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지은 집 - 구십 동갑내기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주택 연대기
강인숙 지음 / 열림원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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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로한 분들이 쓴 에세이를 좋아한다. 글 속에서 개인의 역사뿐 아니라 시대상을 읽을 수 있고, 오랜 연륜에서 묻어나온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이 책을 선택했을 텐데, 이 책은 몇 가지 특별함을 더한다. 저자가 작년 초 작고하신 이어령 선생님의 배우자라는 사실, 그래서 그분에 관한 에피소드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이어진다. 결혼 이후 살게 된 집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이야기라는 구성도 흥미롭다.

솔직히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현재 영인문학관 관장님인 저자를 잘 몰랐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또 다른 특별함을 발견했다. 문학을 전공하고 글을 쓰는 여성이 결혼, 자녀 출산과 양육, 가정과 직장 일 가운데 어떻게 고군분투하면서 지속적으로 글을 써나갈 수 있었는지, 이 책에서 그 과정을 엿보았다고 할까.

이 책의 저자 강인숙 선생님이 머리말을 쓴 날짜는 2022년 12월, 책의 부제 "구십 동갑내기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주택 연대기"에 나와 있듯이 연세 구십 때다. 해를 넘긴 현재는 거기서 한 살이 더해진다. 책 말미에 실린 집필 목록을 보니, 저자는 1976년부터 2020년까지 스무 권이 넘는 논문집과 평론집, 에세이를 펴냈다. 이어령 선생님의 에세이를 볼 때도 느꼈지만, 강인숙 선생님의 이 책을 보면서도 동일하게 느꼈다. 오래전 일들을 참 세세하게 기억하고 세밀하게 기록하셨구나.

저자 부부가 바랐던 집은 글을 쓰기 위한 공간이었다. 원하는 집을 얻기까지 십육 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 세월은 "보다 나은 집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투쟁의 역정"(12쪽)이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부부는 함께 문학관을 짓겠다는 꿈을 키웠고 그 결과 현재 영인문학관이 만들어진다. 이 책에서, 저자가 그 건물을 "이어령 선생 한 사람이 '글로 지은 집'이다."(14쪽)라고 일컫는 배경도 확인할 수 있다.

성북동 골짜기의 단칸방부터 현재 거주하는 평창동 집까지, 이 책은 저자가 결혼 후 살게 된 여덟 집들을 소개한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 저자 부부를 비롯한 자녀, 가족의 변화, 당시 만나거나 왕래한 사람들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 속에는 김승옥 작가 등 여러 문인들의 에피소드도 포함한다. 저자는 별도의 장을 마련해 시아버지, 곧 이어령 선생님의 아버지 사연을 풀어낸다.

빈손으로 결혼했던 저자 부부는 사 년째인 1961년 봄에 집을 샀다. 저자가 남편에게 원하던 서재를 만들어준 때는 1974년이었고, 남편이 대장암에 걸린 2015년 이후 두 사람은 각자 아래층, 위층에서 책을 써나갔다. 책 속에서 노년기의 저자 부부를 보면서, 부부라고 해도 결국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때에 이르면 오롯이 혼자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 부부가 각자 강의하고 글을 쓰는 일, 부모, 자식, 그 외의 역할들을 성실히 해나가는 동안, 가족들과 지인들 중 생과 이별한 이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자녀들이나 손주들은 각자의 삶을 살거나 그중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이들도 있다. 저자의 문장은 감상적이기보다 관조적이어서, 담담한 듯한 서술의 행간에서 오히려 인간 본연의 숙명적 슬픔이 내재된 느낌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만의 남편 사랑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초 한강로 2가 100번지로 이사할 때의 에피소드다. 저자는 이사를 많이 다녀서 이사하는 데 베테랑이란다. 그런데 저자가 만삭인 당시, 남편이 집 보러 다니고 계약하는 등 이사를 주도했다고 하는데 짐 옮기는 데는 "션찮을" 수밖에 없었다고. 결혼 후 서재에서만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저자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인정할 뿐 아니라 이렇게 회고한다.

"그의 시간이 아까워서 그럴 수 없었다. 못 박고 이삿짐 나르는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있지만, 창조하는 일은 남이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에, 되도록 그를 일상사에서 멀리해주자는 것이 그 무렵의 나의 사랑법이었다."(163쪽)

​이어령 선생님이 가장, 자식의 역할을 감당하면서도 줄기차게 글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선생님 내면의 힘도 있겠지만 아내 사랑의 비중도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저자 자신도 글을 쓰기 때문에 남편의 마음을 더욱 잘 헤아렸겠구나 싶기도 하다.

같은 전공, 가르치는 직업, 글 쓰는 일 등 그렇게 배우자와 공통 분모가 많다고 해도, 부부 사이에 서로 공유되지 못하는 영역은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저자가 남편보다 어머니에게 정신적 의존을 많이 했다는 대목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남편에게 글 쓰는 일 외에 다른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터이다. 온전히 글을 쓸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 사랑의 마음이었으리라.

이 책은 독자들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겠다. 먼저 저자 부부의 내 집 마련 분투기인데, 여기서 집이란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서재가 있는 공간이다. 다음으로 부부가 결혼 후 노년이 되기까지의 과정, 인생의 여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생생한 기록이다. 그 부부가 이어령 선생님과 강인숙 선생님이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한 문장씩 읽어나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결혼 후에도 어떻게 여성이 아내, 엄마 역할과 더불어 자기 이름 혹은 글로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에세이다.

[출판사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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