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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최인호 작가라..책이라는 것과 친숙해진지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 최인호 작가는 내가 지금도 가끔씩 즐겨보는 드라마 '상도'의 원작자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그 이후 최인호라는 작가는 한때 나름 잘나갔던, 젊은 작가시절 대한민국을 열광하게 했던 작가라는 것만을 더해서 알게 되었을 뿐 어떤 작품이 있는지, 어떤 세계를 가지고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소설의 내용은 특별히 독특하다던가, 획기적인 발상으로 이루어져있지는 않다. 내가 과연 나인지, 내가 기억하는 나의 모습과 남이 기억하는 나의 모습의 괴리 속에서 내가 바라보는 모든 도시의 낯설음과 낯익음의 아슬아슬한 경계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3일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나와 나의 이야기를 세심하게 뽐내고 있다. 다만 나와 나의 괴리를 종교적인 영감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최근에 읽었던 소설들과 조금 달랐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또다른 면에서 독자들과 일반 대중, 그리고 작가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그것은 과연 예술이라는 것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예술은 작가를 위한 것인지, 그것을 수용할 독자 혹은 대중을 위한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의 회귀이다. 최인호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서 글을 쓴 이래 처음으로 누구를 의식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듯한 미칠듯한 영감속에서 단거리 주법으로 글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즉 자신의 순간적인 영감을 200%이상 발휘하여 일필휘지하는 마음으로 원고지를 끝없이 넘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작가 본인의 건강상태와 영적인 상태를 고려한 최선의, 그리고 가장 만족하는 글쓰기임을 밝히고 있다.  

 

누구나 영감이라는 것을 받는다. 어떤 사물을 보다가, 어떤 사색에 잠기다가, 어떤 것을 듣다가, 어떤 행위를 하다가 우리는 문득 주체할 수 없을 표현의 욕구를 가진다. 그것을 작가는 글로, 화가는 그림으로, 음악가는 음악으로, 예술의 영역으로 자신의 영감을 풀어헤친다. 그리고 그것을 대중에게 선보인다. 과연 그 '영감'은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영감'이라는 것은 독자를 만나기 위한 방법론으로 채택되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영감'자체를 독자들과 교감하기 위해서 글을 써야 하는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바가 작가의 영감이자 주제의식이었는지, 아니면 작가는 그 글쓰기의 열망을 영감을 통해 얻는, 즉 영감 자체가 글의 동기가 되는 것이어야 하는지. 최근까지 나는 그 영감은 동기에 그치는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흔히 영감 자체가 글이 되고 예술이 되는 경우 작가 스스로는 한껏 우리를 그 영감에 같이 빠지자고 밀어부치지만 정작 독자들은 그 느낌에 어리둥절하고 방황하는 경우를 느끼기 때문이다. 정작 작가 역시 자신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체, 순간적은 그 느낌의 휘저음으로 모든 것을 갈음하는 작품이 과연 천재성으로 대표되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작품으로 추앙받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석으로 통해 오히려 작가가 더더욱 찬양받는 선순환인지, 악순환인지 모를 연결고리들이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 역시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어떠한 말을 하고 싶었는지 대충을 알겠지만 정확히 꼬집을 수는 없는 그런 작품.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작가도 모르고 그냥 우리 모두 뭉뚱그려서 그 영감으로 대표할 수 있는 작품. 그러나 이 작품을 읽고 이러한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꼭 그 영감으로 뭉뚱그려 휘두른 작품도 괜찮을 수 있다는. 예술가라면, 예술이라면 그 쓰고싶다는 열망만으로 만들어낸 작품을, 독자들이 받아들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 우리 모두, 주위의 모든 불이 꺼지고 창문으로 고즈넉한 달빛이 달아오를 때, 책상 위의 스탠드 불빛 아래 쏟아져나오는 영감의 늪 속에서 어떤 것이든 끄적이고 싶을 때가 있으니 말이다.  

"쓰고 싶다", 말하고 싶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의 발현이 원고지 위에서 펼쳐진 예술을 바라볼 때, 한 번 쯤은 최인호 작가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떠올려좀직하다.  

그리고. 이 책의 평가와는 별개로, 그 쓰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원고지라는 작가의, 최인호만의 십자가에 다시 선 그 용기와 열망에 무한한 찬사를 보낸다. 그 찬사의 마음 속에서 열망의 예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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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1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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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크핀과 스키터. 다시 한번 모험이 시작됐다.

 

80년의 세월. 허크 핀은 이미 80년도 전에 그의 노예 짐을 풀어주고 친구로 인정했건만, 그 동안 흑인 노예는 그토록 바라던 노예제도에서 해방이 되었건만, 아직도 유색인종은 노예에서 가정부로 치환되었을 뿐 그 근원인 삶의 뿌리와 제약은 1962년에도, 80년의 세월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노예제도를 통해 백인과 흑인, 백인과 유색인종은 다른것조차 아닌 '틀린' 것이라고 규정되었던 것은, 오히려 그 겉모습은 비교적 쉽게 바뀔 수 있었다. 80년의 세월이 지난다음에는 피부색이 어떻든간에 인간의 형식을 가진 '것'들은 다들 평등하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외견은 분명 바뀌었다. 더이상 유색인종은 노예는 아니다. 모두 똑같은 인간이라고, 그저 피부색이 다른 것뿐이라는 것이라고, 우리는 그 다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더 상황은 악화되었다. 우리는 틀린 것은 쉽게 바꿀 수 있어도 다른 것은 쉽게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다른 것이 아니고 틀리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우리는 서로가 다르다는 명분으로 그 모든 틀림을 차별이 아닌 구분으로 대치시킬 수 있다. 나와 너는 서로 틀리기 때문에 화장실을 따로 써야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는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세균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화장실을 같이 쓸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회. 그리고 그 주장이 매우 현실성있게 백인들에게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 새로운 허크 핀의 모험이 시작됐다. 

 

 

 

아이빌린. 희망이 사라져서 새로운 희망에 다가간다.

 

그녀는 자신이 키운 백인 아이가, 자신과 그녀의 피부색에 대한 구별을 인지할 때가 되면 스스로 일을 그만둔다. 자신이 키운 아이가, 심지어 자신의 친엄마가 아니라 실제로 키워준 아이빌린에게 엄마라고 부르던 아이들의 본능을 서서히 교육과 세뇌가 지배해나가기 시작할 무렵 그녀는 그 모순을 견딜 수 없어 다른 본능을 찾아 떠난다. 자신을 그토록 따르던 아이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바뀔 때의 그 허무함과 배신감이란. 열일곱명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모성애 가득한 그녀가 자신의 아들처럼 고이고이 키웠던 아이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바뀔때의 느낌은 아마도 미니잭슨이 '엄마 미워'라는 말을 듣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의 스스로에게 부여된 원죄일 것이다. 그녀는 이제 충분히 지쳤다.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 저물어간다고 느낄 즈음에,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아들을 잃고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어쩌면 가장 큰 희망이 될 수도 있는 모험이 찾아온다.

 

 

 

스키터. 가려진 차별과 자학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무언가 자신에 대한 고민이 없던 남부의 여느 여자아이들과 달랐던 스키터. 보통의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남들과 조금 다르게 대학에 진학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역시 그저 여자일 뿐이었다. 비록 유색인종에 드리워진 차별의 그림자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될수도, 가려질 수도 없다.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그녀는 이미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사회로 날아들 준비를 다 했다고 할지라도 아직 사회는 그녀의 날개짓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진로란 그저 용모만 단정하면 타자를 칠줄 몰라도 되는 비서라든지 회사의 잡일과 심부름을 도맡아해줄 일들 뿐이었다.

또한 그녀 역시 아직 그녀의 날개를 채 펴지 못했다. 그녀는 비록 대학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을지 몰라도, 그녀의 날개는 이미 자랄만큼 자라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 스스로 날 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 날개가 채 자라지 않았다고, 나의 날개는 덜 여물었다고, 내 날개는 남들과 달리 볼품없다고 스스로를 학대했다. 이미 충분히 다 자란 늠름한 그녀의 날개를 오직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만이 보지 못하고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 조금씩 벼랑끝으로 다가섰다. 어쩌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부푼 기대를 조금씩 진실로 바라보기 시작하며.

 

 

 

모험은 험난하다. 그리고 실패할 것이다.

 

스키터와 아이빌린은 너무 큰,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대상을 향해 모험을 하기로 결심한다. 선긋기. 다름을 명분으로 한 틀림과 차별이란 것에 대해서. 그래서 미리 초를 칠 수 밖에 없다. 모험은 실패할 것이다. 아이빌린과 스키터, 그리고 미니잭슨이 아무리 벽을 깨부수는 모험을 감행하더라도 결국 그 벽은 깨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들도 충분히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벽은 너무나 견고하다.
그 벽은 이미 수천년의 세월동안 이어졌다. 세계의 역사가 유럽의 역사로 귀의할 때부터 노예는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의 노예는 전쟁포로나 가난하거나 죄지은 자의 신분추락이 대부분이었다. 세상이 유럽으로 한정되었던 중세까지 노예는 신이 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세가 끝나고 유럽의 역사가 점점 세계의 역사로 확장되어가면서 새로운 존재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그동안 드물게 볼 수 밖에 없었던 유색인종의 세계, 자신들이 찾아갈 수는 없었지만 가끔씩 그들의 역사에 편입되었던 유색인종들의 세계를 직접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유색인종이 이룩한 미지의 세계, 야만의 세계를 백인들이 찾아내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백인 내부의 선긋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선을 긋기 시작했다. 너무도 확연하고 알아보기 쉬운 선. 모두 옷을 벌거벗고 아무런 세속적인 것을 벗겨도 구별할 수 있는 태초의 선. 바로 확인할 수 있는 피부의 색깔. 벽은 이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워지고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막강한 과학기술의 힘으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옳은 것으로, 유색인종이 틀린 것으로 규정지었다. 그 차이는 신과 인간의 차이만큼이나 현격하다. 유색인종은 인간으로 취급을 받지도 못하는 삶, 아니 생존만을 영위했다. 이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는 차별의 시간이 수세기동안 덧대고 또 덧대인 뚫을 수 없는 벽을 향해서는 세 여인의 모험은 그저 모험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 이 거대한 담론앞에서 우리는 너무도 무기력하다.

 

그리고 더욱 슬픈 사실은 우리가 이미 결론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스키터와 아이빌린, 미니가 깨부수고자 노력했던 그 벽의 외견은 조금 많이 흠집이 생겼다. 그녀들의 모험 이후에-그녀들의 노력여하에는 상관없이- 짐 크로법은 철폐되었고 모든 유색인종과 백인은 법적으로 완벽하게 같은 대우를 받으며 같이 생활할 수 있다. 유색인종과 백인의 결혼, 교통수단의 동승, 학교교육의 통합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외견은 조금 흠집이 생겼더라도, 그 벽의 근간은 너무도 단단하다. 그 벽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그 시스템을 만든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벽, 더욱 단단한 재질로 이루어진.

 

벽은 인종차별로 이루어져있지 않다. 인종차별은 벽들 중에서 비교적 상당히 튼튼하고 질긴 재질의 덧입힘일 뿐이다. 벽의 근간은 인간의 본성,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을 통해 '우리'를 형성하려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벽은 무너질 수 없다. 인간이 영원한 이상.
우리는 그새 어떤 새로운 벽을 만들었나. 미국내의 백인과 유색인종이라는 벽과 같이 이제는 미국인과 비미국인, 조금 더 확대하면 선진국의 사람들과 제3세계의 사람들에 대한 벽이 확고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그 벽은 실질적인 이유는 달라도 외견상 대부분 백인과 유색인종의 구별이기도 하다. 슬프게도 우리가 현재 한국에 있는 백인들에 대한 첫인상과, 동남아시아에서 온듯한 사람에 대해 가지는 첫인상에 대해 솔직히 생각해보기만 해도, 우리는 이 벽이 견고하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굳이 이렇게 멀리갈 필요도 없다.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벽들 중 정말 심각한 것은 사소한 것에 있다. 내가 일하던 곳은 임대아파트가 밀집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임대아파트 단지 옆에는 일반적인 브랜드의 이름을 가진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아파트단지의 놀이터에는 서로의 아이들이 왕래할 수 없도록 철조망이 쳐져있었다. 우리는 이미 자신이 스스로 벽을 한정할 필요 없는 어린이들부터 벽에 가두고 벽을 쳤으며 벽에 대해 교육시키고 있다. 메이 모의 학교 선생님과 같이.

 

이 벽은 깨지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견고해진다. 그래서

 

 

 

미스 힐리, 미스 리폴트. 그녀들은 죄가 없다.

 

우리는 이 책의 이야기에서 조금 재밌는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저 거대한 영겁의 세월을 무기로 한 철의 장벽과 미스 힐리, 그리고 미스 힐리와 미스 리폴트의 관계가 묘하게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잭슨 마을의 실질적인 지배자 미스 힐리는 거대한 벽 앞에서 사실 아무것도 아닌 여자다. 소설의 이야기 내내 가정부들에게 엄청나게 거대한 벽으로, 혹은 그 거대한 벽의 대리자인양 등장하는 미스 힐리 역시 영겁의 벽과 철조망이 만들어낸 하나의 세뇌된 개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삶은 자신이 이끄는대로 움직인다는 듯이 행동하고 그렇게 미스 리폴트에게 명령한다. 명령하고 그 명령에 생각없이 따르는 미스 리폴트. 미스 힐리는 평생 그런 리폴트를 시종부리듯이 할테지만 실상 미스 힐리 역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시스템이 만들어낸 거대한 벽의 철저한 피조물일 뿐이다. 그래서 미스 힐리가 그렇게 나쁜 인물일지언정, 소설을 읽는 내내 미스 힐리 때문에 짜증이 솟구쳐 책을 덮어버릴까 고민을 했을 지언정 그녀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녀는 거대한 벽과 철조망에게 인정받는, 아니 인정받고 싶어하는 모범생일 뿐이다.

 

 

미스 루 앤. 그녀는 죄가 있다.

 

그녀는 저 거대한 벽에 아주 조금이라도 흠집을 낼 수 있는 존재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어떤 알약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그녀는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약을 집어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 더 안락한 길을 택한다. 차마 그 벽을 향해 계란을 던질 용기를 내지 못한다. 자신의 가정부를 아끼고 평등한 존재라고 생각할지언정 그녀는 그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착한 백인 주인마님에 만족한다. 이것은 단지 착한 사람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옛날 조선시대에도 착한 양반은 있었다.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성행하던 시절에도 노예들을 그나마 인격적으로 대우해준 착한 주인들은 존재했다. 미스 루앤 역시 그와 다름 아니다. 그녀의 개인적인 행동에는 죄가 없다. 그의 행동과 생각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행동으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벽은 그대로 일지언정 그 벽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고, 그 벽의 외견을 덜 단단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 그 기회를 미스 루앤은 잡지 않는다. 세상에는 많은 착한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미스 힐리와 같은 사람들이 더 소수일지도 모른다. 미스 힐리와 그녀의 말을 생각없이 따르는 미스 리폴트보다는 그런 미스 힐리에게  대드는 것에 몸사리는 착한 미스 루 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저 누군가 먼저 나서기를 기다려주는 수많은 미스 루앤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사이, 거대한 벽의 신봉자이자 피조물인 미스 힐리는 자신이 진리인양 벽을 덧댄다. 수 많은 미스 루 앤은 그저 안타까워하며 바라보고만 있다. 결국 벽은 깨지 못한다. 대신 다른 벽이 깨져나가기 시작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박제해버린 벽에 대해서.

 

<헬프>는 결국 성장소설이다. 아니 모든 소설은 성장소설이다, 어떤 의미로든. 그리고 <헬프>는 거대한 사회의 벽 앞에서 미처 자신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있는 세 여인의 성장소설, 그녀들이 스스로를 박제해버린 벽을 깨는 이야기이다. 벽은 꼭 사회에만 거대하게 서 있지 않다. 그 벽을 통해서든,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냈든, 아니면 그녀의 어머니나 남편이 만들어냈든, 각자에게는 스스로의 벽이 존재한다. 아이빌린, 스키터, 미니 잭슨 역시 스스로의 벽이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 자신들이 만들어낸 벽을 실감하지 못한다.

 

미니 잭슨.

 

미니 잭슨은 상당히 독특한 캐릭터다. 그녀는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주체에 서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그녀가 없으면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마치 촉매제와 같이. 그녀는 주체에 서지 못하지만 항상 주체적으로 작용한다. 스키터와 아이빌린이 주가 되는 가정부의 삶에 대한 책을 만드는 작업에도 그녀는 항상 틱틱대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항상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미니 잭슨이다. 미스 힐리의 치부를 공개하여 그것을 보험으로 삼는 생각은 도저히 그녀가 아니면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런 그녀도 자신의 집에 돌아오면 그저 당시의 평범한 부인이며 어머니일 뿐이다. 천식인 아이를 걱정하고 남편에게 맞으며 속만 썩인다. 그런 그녀 자신의 벽은 어찌보면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쉽다. 미니 잭슨의 독특한 캐릭터가 마지막에 살짝 아쉬운 마음이 처음에 들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녀만이 가질 수 있는 나쁜 마력(매력의 오타가 아니다)을 마지막에 충분히 살리지 못한것만 같은 아쉬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벽이 너무 진부하다는 것. 하지만 또 그와 똑같은 이유로 어쩌면 그녀만이 깰 수 있는 벽이기도 하다. 어머니이자 아내가 어쩔 수 없이 가져야 했던 수천년 이상의 벽을 깨부술 수 있는 여성은 셋 중 어쩌면 미니 잭슨이 유일하다. 아이빌린이 스스로의 벽을 깰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켜야 했던 아들을 잃었다는, 어머니로서의 벽을 깰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결국 이 가장 진부하면서도 동시에 누구도 깰 수 없는 벽을 깰 수 있는 이는 미니 잭슨 뿐이다. 그녀의 결말이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결국 결말에서 최소한 아내가 가질 수 밖에 없는 벽을 깨기 위해 망치와 정을 꺼내 들었다.

 

미스 스키터

 

이제 여기까지 오고 모험의 마무리가 다가오면 드디어 스키터에서 '미스'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다. 이제 그녀는 미스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그녀는 어머니가 발라놓았던 석고를 스스로 깨기 시작했다. 유색인종 가정부에 대한 책을 쓰면서, 그 벽에 맞서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결국 깨낸 것은 그녀 스스로의 벽이었다. 멀대같이 큰 키와 푸석푸석한 머리, 어눌하고 수줍은 말투 속에서 그녀의 내면은 점점 그녀의 외형과는 달리 작아져만 갔다. 조금 더 내면을 성장시켜보기 위해 대학을 가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지만 졸업 이후 내몰린 여성에 대한 차별의 현실속에서 오히려 더욱 더 작아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동시에 두가지 엄청난 변화가 다가왔다. 킹카중의 킹카라 불릴만한 주 상원의원의 아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다. 또한 그 와중에 자신의 생각을 토대로 가장 보수적인 곳에서 유색인종의 가정부로 사는 것에 대한 책을 만드는 작업, 어쩌면 kkk단에 의해 혀가 뽑히고 손목이 잘릴만한 일을 감행한다. 그리고 이 두가지 상황에 맞서기 위해서 마침내 스스로의 내면을 성장시키기 시작한다. 결국 책이 나오고 스튜어트와의 관계가 정리될수록 그녀는 자신만 모를 뿐 엄청나게 변해있고 성장해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기 시작했고,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도 좋아했던 스튜어트에게 더 이상 목매지 않으며 당당히 자신의 책에 대해 밝힐 수 있다. 그리고 진실로 어머니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는 마침내 날아오를 모든 준비를 마쳤다.

 

아이빌린

 

아이빌린에게는 절망의 벽이 스스로를 감싸고 있다.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다. 그녀의 나이는 이미 50을 넘겼으며,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줄 것만 같은 아들은 한순간 불의의 사고로 먼저 떠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키우고 있는 메이 모가 약간의 위안거리일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거대한 벽이 다가왔다. 스키터와 만나고 그 벽의 실체를 조금 더 실감하게 되면서 아이빌린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녀을 박제하고 있던 벽이 조금씩 느슨해지고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그녀 스스로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아이빌린과 스키터의 책자 작업의 편집을 맡은 건 스키터이지만 글을 직접 쓰는 것은 아이빌린 자신이다. 하나하나의 글에서 아이빌린은 자신을 깨운다. 결국 아이빌린이 마지막 위안거리인 메이 모블리와 이별을 하면서 모든 것을 잃게 되자 아이빌린은 정말로 그녀 자신만을 위한 희망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아이빌린은 항상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루브리나를 위해서, 아들의 친구를 위해서, 메이 모를 위해서, 스키터를 위해서. 항상 남을 위해 기도하고 남이 잘되기만을 바랐다. 자신의 삶은 남을 위해 기도하고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키터가 떠나고, 미니 잭슨이 새로운 삶을 결심하고, 메이 모블리의 곁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자 그녀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 역시 미니 잭슨이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강구하면서 떠오르게 된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그녀는 깨닫는다. 이것이 자신 스스로의 새로운 희망이라는 것을. 미니 잭슨을 위해 생각한 글쓰기이지만 결국 이것이 그녀 자신의 다음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이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의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메이 모블리가 두살이 된 때부터 이제 학교에 다니고 헤어져야 하는, <헬프>의 이야기와 시작부터 끝까지 가장 성장한 사람이 미스 스키터라면, 이제 앞으로 이어질 <헬프>의 뒷이야기에서 가장 기대가 되는 사람은 당연히 아이빌린이다. 아이빌린. 그녀 자체가 이미 희망이다.

 

 

 

결국 저 거대한 벽은 깨지지 않았다. 세 여인의 의기투합과 모험은 나름의 대성공을 거두고 벽에 조그마한 흠집은 내었지만 결국 벽은 역시나 깨지지 않았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벽은 멀쩡하리라는 것을. 다만 그 몸부림 자체에 세 여인은 만족했다.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들이 자신 앞에 우뚝 서있는 벽에 흠집을 내기 위해 달려들면서 자신들을 감싸고 있던 스스로의 벽들을 깨부수게 될줄은.

아쉽지만 여기서 만족해야 한다. 자신들을 감싼 껍질을 뚫고 나온 것에, 그 눈부신 세 여인의 성장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모를 일이다. 이 '가정부'를 내면서 바뀌어버린 미니 잭슨의 새로운 인생에서, 미스 스키터의 뉴요커 생활속에서, 작가 아이빌린의 책 속에서. 정말로 저 거대한 벽의 외형, 짐 크로법을 깨부순 망치와 정이 나왔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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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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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든, 타의든 소설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요즈음 이런 생각이 자꾸 머리에 남는다. 좋은 소설은 무엇일까. 과연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로 당대에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이며, 어떤 소설이 당대 뿐 아니라 길이길이 사랑을 받을 것이며, 어떤 소설이 비록 대중의 사랑은 받지 못해도 후세에 불후의 명작으로 사랑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좋은 소설과 잘 쓴 소설은 같은 말일까? 잘 쓴 소설은 구성이 좋다는 말일까, 이야기가 미칠 정도로 재미있다는 것일까, 문장 하나하나가 정말 하이얀 빛깔이 고이 나비는 그런 소설일까.

 

이 의문은 김인숙 작가의 <미칠 수 있겠니>에서도 여지없이 아니, 더 강한 증폭을 자아냈다. <미칠 수 있겠니>의 한 문장 하나 하나는 너무도 유려하고 어떻게 내가 호흡하고 건드려야 할지 주체를 못할 정도로 매혹적이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아 이사람 참 글 잘 썼다' 라는 생각보다는 아 이사람 정말 참 '문장 잘 썼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나무 하나하나의 매력에 너무도 깊이 침전한 나머지 내가 왜 그 숲에 들어갔는지, 그 숲 안에서 찾으려 했던 것은 무엇인지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이러한 문장의 과잉은 설정과 의도의 과잉으로까지 이어진다. 그 섬에서 불타는 시신을 본 영감으로 시작했다는 이 소설. 소설의 말미에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렇게 많은 말을 하고도 또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 라고 얘기한다. 나는 이 표현이 이 소설을 소개하는 데에도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너무도 많은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너무 많은 공을 들였다. 처음의 영감과 그 시작은 매우 깔끔하고 단조로웠을지 몰라도 그 안에 하나씩 여미는 표현과 설정들이 덕지덕지 붙어나가면서 우리는 어느 것에 미쳐야 할지 도저히 감을 잡지 못할 정도에 이른다.

 

작품의 시작은 '이름'이 같은 나와 너의 사랑으로 시작한다. 너가 곧 나였던 세상을 시작하여 너와 내가 같지 않음을, 그래서 도피와 배신으로 이어지는 세상 속에서 주인공이 느꼈을 광막한 공허가 작품의 전체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설의 이야기 속에서 작품은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생과 삶의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간격과 그 간격을 순식간에 아우르는 아주 얇디 얇은 실선의 한 가닥 우연과 운명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지진을 통해 진과 이야나가 기억하지 못했던, 그러나 기억해야 했던 사실들을 떠올리게 하고 각각의 늪에서 빠져나와 서로의 월리스 라인을 좁혀나가 마침내 현재의 생과 합쳐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너무 많은 것들을 진과 유진을 통해 너무도 어렵고 무겁게 내비친다. 무엇이 그렇게 어려웠던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보노라면 이미 예견된 결말이었을지라도, 그리고 남들이 보기엔 너무도 순간에 지나가는 찰나의 일상이라도 당사자들에게는 미칠 것 같은 고통이라는 듯이. 진과 유진의 이야기는 너무도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이 무거움이 작품의 시작부터 우리를 옭아매느라 우리는 이 작품이 무엇에 미쳐야 하는지, 무엇을 보고 미칠 수 있는지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무슨 얘기인지 얼핏 알 것도 같지만 도저히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작가의 마음과 감성이 실상은 우리를 매혹적으로 끌어들이는 바다의 절대적 마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첫 대면한 이야나의 공포로 한걸음 발을 빼게 만드는 것만 같다.

 

결국 <미칠 수 있겠니>는 나에게까지 미칠 수 없었다. 작가가 미치도록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었을, 아니면 미치도록 토해내고 싶었을 이 이야기를 이끌어간 그 영감과 생각은 나에게까지 미치지 못했다. 아쉬웠다. 그리고 작품을 읽는 내내 작가가 미치도록 부러웠다. 이런 영감과 생각을 토해낼 수 있는 그 영혼이, 이런 문장 하나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자유로운 손가락이.

마치 터져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미치도록 너무나 많은 영감을 토해내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무한히 터져나오는 작가의 감성은 한 줄기 느껴졌다. 조금만 더 내게도 미쳤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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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형제의 병원경영 이야기 - 대기업도 주목하는 서비스경영 1위 선병원 삼형제의 병원경영 이야기
선승훈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80년대, 아니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내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곳에는 한의원이 딱 두개 있었단다. 그래서 정말로 미친듯이 쏟아지는 환자를 봐야만 했단다. 이것은 비단 한의원만 그랬을 문제는 아니다. 병원이나 치과병원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정말로 환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많았을 것이고, 반대로 의사는 부족했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때의 의사들은 정말로 환자들에게 선생님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약 20여년의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많이 변했다. 인구의 증가는 한계에 다다랐으니 환자의 수야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할 것이고 의사들의 수는 그 사이에 엄청나게 늘어나버렸다. 이제 더 이상 환자는 병원에가서 줄서서 기다리는 것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져버렸다. 의사가 환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의사를 보는 시대가 되어버린 요즈음, 그래서 병원의 경영은 더욱 중요한 문제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 책이 눈에 갔다.

 

<삼형제의 병원경영 이야기>는 사실 어찌보면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대전의 한, 조금 잘나갔던 정형외과가 병원급이 되고 그 병원들 중에서도 최고의 서비스와 의료수준을 갖추게 된 선병원으로 우뚝 서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지휘했던 선병원의 이야기가 책의 내용이다. 어떻게 보면 병원의 역사부터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바꾸었네 하는 본인에게는 무척 자랑스럽지만 남들에게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가득할 것 같지만, 이 책. 상당히 쿨하다. 책은 다짜고짜 처음부터 선병원 의료원장의 경영철학과 그에 따른 선병원의 기조의 변화를 보여준다. 내가 이러이러한 것들을 힘들게 바꾸어놓았지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병원은, 경영은 이래야 한다는 것을 바로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이것의 실제 이야기를 자신과 병원의 경험담으로 늘어놓는다. 결국 책은 이런 류의 책들과 다르게 지지부진한 인트로를 늘어놓지 않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하게 선병원이 어떻게 중부권 최고의 병원이 되었는지를 간결하면서도 화끈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어떻게 보면 뚜렷한 한계점을 가질 수도 있다. 바로 병원경영을 다룬만큼 책이 정하는 타겟이 의사들로 한정이 될수도 있다. 그러나 이책은 '병원'경영과 병원'경영'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다. 즉 일반적인 경영의 기본원리 속에서 병원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발휘할 수 있는 기지를 첨가함으로써, 이러한 류의 책을 원하는 독자들과, 당장 자신의 병원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의사들에게 모두 귀감이 될 수 있는 책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다만 개원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 오히려 의사들에게 이 책이 더욱 활용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일단 기존의 대부분의 의사와 이 책의 경우는 차원이 조금 다른데, 이 책의 저자의 경우에는 이미 병원급으로 성장한, 즉 자본력을 이미 어느정도 갖추고 있는 규모의 경제가 의료계에서는 가능한 위치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의사 한 두명의 일반적인 동네 병원에서 이와 같은 것을 멋모르고 따라했다가는 오히려 큰 코 다칠수도 있는, 어쩌면 대부분의 의사들이 소위 말하는 임상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그런 술기적인 면에서는 조금 아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활용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다시 정리하면 임상보다는 기초에 맞추어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책에 담긴 가장 기본의 이론들과 가치. 환자를 대할 때, 병원의 직원들을 대할 때, 그리고 진료에 나설 때의 가장 기본. 이 기본들을 다룬 책이니만큼 항상,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들이다. 결국 성패는 이러한 기본의 가치들을 얼마나 실제 임상에서 되새기고 꺼내느냐의 문제다. 의사들이 다시 선생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결국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야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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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드디어 나왔다 그녀의 첫 장편소설. 

  신간 평가단이라면 당연히 이런 소설을 평가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목을 받고 사람들의 관심이 한 눈에 가 있는 핫! 한 책 

 

 

 

 

  파시즘의 군중심리를 파헤친 책으로 프리모 레비의  

  책들과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는 그 책 

  일단 펭귄 클래식에서 나왔다면 믿고 읽어도 좋다 

  세련된 표지는 덤이다. 

 

  

 

 

 주제 사라마구로부터 미래의 고전이라는 

 평가를 들었다는 이 작품 

 그간 썩 관심을 못받은 포르투갈의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우리에게는 어떻게 다가올까? 

 

  

 

  

두권짜리라고 주목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종말 이후 세계에 대하여 , 그 세계에 대처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두렵지만 그래서 더 계속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는 주제. 

 

 

 

 

  표지만으로 읽고 싶게 만드는 책. 

  책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 미치도록 읽게 만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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