별도의 장을 마련해 시아버지, 곧 이어령 선생님의 아버지 사연을 풀어낸다.

빈손으로 결혼했던 저자 부부는 사 년째인 1961년 봄에 집을 샀다. 저자가 남편에게 원하던 서재를 만들어준 때는 1974년이었고, 남편이 대장암에 걸린 2015년 이후 두 사람은 각자 아래층, 위층에서 책을 써나갔다. 책 속에서 노년기의 저자 부부를 보면서, 부부라고 해도 결국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때에 이르면 오롯이 혼자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 부부가 각자 강의하고 글을 쓰는 일, 부모, 자식, 그 외의 역할들을 성실히 해나가는 동안, 가족들과 지인들 중 생과 이별한 이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자녀들이나 손주들은 각자의 삶을 살거나 그중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이들도 있다. 저자의 문장은 감상적이기보다 관조적이어서, 담담한 듯한 서술의 행간에서 오히려 인간 본연의 숙명적 슬픔이 내재된 느낌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만의 남편 사랑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초 한강로 2가 100번지로 이사할 때의 에피소드다. 저자는 이사를 많이 다녀서 이사하는 데 베테랑이란다. 그런데 저자가 만삭인 당시, 남편이 집 보러 다니고 계약하는 등 이사를 주도했다고 하는데 짐 옮기는 데는 "션찮을" 수밖에 없었다고. 결혼 후 서재에서만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저자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인정할 뿐 아니라 이렇게 회고한다.

"그의 시간이 아까워서 그럴 수 없었다. 못 박고 이삿짐 나르는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있지만, 창조하는 일은 남이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에, 되도록 그를 일상사에서 멀리해주자는 것이 그 무렵의 나의 사랑법이었다."(163쪽)

​이어령 선생님이 가장, 자식의 역할을 감당하면서도 줄기차게 글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선생님 내면의 힘도 있겠지만 아내 사랑의 비중도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저자 자신도 글을 쓰기 때문에 남편의 마음을 더욱 잘 헤아렸겠구나 싶기도 하다.

같은 전공, 가르치는 직업, 글 쓰는 일 등 그렇게 배우자와 공통 분모가 많다고 해도, 부부 사이에 서로 공유되지 못하는 영역은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저자가 남편보다 어머니에게 정신적 의존을 많이 했다는 대목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남편에게 글 쓰는 일 외에 다른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터이다. 온전히 글을 쓸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 사랑의 마음이었으리라.

이 책은 독자들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겠다. 먼저 저자 부부의 내 집 마련 분투기인데, 여기서 집이란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서재가 있는 공간이다. 다음으로 부부가 결혼 후 노년이 되기까지의 과정, 인생의 여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생생한 기록이다. 그 부부가 이어령 선생님과 강인숙 선생님이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한 문장씩 읽어나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결혼 후에도 어떻게 여성이 아내, 엄마 역할과 더불어 자기 이름 혹은 글로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에세이다.

[출판사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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